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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3 폭력 안에서 다르게 – 다른 쪽으로 (양효실)

폭력 안에서 다르게 – 다른 쪽으로

양효실 (미학자, 미술비평)

카프카의 단편 「유형지에서(1919)」는 그의 전작(全作) 중 “잔혹함과 끔찍함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한 폭력의 판타지가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나는”(장혜순, 34) 단편이다. 죄수의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갈 때까지 몸 위에 바늘로 글을 새기는 처형 방식이 단편의 전경을 차지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두 달 뒤에 집필한 작품으로 맥락화한다면 현실-정치-폭력의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연인 펠리체 바우어와 약혼하고 파혼하는 과정의 심리적 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읽는다면 카프카 개인의 사적-정신적 붕괴의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고문기계인 침대에 누워 고문 바늘인 써레가 “네 상관을 공경하라”를 적는 동안 죽어갈 죄수의 죄는 카프카의 인물들이 겪는 형벌이 이유 없는 박해이듯이 이유가 거의 없다. “불침번을 서야 할 야간 시간에 당번병으로서 잠을 잤다”는 게 “불복종과 상관모욕”의 증거이다. 유럽의 식민지인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인 듯 보이는 유형지에서 유럽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원주민-희생양-죄수들에 대한 처형은 지금껏 “재래식 처형방법”을 발명한 전임사령관의 충복인 장교가 집행해왔고, 신임사령관은 당연히 이 낡고 잔인한 기계를 없애려고 하고 있다. 백인 장교-사디스트-처형자는 말미에 갑자기 죄수를 풀어주고 마조히스트-피해자를 자처하며 침대 위로 올라가 긴 시간, 대략 12시간이나 지속되기 마련인 고통을 겪으며-즐기며(!) 죽으려하지만 너무 오래 글자를 써온 써레의 오작동으로 인해 장교는 즉사한다. 아이러니! 줄곧 냉정하고 중립적인 관찰자로 이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달한 탐험가, “유형지의 주민도 아니고 이 유형지가 소속된 국가의 국민도 아니었던” 탐험가가 유형지를 떠나며 단편은 끝이 난다

(나는 식민자도 피식민자도 아닌 탐험가의 ‘자리’, 이분법적 대립의 현실 바깥의 어떤 자리, 카프카가 위치한 자리를 응시한다. 공모도 저항도 아닌,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자리, 이 글이 다룰 이민하 작가의 자리 같아 보이기도 하는 자리를. )

나는 2019년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작가 오픈 스튜디오 프로그램에서 이민하 작가(이하 작가로 통칭)의 대표 사물-오브제라 할 무두질한 가죽을 처음 본다.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거나 벽에 걸린 짐승 가죽은 일순간 살코기나 내장에 의지하지 않고도 스튜디오를 도살장이나 푸주간으로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런 ‘환각’은 내게는 좋은 경험이었다. 시각적 강렬함과 감각적 전치를 겪으며 나는 좁은 미술계에서 또 보게 되겠군, 생각하며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2023년 개인전 《폭격의 자장가》 리뷰를 부탁하는 수림문화재단의 메일을 받는다.

죽어가는 동물의 육체성이 제거된 가죽-사물을 바탕으로 근대 민족-국가 및 제국주의에 의해 자행된 폭력을 소환하고, 미적으로 전유하는 작가의 작업은 일견 희생자 공동체를 위한 제의를 주관하는 제사장-주술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작가의 제의의 형식이 기괴하고 모호하기에 연상 작용은 어느 순간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가죽 공예의 소재인 무두질한 가죽을 이어 붙여 전시 공간의 벽에 걸맞는 세계 지도 형태로 만들어 걸거나 전시 테이블 위에 펼친 후 작가는 그 위에 그녀가 ‘플로터’라고 부르는 특수하게 제작된 장치를 설치하고, 가죽에 글을 새기는 작업을 한다. 짐승의 피부에 소유주의 이름-문장을 새기는 인두-불도장이 플로터 끝에 부착되어 있다. 레지던시를 오가며 작업하는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이 지역에 대한 리서치에 기반해 지역의 역사-이야기를 복원하는 형식은 작가에게도 영향을 미친 게 사실이다. “대전 지역에서 1950년대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들의 좌표 제시”를 의도로 삼고 “빨갱이”와 “부역자”라는 낙인을 계속 가죽 위에 찍고 새기는 〈이분법과 맹목성, 2021〉이나 아우슈비츠, 광주, 난징과 같은 대학살의 현장을 세계 지도에 표식하면서 그 장소 위에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나 “나무아비타불” 같은 기도문을 쓰는 〈그을린 세계, 2018〉, 혹은 세 장의 소가죽을 대상으로 폭력을 자행하는 세 대의 기계-퍼포머가 등장하는 <Ravages, 2023>와 같은 작업은 가죽과 기계의 ‘관계’라는 동일 조건 속에서 다른 상황, 쾌락을 모색한다. 내게는 낙인찍기, 애도, 현실에 만연한 물리적 폭력의 알레고리적 반복으로 차별화되어 읽혔다. 폭력은 그 자체 나쁜 것이라는 도덕적 반응이나 피해-당사자 편에 있다고 가정된 작가들 일반에 대한 기대가 미끄러진다. 이민하 작가는 역사의 폭력에 분노하고, 미시사가 발굴한 고통을 위로하고, 가죽과 기계의 폭력적 관계를 ‘즐긴다’(jouir).

작가의 작업을 읽으려는 내가 참조한 전(前) 경험은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관계’ 혹은 불가능한 이미지인 “수술대 위의 우산과 재봉틀”이었다. (무두질한)짐승 가죽과 작가가 협업자의 도움을 빌려 발명한 고문-글쓰기 기계의 병치는 일견 일상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전혀 연결불가능한 사물-이미지-기표들의 관계를 조성한다. 수술대, 우산, 재봉틀은 무의식에서, 도착적인 성적 연상 속에서나 연결가능하다. 의식의 관성이나 폭력을 위반하는 무의식적 연상의 힘에 기댄 초현실주의적 이미지(상징계적 질서-논리를 찢는)를 통해 나는 작가의 가죽 대(對) 기계의 대치나 ‘관계’를 우선 이해했다. 아니 기억 속에 다행히 그 이미지가 있었다. 동물성이 거의 제거된 가죽과 인간성이 겨우 읽히는 기계는 서로를 상대할 수 있고 견딜 수 있다. 미적 장에서라면. 초자아의 강력한 작용 속에서도 고개를 쳐드는 ‘이드’의 힘 때문에 보기-감상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금기와 위반의 동시성을 알고 즐기는 이들은 몰래 즐길 것이다. 가축의 엉덩이에 ‘소유자’의 이름-엠블렘을 찍는 불도장이 폭력의 반복과 동시에 고통의 위로에 사용된다.

동시대 전시장은 정치적 올바름 함양과 미적 향유가 따로따로 혹은 동시에 일어나는 장소이다. 근래의 전시는 휴머니즘적 계몽과 포스트휴머니즘적 (탈)승화 사이에서 혹은 그 둘을 동시에 끌고 가며 의식의 검열과 욕망의 탈주를 관리한다. 이민하 작가의 전시는 내가 보기에는 그 둘이 중첩된, 공존하는 전시로 보인다. <유형지에서>의 가해자 장교가 최후의 처형자이자 피학살자로서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기계와 함께 사라지려한 장면은 유형지의 폭력을 무구한 원주민에 공감하며 읽고 있던 독자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카프카는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거스르며 불가능한 자리, 폭력이 쾌락과 겹쳐지는 글쓰기가 일어나는 자리를 꿰차고 쓰는 자의 예외성을 즐긴다. 글쓰기는 현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현실이 붕괴되는 미적인 것에 바쳐져야 한다.

나는 카프카의 <유형지에서>를 다시 읽었고 카프카의 도착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국내 카프카 연구자의 논문 두 편을 인용할 것이다. 우산과 재봉틀 다음으로 내가 주문한 ‘전(前)경험’이 <유형지에서>였기 때문이고, 국내 카프카 연구자의 수준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가령 고문기계가 “남성의 성적인 역할”을 대행하는 “찌르고 관통하는 기관”을 연상시킨다는 것, 그리고 직접적으로 몸에 글을 쓰는 쾌락(에로스)과 그 몸을 죽이는/거세시키는 행위(타나토스)가 중첩되어 있다는 연구자 변난수의 관점, 또 “폭력이란 가면 뒤에 숨겨진 성적 욕망의 형상화”, 혹은 “에로스와 타나토스, 지배와 피지배, 능동과 수동, 명예와 수치, 용기와 굴종,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양축”을 번갈아 사용하는 이 소설이 “예술적이고 미로 같은 전임 사령관의 도안은 메시지를 전하는 계몽주의 문학 선상의 흐름을 벗어나 문학의 자율성을 표방하는 오나먼트(ornament)로 특징지어지는 현대문학의 미적 경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드러낸다고 분석한 장혜순의 관점은 이분법적인 시선의 명료성을 교란하는 역설과 모순의 자리를 주장한다. 예술이 더 나은 현실을 위한 것이라면 폭력에 맞서 비폭력을, 피해자의 아픔과 고통의 우선성을 예술은 내걸어야 한다. 맞다. 그리고 현실의 도구나 기능이 아닌 예술의 (상대적)자율성이 예술의 현실적 기능이나 초(hyper)-현실적 역할이라면 폭력을 구조화하는 예술의 차이를 보유해야한다. 이미 예술은 줄곧 그런 폭력과 비폭력,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이 허물어지는, 능동과 수동이나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이 작동할 수 없는 예외적 자리를 붙들고 생존해왔기 때문이다. 혹은 비폭력과 정치적 올바름의 긴급함에 반응하는 예술의 사회성이나 책임을 예시하는 무수한 작업들이 있다. 그리고 카프카는 사디스트-가해자와 마조히스트-피해자의 관계가 일방향적일/단선적일 수 없는 어떤 불가능한 자리에서 “즐기기” 위해, 즉 현실과 법은 읽어낼/볼 수 없는 모호한 자리를 꿰찬 채로 “미적 경험”의 예외성, 혹은 특수성을 공표한다. 변난수나 장혜순의 카프카 읽기는 상상의 폭력, 작가가 발명한 폭력의 무대가 어떻게 현실 폭력을 인용하면서도 그것과는 다른 폭력의 장면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이해를 도모한다. 말하자면 나는 이민하 작가의 작업을 “감상”하면서 곧장 현실 폭력을 떠올리고 도덕적으로 반응하는 (기계적)반작용이 아닌, 폭력 안에서 폭력을 구조화하는 주관적인 형식을 읽었던 것이고 그것이 예술의 예외성, 특수성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살점이 제거된 짐승 가죽을 뜯고 찢는, 인간의 포스트휴먼적 대체물인 세 대의 기계로 구성된 설치 작품 <Ravages>가 전시예정이었던 장소에서 밀려난 것도, 사람들이 정확히 불편함의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불편을 토로한 것도 이해 못할 일이 아니다. 그 작품을 즐기는 미적 감상자와 그 작품을 불편해하는 도덕적-의식적 감상자는 모두 예술의 감상자들이다. 혹은 예술이 도덕-윤리의 수단이 아니라 도덕-윤리와 새로운 ‘관계’를 조성하는 방법이다.

나는 항간에서는 변태심리로 분류하고 예술가들에게서는 거의 상수로 작동하는 듯한 사도마조히즘적인 경향에 슬며시 이민하 작가를 끌어들인다. 작가와의 인터뷰 중에 나는 유소년기 무지막지한 독서광이었던 작가의 독서가 얼마나 들쭉날쭉했는지에 대해 듣는다. 언니오빠를 위한 큰아버지의 선물이었던 책장의 문학 전집을 작가는 <제인에어> 다음에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이나 폴린 레아주의 <o 이야기(story of 0)>를 읽는 식으로 ‘독학’했고, 이후 포르노, 스너프 필름, 고어, 할리퀸 등등 성-폭력-전쟁-죽음이 분리불가능하게 얽혀 있는 “바깥”에 대한 성향을 체화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가해자-장교와 같은 인물들이 ‘주연‘으로 움직이는, 피해자들의 이름-목소리는 적히지 않은 도착적 텍스트이다. 우리는 그런 전쟁의 승리자이자 역사의 처벌을 받은 이들의 이름들, ’행위들‘ 사이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 ’원주민들‘을 기억하려고 하거나 쓰여진 승리자의 이름들에 압도당할 것이다―우리의 내부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이긴 자가 옳은 자라는 병리적 앎을 각인하는 고문 기계이다. 나는 도덕보다 먼저 불온한 감각들, 욕망들을 체화한 이민하 작가에게서 물론 나를 보기도 한다.

내게 ’폭력 한 가운데 미적인 것‘이라는 모순적인 사태를 글자그대로 떠올리게 한 작가의 작품은 <상흔(Stigma), 2019>이다. 역시 가죽 공예에서 차용한 물성형 기법이 현실에 대한 상상적 개입의 중요한 형식으로 활용되고 있는 <상흔>은 먼나라 독일의 나치 치하에서 자행된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거기에 착안해 만든 작품이다. 작가 자신의 몸과 마네킹을 이용해서 사진촬영, 3D데이터화, 캐스팅 등등의 상당히 복잡한 공정을 거친 이 고문당하고 쓰러지고 사라지고 죽어가는 젠더리스한 형상은 나치 정권이 제정한 유전증 근절법(eradication of law)에 대한 작가의 읽기에 기반한다. 정신병, 유전병, 반사회적 성향, 동성애자 등을 포함한 ‘열등분자들’을 안락사시키려는 법의 폭력에 대한 ‘문서’가 소재가 된 작업임에도 가죽을 뒤집어쓴, 바로 지금 피부에 ‘죄’가 새겨지고 있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상상은 이들 필멸의 가죽-신체의 모호한 제스쳐, 로버트 롱고의 모노크롬 회화 연작 <도시인(men in the cities)>의 유니폼을 입은 도시인들이 총에 맞은 듯 춤을 추는 듯 보이는 어떤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듯이 이분법적 대치가 허물어지는 어떤 순간이 일으키는 시적 아름다움을 현시한다. 규범과 정상에서 밀려난, 극한으로 내몰린, 취약한 생존 자체를 속수무책으로 드러내는 존재가 아름답다. 가해자-되기의 욕망을 가르치는 현실-세계에서 예술은 실패나 추락의 제스처, 부정적인 것의 시(!)를 보유하고 현시한다. 시는 재현불가능한 해독불가능한 신체에서 막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는 이미지에 대한 것이다 <상흔>은 그런 이미지를 일종의 조각으로서, 그러나 입체인 척 조작된 가죽의 기괴함을 첨가해서 붙든다. 지금도 아니 더욱 강하게 작동하는, 편재하는 우생학적-우파적 관점은 타자와 죽음을 가시적 공동체에서 제거하려는 나치의 욕망-태도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작가는 자신에게 도착한, 자신이 수신한 공예적 사물들, 기법들을 이용해서 시적-미적이면서 동시에 폭력적-SM적인 무대를 만들었다.

2015년 이후의 페미니즘, 혹은 그 외 다양한 소수자 담론들이 정치적 올바름의 수사를 통해 과잉과 위반에 탐닉하는 예술의 자율성이나 특수성을 문제 삼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미 항상 불평등한 (권력-)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나와 너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평등과 상호성의 환상/이상을 실현할 것이고 대체로는 일방향성과 폭력의 징후를 담지한 채일 것이다. 데리다의 “폭력의 바깥은 없다”는 비관적인 단언을 나는 동시대 윤리가 그럼에도 시작해야할  기반으로 생각하기에, 이미 항상 불평등한 관계를 아주 잠시 ‘평등’의 사건으로 바꾸는 지점, 틈에 대해, 올바르게 읽을 수 없는 모호한 사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죽에 대한 기계의 개입이 폭력에 대한 공모이자 고통에 대한 위로라는 모순에 대해, 가죽과 기계의 관계가 춤과 살육으로 동시에 읽히는 교란에 대해, 스러지는 고통받는 신체의 시적 제스쳐라는 역설에 대해 이민하 작가 덕분에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사실 설득과 해석이 필요한 장면이라기보다는 반응과 응시를 요구하는 장면이다. 지적 냉소와 과도한 파토스 사이 어딘가를 보도록 연출된.  결국 예술은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재)표식하면서도 현실의 반영이나 도덕의 반복이 아닌 어떤 잔여, 부스러기 같은 것이니까.

그리고 작가의 몸이 직접 등장하는 퍼포먼스들이 두 번째로 시선에 들어온다. 작가가 전체 장면을 구조화하고 무대에 올리는 비가시적인 연출가가 아니라 당사자-퍼포머들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고-나눠주는 제물이자 제사장으로 등장하는.

가령 영상 <아남네시스(Anamnesis>, 2017>는 결혼이나 취업을 이유로 한국으로 이주해 외부자로 살고 있는 이주 여성들과의 협업이다. 이주 여성들은 이곳 여성 집단 내 소수자로서 차별과 혐오의 언어가 상시적으로 자신의 의식 내지 피부에 쓰여지고 있는 이들이다. 작가는 이번에는 가축에게 소유주의 엠블렘을 찍는 불도장을 당사자 여성들에게 쥐어주고, 이번에는 가죽의 아래 누운 자신이 덮은 가죽 위에 그들이 기억하는 부정적 언어를 새기도록 디렉션을 주었다. 가해자-사디스트의 전유물인 인두를 피해자-마조히스트가 쥐고 상징계적 언어의 폭력과 정서적 슬픔의 언어를 ‘재’-각인하는 과정은 결국 폭력을 글쓰기로, 여성들 각자의 모국어와 글쓰기 스타일이 나타나는 차이의 퍼포먼스로 바뀌게 된다. 우리는 언어의 내용이 아니라 언어의 차이, 폭력적 표면-가죽이 심미적 바탕-무늬로 변용되는 과정을 보게 된다. 이것은 언어 폭력이 한국어가 아니기에 읽을 수 없는 기호-이미지로 바뀌는 사건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용의 밑바닥, ‘아래’에 숨을 쉬는 작가의 몸이 있다. 혼자서는 상처이지만 모이면 노래가 되고 긍정이 되는 변용이 슬픔의 공동체의 주장이고 ‘가치’라면 여기서도 그렇다.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벌이는 제의가 아닌, 당사자 곁의 작가가 ‘꾸민’ 제의에 동원된 당사자들, 살이 타는 냄새를 내며 지지직 타들어가는 불도장-인두로 그들은 반복과 차이의 노동을 즐기고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사회의 문제는 당사자의 미적인 행위를 위한 소재로 전유되고 있다. 현실의 고통은 예술의 즐김을 위한 알리바이, 소재, 원료이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한 채 하고 있는, 수동적 능동성의 행위가 어떤 차이, 사건으로서의 대안으로 출현한다. 그리고 이런 협업자들이 이런 변용을 겪는 동안 작가는 바탕보다 더 밑에, 눈을 감고 들숨과 날숨을 느끼며, 오직 순간에 즉해서 있다. 가죽과 자신의 숨쉬기를 공유하면서, 가죽의 무게를 감각하면서, 타들어가는 피부의 냄새를 체현하면서 작가 역시 어떤 변용을 겪고 있었을 것이다. 이 제사장은 동시에 제물로서, <유형지에서>의 장교처럼 즐긴다.

“2019년 11월말 임신 8개월”의 임산부의 몸으로 참여한 퍼포먼스를 영상화한 작업 <통로(Passages), 2021>는 임신한 예술가가 글자그대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역시나 놀랍고 강렬하고 담대한 작업이다. 무대의 ‘내부’는 일본이나 한국의 산실(産室)에 대한 리서치에 근거해서 백색의 천에 둘러싸였고, 작가는 퍼포머들의 손에 이끌려 중앙의 제단 위로 올라가 눕는다. 임신을 둘러싼 수많은 금기를 거스르며 작가는 자신의 부풀어 오른 배를 상처 입은 4명의 당사자들이 만다라를 그릴 바탕으로 내어준다. 이번에 글쓰기는 작가의 있는 그대로의 몸, 배, 8개월된 생명체도 공유하는 바깥-피부이다. 퍼포머들은 붓을 들고 만다라를 바로 그곳에 그린다. 자신의 임신을 사회에서 유통하는 문화적 관습을 거스르며 작업의 소재이자 일부로 끌어들이다니, 사실 좀 놀라웠다. 더러움과 어려움, 불안 등등의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고 이곳으로 옮겨야하는 임산부의 사회-문화적 임무가 간단히 밀쳐지고, 여기서 작가의 임신한 몸은 부정적인 것을 변용시키는 제단, 제물, 알레고리로 전치되어 있다. 작가는 당사자로서 남성 문화 안에서 임산부가 어떻게 남성 주인의 소유물-자산으로 취급당하는지를 겪었다고 했다. 어떻게 병원이 임산부를 의사와 기관의 효율성을 위한 대상으로 관리하는지를 목격했다고 했다. 작가는 그런 경험을 고발과 고백의 소재로 사용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작업이 아니라 지금껏 자신이 실험해온 ‘가죽-피부’ 위에 폭력과 고통과 슬픔을 찍고 새기는 작업의 새로운 바탕으로 자신의 임신한 몸을 사용했다. 이번에도 작가는 눈을 감고 제단 위에 누웠고 무늬를 새겼고 당사자를 뺀 채 작동하는 임신-출산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지 않는 “신성한” 장소를 전유했다. 당사자-퍼포머들이 얇은 목판지 위에 적은/그린 문장들을 씻은 물을 유리그릇에 모은 뒤 망설임 없이 마시는 장면은 이민하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결단, 결기 같은 것을 시각적으로 보충하는 결정적인 장면으로 보였다. 이 더러운, 이 상처를 씻은, 이 치유와 재생을 기원하는 “성수(聖水)”(!)를 뱃 속의 아이, 무구한 미지의 생명도 나눠 마신 것이고, 그러므로 이런 제의는 최초이다. 임산부와 뱃속의 아이가 함께 협업자로 참여한 이 둘(double)이 마련한 제단의 퍼포먼스는 곧 아이가 거칠 “통로”에서 상연되었다. 그리고 출연자들이 모두 양막을 뒤집어쓰고 뱃속의 아이를 미메시스하는 마지막 장면 직전에 우리는 작가가 고고학적 임신출산 관련 이미지들에서 “발견한”, 근대적 병원의 등장 이후로는 사라진 출산의 전근대적 형식, 즉 서서 아이를 출산하는 형태로 자신의 2개월 후의 출산을 미메시스하는 작가를 보게 된다―작가는 이에 대해 “고대 이집트 벽화,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출산 벽돌’을 살펴보면 변을 보듯 쭈그려 앉은 자세를 하고 있어요”라고 설명했다. <통로>는 가죽과 기계의 관계를 복수화하는 이전 작업에 대한 좀 더 강력한 사후적 지지대일지 모른다. 직접적인 현실과 사적인 혹은 집단적인 경험을 뒤덮은 이데올로기-환영을 거침없이 찢고 횡단하는 작가의.

2023년 신작인 2채널 영상 <허물, 체액, 범람>은 이제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엄마인 작가가 낙태와 유산, 비혼모와 같은 여성들 일반이 겪는 사회적 문제, 일부 여성들에게 전가되는 비가시적인 폭력을 가시화하고 그들과 연대하고 그들을 위로하려는 작업이다. 4명의 여성 퍼포머들은 각자 자신의 경험을 카메라 앞에서 낭독하고 어떤 ‘엄정한’ 규칙에 맞춰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고, 이번에도 역시 만다라를 미세시스한 각설탕 만다라를 함께 만들고 뜨거운 물로 녹이는 공동 제의를 치른다. 2022년 작가가 새롭게 재미를 들인, 혹은 새롭게 차용 중인 공예 기법은 “효율성이 떨어지고 그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 있는 화학적 경화”로서의 옻칠 기법이다. 무두질한 가죽, 물성형 다음으로 작가가 골라낸 사라지고 있는 공예 전통이다. 들이는 시간과 돈이 좀 더 많이 필요한 공정을 배우고 구사하는 것을 두고 작가는 작가노트에 “홀로코스트와 같은 사건”의 원인을 “공무원 시스템과 효율성”에서 찾았던 역사학자 라울 힐베르크의 영향이라고 적었다. 전지구적 폭력과 일상적 시스템을 인과론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상상력의 역할, 혹은 소산이다. 역사학자에게도 필요한, 예술가에게는 당연한. 서서히 침범하는 옻독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옻칠을 새롭게 해석하고 재전유하는 것은 폭력의 바깥이 없는 세상에서 예술의 긍정, 자신을 죽이면서 살리는 역설적 긍정의 방식일 것이다. 친아들(!)을 3D 데이터로 모델링하고 ‘조각’으로 만들어내지만 역시 거듭해서 옻칠을 입히고 갈아내는 힘든 노동 속에서 출현한 두 번째(!) 아이(들)는 우리가 아는/기대하는 아이가 아니다. 임신한 당사자로서 임산부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불경한 행위를 작가로서 ‘자행-감행’했듯이 자신의 아이를 인용하면서도 사회가 금한 아이의 형상으로 변용함으로써 유일무이한 자신의 아이에게 역시 자신의 미적인 자유를 선사한다. 당사자란 당하는 자이면서 새로운 이미지-형상을 발명할 수 있는 아직-충분히-오지-않은 자이라는 것을 나는 작가에게서 배운다.

<허물, 체액, 범람>에서 작가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로를 들고 버려진 건물들 사이를 걸어다니는 제사장이다. 가죽-기계 작업에서는 안 보였고, 몇몇 퍼포먼스에서는 바닥에 누워있었던 작가는 이제 빈 건물 사이를 향로를 들고 걷는다. 상황과 조건, 형식에 따라 자신의 물리적 존재 방식을 수정하는 이 작가의 앞으로의 작업이 계속 변화할 것이라는 것, 그것이 작업에 영향을 주는 ‘현실’에 대한 반응이자 책임이라는 것도 지적하자. 카프카의 ‘탐험가’처럼 사건 밖의 예술가-증인으로서건, 소수자-여성-당사자들의 곁에 있으려는 여성-작가로서건, 사적인 경험을 통해 집단적 이데올로기를 수정하고 ‘다른’ 이미지-형상을 발굴하는 생활-예술가로서건, 현실 폭력에 대한 예술가의 대응은 비효율적인 장인 기법과의 재연결이라고 직관하는 연구자로서건 작가는 계속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우발적인 사건으로서의 예술을 기다리며.

2023. 10 딜리버리 – 안에서 바깥으로, 아래에서 위로, 삶에서 다시 삶으로 (조주리)

딜리버리 – 안에서 바깥으로, 아래에서 위로, 삶에서 다시 삶으로

글 조주리

 

‘출산(delivery)’은 작가 이민하가 지난 몇 해 동안 집중적으로 다루어 온 주제 중 하나다. ‘다루어 왔다’라는 말은 그간의 작업 밀도를 떠올린다면, 다소 미온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이민하가 정말 하려고 하는 일은 출산을 ‘구현’하는 일처럼 보인다.  출산을 매개로 ‘나의 일시적 죽음’과 ‘너의 영원한 삶’(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겠다)을 맞바꾸는 이항 구조를 드러내고, 그러한 구조주의적 해석을 넘어서기 위해 생명 탄생과 관련된 다양한 주체의 서사를 수집하고, 온 존재를 위한 의식을 치르고자 하는 제의 행위로 다가온다. 앞서 이민하는  <통로 (Passages)>(2019 – 2021)라는 표제로 여러 퍼포머들과 함께 임신과 가족에 관한 작업을 진행한 바 있는데, 새 전시 <삶의 뒤집힌 안쪽(The Inside of Life turned upside down)>(2023.10.06-10.15, 아트플러그 연수)은 동일한 지점에서 출발했지만 출산의 다른 지점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에 얽힌 서사와 정동을 다루고 있다. 조각 오브제와 설치, 퍼포먼스, 영상으로 분산되고 통합된 장면은 예의 ‘붉은’ 심상을 연출하며, 세속과 분리된 공간임을 명확히 한다.

출산의 스펙트럼을 극단으로 넓히다 보면, 그 안에는 자발적/비자발적 유산 경험과 다양한 부적(negative) 상태가 연결되고 포함된다. 이른바 정상가족 개념에 의거한 정상임신과 출산, 양육으로 이어지는 고리에서 비껴나간 사례들을 껴안으면서, 이민하는 다시 한번 생명을 매개하는 존재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다수의 작업에서 리서처이자 연출가, 그리고 퍼포머로 임했던 이민하는 이번 전시에서 ‘제사장’되기를 자처한다. 미술의 언어를 빌려 출산과 그 과정에서의 탈각을 다양한 상황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위해 방대한 양의 문헌 탐색과 사람들과의 인터뷰에 시간을 쏟고, 작업으로 다가가기 위한 크고 작은 실천을 매번 의식 치르듯 대하는 이민하의 스탠스는 프레임의 바깥에서 서사를 설계하고, 화면의 뒤쪽에서 상황을 견인하는 작가들과는 다른 지점에 와있다. 타인의 고통에 예민하게 감응하는 힐러(healer)이자, 그 스스로도 치유받기를 원하는 한 사람으로서 작업의 선봉에 선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결의를 요하는 것일까. 제의를 치러내기 위한 과정에 담긴 그 모든 신산함은 하나의 퍼포먼스에, 진혼(鎭魂)의 리듬에 수렴된다.

바로 그런 점에서, 이민하의 작업 태도와 주제적 천착은 때로 의문점과 갸웃거림을 유발한다. 어느 곳에서건 제사장의 입지가 좁아져만 가는 각자도생의 삶 안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버석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회적으로 규정된 모성에 대한 의구심이 맹렬하게 치오르는 곳에서, 아이에 대한 무차별적 헌신과 혐오가 기이하게 맞닿아 있는 한국 사회에서 특히 그렇다. 출산은 이민하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이 온몸으로 치러내는 삶과 죽음의 전장이지만, 그러한 경험을 겪은 바 없는 대다수의 타인들에게 영구히 이해받지 못할 공백의 지대이자 남의 사정이기도 하다. 그 기로에서, 이민하가 펼쳐내는 몸짓의 진의를 이번 전시에서 진중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전시가 구현되기 전부터  이민하는 ‘출산과 학살 사이’, 그리고 ‘제사장으로서의 예술가’로 명명한 사전 연구 단계에서 종교학과 문화인류학, 에코 페미니즘, 역사학을 아우르는 폭넓은 문헌 연구와 학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뿌리깊은 여성의 신비화와 그와  나란히 작동해온 여성 혐오의 역사를 교차하여 살핀 바 있다. 이와 더불어, 자연의 연속체로 상정된 여성 존재를 둘러싼 다양한 의례 양상과 각각의 문화적 함의를 조사하였다. 역사적 탐문과 여성주의적 시선이 응당 필요했던 까닭은 주제가 갖는 당대성, 즉 시대정신에 관한 끊임없는 재확인의 과정이자 논리의 직조를 통해 자기 방식의 의례를 모의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출산을 택한 자와 그로부터 소외된 자, 낳은 자와 태어난 자, 유산과 임신 중절의 당사자,  가해자와 희생자, 기억하는 이와 망각을 택한 자, 주변인, 주변인의 주변인… 여성성과 여성의 출산에 대한 과도한 숭앙도 무분별한 혐오도 동일하게 거세된 진공의 무대에서라면, 무엇이 중심이고 다른 무엇이 주변의 서사일지 가늠하기 힘들 것도 같다.

지난 작업과정을 통해 현대사회의 병리적 현상과 그 기저에 있는 정신성의 구조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데 관심을 가져왔던 이민하에게 있어 출산과 그 배면에 작동하는 타나토스(Thanatos, 죽음충동)의 양립 메커니즘은 전반적인 쟁점의 연속체인 동시에, 새로운 국면에서 작가가 실존적으로 경험한 생의 복잡성을 드러낸다. 나아가 예술적 재현이 갖는 윤리적 딜레마를 반추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작가적 수행성의 가능성을 탐문하도록 한다.  작업을 추동하는 동력은 그 자신의 임신과 분만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랜, 더 복잡한 기원을 갖는 것일지 모른다. 혹은 본능적인 동일시의 대상에서 객체로 분리된 아이의 존재에 머물던 시선이 조금 더 넓은 차원의 타자들의 삶으로 확장되고,  타자화된 자기 삶의 구심점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난 것일 수도.

전시장 내부는 이미 분명한 제의적 코드를 담지하고 있다. 단단하던 각설탕 더미의 일부가 뜨거운 열기에 녹아내리고 허물어진 판(plate), 아기 모양으로 제작된 악기가 올려진 두 번째 판, 그리고 옻칠을 한 귀와 코 조각이 담긴 마지막 판이 있다.  그 주변으로 아이의 전신 조각, 신생아가 웅크리고 기지개하는 동작을 3D 모델링하여 만든 애니메이션 작업,  퍼포먼스에서 착용했던 옷가지가 에워싸고 있다.  붉은 색으로 마감된 세 개의 원형 만다라는 보기에 따라 생명의 좌대이자, 망자의 무덤이자, 추도를 올리기 위한 비석이다.

아이 모양의 북(실제로 일반적인 북의 형태라기 보다 아이가 엎드린 형상에 가깝다)은 귀엽기 보다는 가혹한 상상을 떠올리게 한다. 어린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에 관한 옛 이야기,  어디선가 사람 가죽으로 북을 만들었다던 설화를 소환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잔뜩 웅크린 저 모습은 말그대로 복중 태아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다. 좁고 물컹한 공간 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웅크리며 뒤트는 동작은 성장 내내 지속되는 안정적 자세이자, 모체로부터의 양분을 한껏 받아들이는 모습일 수 있다.

누워있는 아기 조각의 몸체가 반들반들 윤이나는 까닭은 3D 프린팅으로 사출해 낸 조각 위에 옻칠의 재료인 생칠로 덧바르며 여름 내 표면을 사포로 갈고 닦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오브제 중 하나는 가죽으로 물성형을 하여 북 형태로 단단히 굳힌 것이다. 말캉하던 것을 단단하게 굳히고, 둔탁하던 것을 매끄럽게 연마하는 가공 행위는 원시적이고 고단하다. 마치 뱃속의 여린 생명을 매일 조금씩 키워내는 것처럼 말이다. 좌대 위 떨어져 나간 귀와 코는 전쟁포로의 귀 무덤을 즉각적으로 상기시킨다. 달리 보면, 생명체가 허물어지는 과정이거나 덜 여문 몸의 파편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에게는 섬찟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조형적 실험과 물성의 재배치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암시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조금 더 구체적인 단서는 영상 작업에 담긴 서사를 통해, 인물의 행위를 통해 유추 가능할 것 같다.

2 채널로 구성된 영상은 여러 참여자들과 함께 구성한 퍼포먼스의 기록물이자, 실제 전시 공간에서의 제의를 완성하는 중심이다.  작가가 초대한 이들은 저마다의 아픔과 사연이 있는 네 명의 인물이다. 비혼모, 낙태와 유산, 출산과정에서 배려받지 못한 경험. 국적과 인종에 상관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있을 법한 일들이지만 한자리에 이들이 모이기까지 어떤 소통과 설득, 배려와 협동이 작동되었을 지 짐작하기 어렵다. 작업에서 리얼리즘을 강조하는 다큐적인 시선으로부터의 탈피, 사연의 핍진성을 축소하는 편집, 여성 참여자 간의 신체적 접촉과 감정적 라포(rapport)를 건조하게 따라가는 시선을 읽게 된다. 무엇보다 작가 자신이 무리의 일원이자 무대 위의 제사장이 되어 제의를 진행하는 방식은 이민하 작업이 갖는 독특한 위상이자, 쉽게 의도를 단정하기 어려운 국면을 제공한다. 퍼포머들이 읊조리는 주인 없는 이야기는 타인의 음성을 대리하여 발화되고, 이들 사이에 약속된 몸짓 언어 안에서 코와 귀, 아이의 몸, 서로의 팔을 조심스레 어루만진다. 동작의 의미를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쉽지 않다.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죽은 아이의 몸을 쓰다듬는 애처로운 행위일지, 기어이 좁은 통로를 뚫고 험난한 세상으로 출격한 갓난 아이의 존재를 축원하는 손길일지 말이다. 다만, 한 가지만은 분명해 보인다. 울지 않아야 대상을 위로 할 수 있고, 거세게 껴안지 않아야 감정을 공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제의의 형식이 아름다워야 하는 보편적 당위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번 전시의 일부이자 전시 바깥에서 나란히 제작된 신작 Ravages 는  또 다른 기계적 몸짓으로 대체된 일종의 카운터파트(counterpart)이자, 또 다른 갈래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스핀-오프(Spin Off)처럼 다가온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천지창조’에서 표현된 거대한 신의 손을 바라보며 시작된 이번 작업은 인류사에 내재된 극한의 폭력성을 오늘날의 기계적 ‘손’에 의태하여 가시화한다.  그러나  공압실린더로 움직이는 기계팔에 걸린  가죽 패치는 여느 때보다 흐물거리는 비체(卑體, abject)의 모습이다. 동물 가죽을 집어 올렸다 내리치는 기계팔의 움직임과 그 속에서 유린당하는 살점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억세고 연약한지, 창작의 의도와 결과적 수행을 명명하게 해부하기란 쉽지 않다. 의료용 처치와 행정적 살처분, 악랄한 고문과 사도마조히즘의 유희, 출산과 학살 사이. 이내,  ‘사이’라는 말이 갖는 무책임한  느슨함에서 달아나고자 극단적 상상으로 치닫는다. 붉은 색 원형 좌대 위에 올라간 것은 찢어발겨진 살점들, 그리고 그것들을 갈퀴로 움켜쥐고 있는 기계팔 석 점이다. 서로 서로 맞물린 틈바구니에서 장엄한 두려움보다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단한 일들의 슬픔, 무기력, 피로가 몰려온다. 작품 앞에서 관객들이 투영하는 감정은 작가의 의도와도, 평론가의 인상과도 다른 또 다른 종류일지라도 상관없을 것 같다. 해질 녘, 공기 펌프를 끄지 않는 이상 밤새 사투를 벌이고 있을 좌대 위의 짝패들과 기이한 풍경을 뒤로하며 생각해 본다.

 

사회적 신분을 뛰어넘어 지구상 모든 이가 죽음을 향해 매 순간 가까워지는 이 공평한 세계에서, 제의를 올릴 사람은 누구이며, 위로와 추념의 대상은 누구인 것일까. 매 순간을 강건하게 살아가는 이들, 혼신의 힘으로 하루를 지탱하는 이들, 그 기회마저 실격당한 존재, 낳음을 당했다고 억울해하는 이들, 그 기회마저 실격당한 존재. 동일한 생명 탄생의 메커니즘으로 태어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죽어가는 우리 모두다. 전시를 보며, 태어난 순간 우리 앞에 당도해버린 ‘삶’이라는 딜리버리를 한껏 추앙하다, 별안간 내리쳐본다. 그리고 또 다시 축원해 본다.  안이나 바깥이나, 위나 아내라 모든 것이 만다라처럼 보이는 순간이다.

2021. 7 공공(public)의 기억을 소환하는 기념비적인 내러티브 (마동은)

공공(public)의 기억을 소환하는 기념비적인 내러티브

마동은, 대구미술관 전시기획팀장

2021년 여름,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개최된 이민하의 개인전 《검은 씨앗》에서는 그동안 작가가 꾸준히 확장시켜왔던 가죽에 인두질을 하는 작업 외에 방법론적으로 처음 시도한 사운드 설치 작품 <습작>(2021)이 공개되었다. 칠흑 같은 어두운 방 안에 오롯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작가의 목소리에 온 감각을 집중시키게 하는 이번 작품은, 대전시 동구 낭월동에서 시작되어 베른부르크 안락사 센터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어진 일종의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작업이었다.

작가의 작은 독백으로 시작하여 실제 전시실내 설치된 사이렌을 통해 온 공간을 공습 소리로 에워싸며 절정에 이르게 하는 이 작업은 지극히 주관적인 작가의 해석을 기반으로 작품의 내러티브를 구축해 나간다. 그러나 실상 작품의 내용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작가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닌 공공의 성격을 띤 기념비적 기시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역사적 기억에 대해 재조립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과 ‘기념비’, 이번에 처음 시도한 작가의 사운드 설치 작업에 대해 필자가 내세운 주제어이다. 필자는 이번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층위의 이면을 떠올리며,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기억(memory), 기념적인(memorial), 기념비(monument), 기념비성(monumentality) 등의 개념이 그의 작업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 되짚어 보고자 한다.

기념비는 고대 라틴어의 어원처럼 ‘기억나게 하는 것’ 혹은 ‘기념하는 것’이라는 원초적인 기능을 함의했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며 기념비는 그 개념과 실제에 있어 급격한 변환을 맞이한다. 공통의 가치나 이상을 추구하고자 했던 기념비의 전통적 개념이 양차 대전을 겪으면서 근대라는 시기와 불가피하게 충돌하게 된 것이다. 이는 정치적 기억의 교차점이라는 기념비의 태생적 특성에 20세기의 미적 혹은 사회정치적 변환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던 결과이다. 시대의 변화로 인해 파편화되고 혼성적인 상태가 지속될수록 이 사회는 이질적인 경험과 개인의 기억에 공통적 가치를 부여하며 공통된 공간(물리적 혹은 비물리적 공간)에 통합될 것을 요구받는다. 이로써 이미 공유된 신념이나 공통 관심사의 부재 속에 공공적 이슈를 담은 작품은, 흩어져 있는 대중을 공통된 시공간으로 안내하는데, 여기에서 기념비는 공통의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관객에게 공동의 기억이라는 일루전을 선전한다. 이민하 작가가 홀로코스트라는 주제를 기저에 놓고 작업을 시작했을 그 순간부터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미 공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작가는 잔잔하고 낮은 목소리로 베른부르크 안락사 센터와 아우슈비츠에 대한 기념비적 독백을 이어간다. 그의 독백은 과거의 상황을 현재적 장소에 집중시키는 고도의 상징적 행위이다. 한 두 개의 단어와 짧은 문장 그리고 그 내용을 전하는 목소리만으로 관객은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념비’ 혹은 ‘기념비적인 무언가’가 가지는 또 다른 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그의 첫 사운드 설치 작품을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작업으로 소개한 것일까?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기억을 소환시키고자 한 것일까?

일반적으로 홀로코스트와 같은 기념비적 내용을 앞세울 때에는 그것의 동기가 명확하고, 그 기념비가 생산해내는 여러 기억의 종류들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거나 다양하다. 어떤 기념비는 기념하는 대상에 대해 대중으로 하여금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요구를 하기도 하고, 반면 어떤 기념비는 한 국가, 한 민족의 과거를 스스로 설명하라는 요구를 받기도 한다. 또 다른 기념비는 다음 세대를 교육하고 그들에게 공동의 경험과 깨달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기도 하며, 극히 일부이지만 심지어 어떤 기념비는 단순히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의도에서 탄생하기도 한다.

한 예로, 미국에서는 홀로코스트를 기념하고자 하는 동기가 미국을 구성하고 있는 다국적의 인구만큼 복합적인 것이어서, 고상하면서도 냉소적이고 실용적이면서도 미학적이다. 그러나 이민하의 기념비 – 필자는 그의 작품 <습작>을 일종의 기념비라고 칭하고 싶다 – 는 매우 명료하고 효율적이다. 그의 기념비는 흔히 상상할 수 있는 풍경 속에 자리하며 흡사 박제물과 같은 기념비가 아닌, 시공간을 초월해 신경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지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무형의 기념비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습작>의 독백에서, 오랜 시간 내전으로 황폐해진 시리아의 길거리에서도, 골목마다 기관총을 들고 서 있는 다마스쿠스의 군인들을 지나치면서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일종의 두려움을 대전 골령골에서 처음 경험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나의 민족, 나의 국가에 대한 역사라는 것이 그에게 더 남다른 현장감을 주었던 것일까? 자신의 옆에 누가 있는지조차 전혀 알 수 없는 어두운 방 안에서 작가의 목소리만을 귀 기울이며 집중한 사람이라면 이내 그가 느꼈던 두려움을 찰나의 순간 공감했을 것이다.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의 영문과 교수이면서 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 문화적 기억과 관련된 분야를 활발히 연구하고 있는 제임스 영(James E. Young)은 ‘불가능한 영속성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의 사회적 이해관계들을 포괄하면서 시간적으로도 확장 가능한 기념비가 필요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 특히 기념비의 제작 동기와 과정, 제작 이후 관람자의 반응 등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맥락을 밝히면서 기념비의 기능에 있어서 대중과 사회적 기능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기념비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의 삶과 공동체 정신 속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위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행위의 중심에는 대중(관객)이 있다. 작가의 작품이 온전히 완성되기 위해서는 이 기념비적 작품이 관객에게 진실되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실 기념비에 대한 시각은 매우 다양하다. 앞서 언급한 제임스 영이 기념비의 당위성을 염두해 두고 이론을 펼쳤다면, 미술사학자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근대 시기에 만들어진 기념비들이 순수한 지표로서 자신을 초월하는 그 어떤 것도 언급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추상적이고 자기 창조적인 기념비는 외부에 존재하는 사건을 기념할 수 없으며 그것은 단지 전위된(dislocated) 기호라고 본 것이다. 또 더 나아가 기념비가 공동체의 기억 작용을 밀어내고, 공공의 기억을 자신의 물질적 형태로 고정시킴으로써 그것을 보전하는 대신 완전히 대체한다는 주장도 있다. 피에르 노라(Pierre Nora)는 기억이 내부로부터 적게 경험될수록 그것은 외부의 비계와 외적 기호를 통해 존재하게 된다’라고 경고했고, 안드레아스 후이센(Andreas Huyssen)은 심지어 현대의 대량 기억 생산과 과거의 기념비화, 그 관조 및 연구 사이에는 반비례 관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들은 기념비적 형식을 일단 대중의 기억에 부여하고 나면 대중은 어느 정도 그 기억에 대한 의무를 벗어버릴 수 있다는 전제를 가정하고 있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미술계는 추상적 형태의 기념비가 이 사회가 품고 있는 공공의 문제와 이상적인 가치를 재현하는데 더 효과적이라는 의견으로 잠식되어 가고 있다. 이민하 작가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물성으로서의 작품의 외형을 탈피하고, 인간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청각과 상상력에 의지하여 형체가 없으며 빠르게 확산시킬 수 있는 사운드 매체를 이용해 이 기념비적 작품을 제작했다.

이번 출품작은 제목 그대로 습작이다. 앞으로 작가는 더 발전된 방식으로 사운드 설치 작업을 선보일 것이다. 그 작업의 주제가 여전히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공공의 기억을 건드리는 방향으로 이어진다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후에는 작가 스스로에 의해 반(反)기념비적인 작품이 또 하나 탄생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

(2021년 7월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진행한 개인전 <검은 씨앗> 도록에서 발췌)

2021. 6 이민하: 학살과 출산 사이 (양지윤)

이민하: 학살과 출산 사이

양지윤 (대안공간 루프 디렉터)

   글로벌화된 현대미술계에서, 대안적 세계사 또는 지역사를 담아내는 예술가의 시선은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아왔다. ‘세계사’라고 불리는 거대 서사에서 벗어난 예술가 개인들의 역사 해석과 기록은 예술가가 취할 수 있는 자유의 상징이자 예술의 사회적 역할의 일환이다. 대규모로 생산되고 유통되는 문화 산업 사회에서, 사투리의 질감과 뉘앙스가 갖는 특유의 아름다움처럼 예술은 기능하곤 했다.

   이민하의 <그을린 세계> (2018-2019)에는 대형 크기의 소가죽이 세계 지도로 잘려져 벽을 메우고 있다. 세계적인 대학살이 있었던 지역의 좌표 64곳를 찾아가 인두로 낙인을 하나씩 찍어 내린다. 아파르트헤이트가 있었던 남아프리카, 나치즘이 있었던 독일 등 인종 차별과 종교 분쟁, 인간의 잔혹함의 역사가 있었던 곳에 짧은 문구가 가죽을 태우며 새겨진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키리에 엘레이손 기도문이 곳곳에서 타들어간다.

   작가의 이전 작업에도 인두질한 가죽은 주요한 소재로 등장했다. 인두질한 가죽은 노예에게 낙인을 찍던 과거의 관습과 맞닿아 있다. 작가는 그 관습 자체가 ‘배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가죽에 대한 관심의 시작은 2008년 5월의 광우병 촛불집회였다. 작가는, 광우병의 원인이 가축 부산물들을 사료에 섞어서 먹이면서 발생한 유전자 변형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시장의 효율성만을 지향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들어낸 자연의 변이였던 것이다. 관객은 가죽이 타들어가는 냄새를 맡으며, 시스템에 의해 죽어갔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을 떠올린다.

   이는 ‘여성적 예술’의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작가만의 대응이 된다. 백인과 유색인, 인간과 비인간, 여성과 남성 같은 이분법적 구분이,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구체화한 현실임을 드러낸다. 차별에서 출발한 이데올로기는 결국 모두를 파국으로 치닫았다. 이민하는 분석적 시선으로 시스템을 조망하며, 거북한 역사적 진실들을 꿰어 맞춘다.

   신작 <Passages>는 이민하 작가가 임신 8개월이던 당시 촬영한 퍼포먼스 영상이다. 4명의 퍼포머는 가부장제 시스템 속 제 가족과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한다. 성소수자임을 숨겨야 엄마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레즈비언, 한국인 아내의 임신을 원하지 않았던 우크라이나 출신의 젊은 남성. 자신의 이야기를 먹으로 써 내려가고, 작가의 배에 패턴을 그린다. 그리고 작가는 글을 씻어 내린 물을 마신다. 고대의 출산 자세를 한 작가의 얼굴에 우유가 부어진다. 그리고 5명은 돼지 껍데기로 만든 얇은 가죽 속으로 웅크리고 들어가듯 기어들어가, 새로운 연대, 또다른 가족이 만들어진다.

   1983년 바버라 크루거는 나뭇잎으로 눈을 가린 젊은 여성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흑백 사진 위에 <우리는 당신의 문화에 대해 자연의 역할을 하지 않겠다 We won’t play nature to your culture>라고 적는다. 작가는 남성 대 여성의 대립, 자연 대 문화의 대립과 같은 문화적 형태들을 구조화하는 이항 대립을 전면화했다. 이는 근대 세계의 형성과 관계 맺고 있는 서유럽 세계관과 근대 과학의 형성 과정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2021년 이민하의 임신한 예술가의 몸을 주제로 하는 작업 <Passages>는 이러한 이항 대립 다음의 질문을 한다. 사실 출산은 페미니즘 연구에서 불편한 주제였다. 1970년대 이래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여성을 생물학적 성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새로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 무수히 많은 연구와 사회적 투쟁을 했다. 이때 출산은 여성의 생물학적 재생산을 근원적으로 상징하는 주제이기에,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 <Passages>는 출산을 둘러싼 인류학적 의식들을 연구하면서 제작되었다. 생물학적인 것으로만 여겨졌던 임신과 출산, 육아의 과정이, 가부장제 속 다양한 사회적 의식으로 여성을 가치 매김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미투운동으로 새로운 지평을 만난 한국의 페미니즘 예술은, 남성과 여성의 대립에 집중하던 과거를 넘어서 인간해방이라는 보편적 지평으로 담론이 확장되어가는 중이다. 페미니즘 예술이 자연 속의 인간이라는 관점까지 확대되어가는 흐름 안에서, 이민하의 작업은 새로운 질문들을 던진다. 한국 여성 예술가가 국제적인 학살 지역에 관한 예술 작업을 만들 때, 그의 관점은 어떤 특수성을 가질 수 있는가. 게이와 이주노동자와 함께 자신의 출산을 기록한 예술가의 퍼포먼스는 가부장제 시스템에 어떠한 대응을 만드는 예술 행위인가. 현재 진행형인 이 질문은, 현대 미술사의 순간들과 함께 또 하나의 특정한 기록으로 남는다.

(2021년 6월에 진행한 그룹전 ‘삼중점’ 도록에서 발췌)

2020. 10 전시리뷰: 순리를 지키는 공증 (이지민)

순리를 지키는 공증

이지민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1958년부터 1960년까지 3년간 중국인 3,000만 명이 아사한다. 북한 총인구수보다 많은 수치다. 이는 마오쩌둥이 쓰촨성 농촌을 시찰하던 중 곡식을 쪼아 먹는 참새를 보고 화를 내며 던진 한마디의 말 ‘저 새는 해로운 새다’의 파장이었다. 이후 구성된 ‘참새 섬멸 총지휘부’가 참새를 닥치는 대로 소탕하자 해충이 창궐하게 되어 생태계가 무너지게 되면서 농작물이 초토화되고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된 것이다. 독일 3 제국 최대 규모의 강제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에서는 유대인을 비롯한 동성애자, 장애인 등 나치즘에 반대하는 자들이 대량 학살된다.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자마다 논란이 지속 중이지만 수용소에서 학살당한 유대인 수만 350만여 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학살은 실로 다양한 방법으로 고안되며 창의성과 폭력성 그리고 야만성의 경계를 오갔다. 그중에서도 살인 주체인 군인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안으로 마련된 방책은 그들만의 목적으로 인본주의를 거스르며 정당성을 확보했다.

위 사건들은 이민하의 드로잉 시리즈 <수 없는 재난과 한 생명의 태어남>으로 실현된 이야기 중 일부다. 양 또는 염소 가죽을 인두로 지져 타들어 가는 흔적으로 그려낸 드로잉은 작가의 관심으로부터 출발한 다양한 화두를 시각화하며 1940년대 폴란드와 독일의 정치·사회적 사건으로부터 2011년 동일본 대지진까지 약 70년에 걸친 역사를 소환한다. 이 작업을 마주하기 전에는 높이가 4미터에 달하는 대형 설치 <선홍빛 장벽>을 거쳐 가게 된다. 전시장의 벽면을 유럽풍 무늬의 벽지로 뒤덮은 다음 세 명의 여성이 파고 긁어내며 특정 문양을 형성한 입체 작업이다. 그 문양은 불교에서 우주의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도형화한 원형의 불화인 만다라(Mandala)를 닮았다. <수 없는 재난과 한 생명의 태어남>과 <선홍빛 장벽>은 지지고 긁어내는 행위를 통해 발현된 결과물로 매우 정교한 정성과 다소 긴 작업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작가는 작업 과정을 오체투지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하며, 기존의 작업 행보도 ‘제의적 형식’이라는 프리즘으로 읽혀 왔다.

<선홍빛 장벽>전을 관람하고 나서 이번에는 작가의 행위, 주제, 메시지를 특정 방법론으로 명제화 하기보다, 작가가 선택한 물질과 도출된 시각 이미지가 서로 공존하는 영역에 집중해보기로 한다. 동물의 가죽에는 돌이킬 수 없는 그을림을 내고, 깨끗하게 벽을 포장한 벽지는 칼로 찢어 흠집을 내면서 작가는 상처를 박제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그를 위로하는 정신을 팽팽하게 공존시킨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자신의 실천을 뒀다. 늘 쉽게 잊혀 버렸거나 왜곡되고 감춰져 온 신호들을 드러내기에 힘 써온 작가는 결과 양산보다는 그 지표에 직접 부대끼는 몸부림을 선행해 왔다. 수시로 차오르는 문제의식을 외면할 수 없어 자신의 몸으로 예술이 실현할 수 있는 국면을 전개해온 것이다.

이민하의 작품에서 다뤄지는 모든 사건이 한 곳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아채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작가의 본능적 순리는 멀끔한 공공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작품의 배경이 되는 일련의 사건들로부터 알 수 있듯이 기형적인 퇴행의 신호들은 우리를 둘러싼 상식을 훼손하고 있다. 작가가 지키려는 순리에 가해지는 위협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리의 지평에서 작가는 작업의 결과가 또 다른 제도와 논리로 굳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경계해온 신호들과 표현의 극한은 획일화라는 범주로 묶이면서 같은 오류를 범하게 되기 때문에 더욱 실천의 과정이 중요해진다. 작가의 실천은 스스로를 관통하면서 작품 내에서 정직한 기준이 되어 일종의 공증으로 기능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점점 상처에 무감각해지고 있다. 예측 불가능한 자극의 지속 때문이다. 이민하의 상처내기/위로하기 중심의 영역에서 그의 공증 지표를 따라 각자의 행동력을 발휘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가로막는 덫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보자. 그러면 작가 그리고 우리가 지키려는 순리를 만나게 될 것이라 기대한다.

(2020년 10월 이민하 개인전 전시리뷰 – 동무비평 삼사 원고 발췌)

2019. 11 이민하의 작품론: 지극한, 세계를 마주하는 (최윤정)

이민하의 작품론: 지극한, 세계를 마주하는

                최윤정 | 미술비평가 / 현 문화비축기지 전시담당주무관

  그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나는 나 스스로 가지고 있는 한계와 모순, 내재해 있을 폭력(가해/피해)과 방관자적 태도에 대해 짚어보는 상황에 직면했는데, 이는 이 비평에 임하는 나의 고된 과제였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세계와의 관계를 가늠하기 위해, 나에게 맞닿아 있는 사건 그리고 관계된 역사의 현상에 대해서 ‘나는 과연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이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하는 의문을 해결해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객관화하고자 애썼다. 그것은 지난한 노력이었으며, 결국 그의 작업이 내게 준 과제는 인간의/스스로의 고(苦)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내 안으로 좁혀오는 이 물음은 결국 어떤 상황 속에서 발생한 타인의 감정들을 ‘너는’ ‘기억하고’ 공감할 수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되묻는 기분이었다. 이는 그의 작업이 나에게 던져준 메시지다.

그나마 ‘명료해지는’ 것은 나에게 구체적으로 닿는 ‘감각’을 혹은 ‘기억감정’을 되새기는 일이었다. 문득 수년 전 작가가 자신의 개인전 명칭으로 사용했던 ‘Palimpsest’(복기지, 양피지 위에 쓰여진 글을 긁어내고 재활용한 고문서)를 떠올렸다. 지우되, 남은 옅은 흔적 위에 중첩하여 기술한 내용은 차별과 폭력의 역사, 인간을 바라보게 하는 거울이 되었다. 내게는 이민하의 전 작업의 맥락을 가늠하는 중요한 열쇳말이 되어준 용어다. 다시금 그것은 벌어진(은폐되고, 방관된 형식으로) 상황(역사, 사건)에 마주한 인간의 심리,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작가의 해석이자 형식이었고, 그의 실천을 이끌었다.

개인전 《팔림세스트(Palimpsest)》(2013)에서 작가는 여러 나라의 기도문이 새겨진 가죽을 씨실과 날실로 엮어 망토를 만들어 직접 입었다. <기도문을 입다>(2009)는 마치 작가의 연속될 작업에 대한 하나의 예고편으로 읽혀진다. 그 씨실과 날실이 풀어져 학살과 분쟁이 벌어지는 세계의 지도 <그을린 세계>(2018-2019)가 되기도 하고, 차별의 역사 속에서 고통받는 누군가의 증언 <아남네시스(Anamnesis)>(2017)와 <제물>(2017)이 되기도 한다. 기도의 행위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구원을 향한 인간의 외침은 연민의 감정과 절박함에 대한 상황을 상기하게 한다. 작가에게 종교적 관심 이상으로 ‘기도’의 행위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하나의 기제가 된다. 사적인 이익을 희망하거나 혹은 신념과 신앙 사이에서 경건하고 올곧은 외침으로 드러나거나, 기도란 인간의 나약함과 강건함, 속된 욕망과 고결함, 고통과 희망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인간의 중층적 측면들이 복합적으로 응축된 행위다. 손을 모으고 하늘을 향하고 고개를 숙이는 기도의 몸짓형상은 성스러우면서도 짐짓 약자일 수밖에 없는, 혹은 그저 비통하고 고통스러운 인간의 존재적 한계를 연상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습관/습성의 일부이자, 몸짓형상이 표출되는, 외부적 자극인, 어떠한 상황들과 관계하므로 인간적 본성에 천착하는 작가의 시선은 마땅히 그 상황을 좌시하지 않았다.

<아남네시스>(2017)에서 작가는 가죽을 덮어쓰고 있다. 그 가죽에 참가자인 이주여성들은 한국사회에서 겪은 차별의 경험에 대해 인두로 새긴다. 가죽 위에 인두로 ‘지진’ 글은 사라지지 않을 생채기를 내면서 동시에 그 상황을 이겨낼 내면적 힘을 구축하는 주문처럼 새겨진다. 그렇기에 가련하되 강건하다. 문제없이 흘러가는 듯한 주류사회에서 구체적인 개인들이 안고 있는 고통의 국면이 은폐를 벗어나 지워지지 않을 흔적으로 기록되고, 한 글자 한 글자 직접 써 내려가는 글은 비록 약자라도 상황을 직시하는 자로서 이미 강자의 폐부를 훑는 공격자가 되었음을 지지한다. 기록이 새겨지는 가죽을 덮고 작가는 눈을 감은 채 알몸으로 누워있다. 가죽 한 장의 두께 사이로 작가는 고스란히 그들 내부의 분노와 슬픔, 고통에 공감하는 몸을 표현한다. 번제의 의식을 빌어 그들의 감정과 생생한 증언을 경청하고 연대하는 몸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번제의 제물이 아니라 ‘증언을 증거하는 몸’이다.

주류사회의 폐부를 찌른다. 그가 여성 판소리꾼(권송희)의 제안으로 함께 협업한 <트리니티: 홍보가 다시쓰기>(2019)는 흥보가의 가사 일부를 현대적 언어로 바꾸어보고 그 향방이 ‘지금 여기’ 여성에 대한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주류사회의 시선과 다를 바 없음을 증명하는 작업이었다. 여성에 대한 발언과 행태, 비웃음과 조롱을 여전히 마주하지만, 그 곡을 다시금 판소리꾼이 정면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노래한다. 직시하고 분노하고 겁을 주는 표정으로 그 울림은 강력하다. (“물이고 가는 여자 귀 잡고 입 맞추고 다 큰애기 겁탈하고 수절과부 모함 잡고 길가에 허방놓고”_흥보가 / “길가는 여성한테 강제로 키스하고 여고생 강간하고 이혼녀에게 추근대고 구덩이를 파서…”_현대어 번역)

<인간보관용 콘크리트 박스>(2018)에서 작가는 한국의 산업화 시기 여공들의 숙소였던 가리봉 벌집(쪽방촌)을 무대로 현장에서 작업했던 내용을 토대로 하여, 장판지에 인두로 공간을 기록하고 연꽃을 새긴 설치작업을 보여주었다. 작가는 실제 비어 있는 가리봉벌집 쪽방 한 벽면에 지난 삶의 시간을 보여주듯 겹겹이 붙여진 벽지를 도려내면서 만다라 형상 <연꽃>(2017)을 새겼다. 연꽃은 고통 속에서 피워낸 인간의 삶을 어루만지며 그곳의 삶을 증언했다. 과거 여공들이 살았던 그 장소에, 현재는 노인들과 외국인 근로자들의 가난한 삶이 자리한다. 한국 주류사회의 내재화된 차별과 억압의 기제로 양산된 불안한 삶의 현실에 대해 작가는 관찰하면서 구조적으로 그 현상에 다가가고자 하였다. 때로는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가장 가까이에서, 때로는 객관화된 거리를 설정하여 모두가 바라보도록 조절하는/강제하는 시점을 택일하면서.

살이 탄다. 인두질로 타오르는 가죽의 냄새가 선연하다. 인간의 종교와 이데올로기로 얼룩진 갈등은 인간의 역사가 펼쳐진 이래 해결할 수 없는(혹은 해결하지 않을) 분쟁과 학살의 국면을 만들어왔다. 작가는 우연히 시리아 등지에서 분쟁지역의 사람을 만난 계기로 스스로 증폭된 관심을 확장하여, 세계 각지의 분쟁과 학살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설계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리서치를 구체화해왔다. 2018년 시작된 <그을린 세계>(2018)는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을 범위로 다루었고, 불도장을 통해 각 사건의 좌표마다 짧은 문구의 기도문을 쾅쾅 찍으며 내리 새겼다. 객관화된 시선으로 시점은 저 멀리 관찰자이거나, 전지적 단계에서 세계를 관망하는 사이를 이끈다. <그을린 세계>(2019)는 그 규모를 확대한다. 좌표는 미대륙은 물론 호주의 아파르트헤이트 문제까지 확장된 형태로 종교분쟁, 인종차별, 침략의 역사, 영토분쟁 등 인간 본성을 의심케 하는 극단적 갈등상황을 다루고 있다. 좌표가 설정된 플로터가 멈추는 자리마다 인두도장을 대신한 레이저 마커가 잔 불꽃과 함께 진한 연기를 내며 짧은 문구의 기도문을 새긴다. 이 장면은 확대된 화면으로 생중계되는데, 마치 포화의 장면으로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을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 항공 촬영으로 응시하는 것과 같은 충격을 만들어내었다. 글로 나열되어 기술된 분쟁과 전쟁에 대한 기록은 이민하의 작업에서 공감각적이고 입체적 실체로 시각화된다. 플로터에 새겨진 좌표는 작가의 시선이 출발하는 곳이자 집중하는 지점이고, 그곳에 상징적으로 새겨진 기도문은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의 절박함과 국가가 국가의 명분으로 자행하는 잔인한 폭력성을 잊지 않고자 하는 시선을 견지한다. 가죽으로 겹쳐진 세계지도 위를 가르며 새겨지는 기도문에 폭력의 역사와 상황들이 상기되는, 보면 볼수록 마음이 편치 않다. 그 곁에 <상흔>(2019)이 자리한다. 이 작업은 바로 내가 직시할 수 있는 근접한 거리에서 절박함과 비통함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인간의 껍데기를 형상화한다. (어쩌면 ‘기도’라고 표현했어도 좋았을 작업이다) 이 작업은 비애의 몸짓을 연구하면서 젖은 가죽으로 특정 신체의 마네킹을 활용해 캐스팅한 작업이다. 가죽의 껍데기가 마치 얼굴 없는 유령처럼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되 속은 비어있다. 그 공란에 기도를 읊조리는 소리, 고통을 한탄하는 듯한 웅얼거림이 머무는 듯하다. 형상의 주름들 속에서 그 소리는 삭혀져 분위기로 뿜어진다. 주변의 사람이 혹은 나의 모습이 가깝게 연상되는,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장면을 작가는 그렇게 펼쳐놓았다.

살이 타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마지막으로 나는 인두로 필사하는 작가의 작업과정 속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주목해본다. 차별, 갈등, 분쟁과 학살 등 인간의 가장 모자란 지점에서 나타나는 파멸의 행위들, 이를 증언하고 고통에 마주하는 강건한 힘, 동시에 나약한 순간 행해지는 인간의 기도. 일종의 제의적 작용으로 ‘피어오르는 연기’는 작가의 지향점을 모아내는 상징이자 장치가 된다. 상처를 각인하고 기억하기 위해 재기술해가며 고통을 발언하는 과정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란, 인간의 삶을 어루만지며 고통의 정서를 순화하고 공감과 연대에 대한 감각을 전염시키는, 가장 원시적이며 초연한 힘을 쥐고 있다. 죽은 가죽에 새살이 돋을 리 없지만 그렇기에 가죽에 새겨진 기록은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나약한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국면을 형성한다. 비록 인간의 본성이 진흙탕을 구른다고 해도 그럼에도 우리는 고결함을 지향점으로 삼아 희망을 품고 사는 존재가 아니던가. 문득 그의 탐구가 결국 ‘인간’에 대한 지극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느 시간 우리의 진한 대화 속에서 건진 놓을 수 없는 단초였다.

(인천아트플랫폼 2019 레지던시 결과보고집에서 발췌)

 

2018. 11 불의 과학, 신체적 언어 그리고 “망각할 수 없는 것들” (김남수)

이민하 작가: 불의 과학, 신체적 언어 그리고 “망각할 수 없는 것들”

김남수(안무비평)

#1. “빛은 사물의 표면에서 놀고 웃지만, 열은 침투한다.” (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중에서)

#2. “만약 이 삶 혹은 이 순간이 본질상 망각되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이 술어는 오류가 아니라 어떤 요구, 인간들이 부응하지 못했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일 터(…) 이것은 이 요구에 부응했던 영역, 즉 ‘신의 기억’을 가리킨다.” (벤야민, 『번역자의 과제』 중에서)

이민하 작가의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저 아득한 태초의 시대로부터 고의적 시대착오를 범해 ‘오늘’이라는 미래로 귀양살이 나온 고대인의 예술 같다. 시간의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으로 잠수했다가 무엇인가를 건져 올린 듯한 그의 작업은 고대적이며 그의 작업이 마치 “하늘에 부조되는 장엄한 무늬”처럼 본래 장식이 아니라 “무늬는 신의 언어였다”라는 의미에서 신성한 언어를 현재화한다. 고대의 신성성을 이 초연결 메가머신 사회에서 호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종교의 주요 테마이자 심지어 장사수단이었던 신성성의 코드를 예술이 취했을 때 어떤 컨템포러리의 특질로 바라볼 수 있을까. 아감벤처럼 컨템포러리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민하 작가의 작업은 “고대와 현재 사이의 비밀조약” 같은 것의 살아있는 예가 아닌가. 그만큼 그의 작업은 시간적 매듭의 성향이 아주 강하며, 이 매듭이 재미있는 것은 하나의 풀 길 없는 금지의 매듭이 아니라 본래 하나의 통일된 스피리추얼로 되돌아가는 고르디아스의 매듭처럼 다가온다. 그 매듭의 엉뚱한 나타남이라고 할까.

양가죽 위에 무두질하고 그 매끄러운 표면 위에 인두질을 통해 불의 언어로 무엇인가를 적어 내려간다는 것은 굉장히 풍토적인 동시에 그 해당 풍토의 대지에서도 이제는 근대 이전의 전통으로 관리되는 고대적인 풍습이다. 동굴 속의 목자나 유목 시대의 노마드가 무엇인가 가시적인 것이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소멸하여가는 것, 그런 의미에서 아주 특별한 비저너리 – “‘비저너리’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에서 시작해 이내 일반이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곳으로 뛰어올라 버린다”(콜린 윌슨) – 라고 할 수 있다. 어둠의 공간에서 저편의 삶을 기록한다는 것, 그것도 불의 과학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비저너리로써 ‘숨겨진 차원’을 연다는 것이다. 이 ‘숨겨진 차원’의 여밈과 펼침이 가장 발달한 것은 사막이며, 이민하 작가의 작업에는 이 사막의 풍토성이 강하게 풍긴다.

단순한 인두 작업이 아니다. 화인으로 가죽 표면에 글자를 찍는 작업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영적인 지식, 일종의 그노시스를 나타나게 하려는 작가의 의지와 욕망 – 욕망 아닌 욕망 – 이 자기 투신의 형태로 개입하고 있다.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면서 자신의 실존적 상황 자체를 되먹임시키는 작업이다. 기술적으로 용인되고 향상되는 작업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경험적 주체가 무한루프로 되풀이 되풀이 부엌 아궁이 속에 넣어지는 작업이다. 이는 어린 양과 사람 목숨이 등가로 표기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사람 목숨이라는 등식으로 성립하는 인식론에서 비롯된다. ‘숨겨진 차원’이 나타난다는 것은 어린 양의 희생제 없이는 곤란하다.

무엇인가가 기술적으로 술술 잘 풀려나간다는 것은 근대적인 시스템 속에서 예술이 분화된 기술체계 내부로 포섭됐다는 의미밖에는 없다. 반면, 이민하 작가의 악전고투 같은 투신은 장엄한 무늬로서의 문자가 본래 신의 권능으로부터 인간의 영역으로 이전될 때 엄밀한 의미의 ‘관계 개념’으로서 한 개인의 삶을 희생하는 과정이다. 이 ‘관계 개념’은 제한된 어떤 조건이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무한과 직결되는 매개이다.

#3. “아랍인들을 만족시키려면 폐쇄된 공간은 (…) 탁 트인 전망이 있어야 한다.” (에드워드 윌슨, 『숨겨진 차원』 중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어느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이민하 작가의 머무름이자 거주함은 언어이다. 정확히는 문자로 달리는 애벌레 주체로서의 언어이다. 애벌레처럼 기어가는, 캘리그라피화되어 살아서 꿈틀대는, 그럼으로써 생명적인 으르릉거림 – 존 케이지의 <로라토리오(Roaratorio)>처럼 – 이 강렬한 언어이다. 아랍 문자, 한자, 가나 문자 등등 흐르는 문자들이 갖는 그 여정과 흔적이 그대로 생명성의 징후로 나타난다. 그때는 애벌레 문자가 나아가는 각도와 방향조차도 언어이다. 갈림길에서 이쪽이냐 저쪽이냐는 중대해진다. 그때 언어는 외친다고 할까. 이 길이다! 그 길 안에 이 삶의 영원한 무늬를 찍어 넣겠다며, 아니 넣겠다는 듯이. 어떤 문자는 발음할 수 없으며 본래 신이 쓰던 것이라고 한다.

그런 관점일 때, ‘집’이란 돌아가야 하는 곳이다. 이 세계에 나타날 때는 그 ‘나타남의 사건’이 축복받고 기름 부음 받지만, 우리는 본래의 그 무면목(無面目) – 창조된 원류 그대로 혼돈의 “이목구비 없는 얼굴” -을 잃어버리고 망각한다. ‘집’은 모든 존재자가 모여들어 그동안 그러모은 사물의 언어와 질감 대신에 존재라는 그 첫 번째의 의미를 회복하는 씨앗의 방이다. 이민하 작가의 인두 작업은 사람들의 내력과 사연이 간명하게 불의 권능으로 쓰여져서 소리와 냄새로 음미 되는 과정에서 ‘집’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거기에는 ‘집’의 전망이 있다.

이민하 작가는 왜 무두장이처럼 양가죽 위에 인두로 지지는 작업으로 자신의 영적인 지식, 그노시스를 표현하려고 할까, 라고 질문한다면, 위와 같은 대답도 가설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쓰는 인두라는 도구이자 머신이 하나의 불의 과학 – 현대과학은 이 “‘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아직도 묵묵부답이다 – 의 소산이란 사실을 살펴봐야 한다. 이 인스트루먼트가 고대적인 연원을 갖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민하 작가의 사용 방식은 양가죽 위에 겹쳐 쓰기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불로 그대로 텍스트를 초벌 찍기 하는 것이다. 불의 언어, 불의 과학으로 오류 없이 쓰이는 책인 것. 그러므로 모든 생명이 돌아갈 비전과 함께 ‘집’의 전망이 있고, 그런 ‘숨겨진 차원’을 가시화하는 ‘비저너리(visionary)’의 내력이 가능하다. 다만 그러므로 이민하 작가의 작업은 더 모험적이고 신화적인 수사의 세계에서 조망할 필요가 있다. 그 작업은 종교적 성향과도 잇대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요청은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이다.

이민하 작가의 인두는 빛의 작업이 아니라 열의 작업이다. 그 열은 “침투하는 열(熱)”이다. 그 열기는 사람의 피부에 치직거리는 음향과 살타는 누린내 그리고 고통의 상상력이 환기되는 고대와 중세로부터 전해진 집단 무의식의 기억이 있다. 이 기억의 연대기를 펼치는 것이 이리저리 굴곡진 양가죽 표면이다. 이는 피하지방 아래 무의식화된 원형질적 기억들이 오래된 여행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어떤 타블로 판 같은 것이다. 이민하 작가가 불의 열기로 작업하는 공간은 이 판이다. 판은 사람들의 삶의 얼룩과 신산 그리고 망각되어서는 안된다는 윤리적 요청들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의 기억’(벤야민)으로만 가능하다. 이민하 작가의 작업이 동행하는 종교성은 이러한 측면에서 추론된다. 모든 것은 펼쳐내고 그 펼쳐낸 삶의 가혹한 깊이, 사연 많고 하염 많은 삶의 기록, 감히 공감이라고 말하기 버거운 차원에서 그 모두를 감당해내는 것이 라이프니츠적인 의미에서 ‘신’이다. 그에 따르면, 고백하는 것은 ‘신’이며, 어떤 고백은 ‘신적’이다.

#4. “불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무(無)를 찾는 것, 이것은 인간의 위대함을 말해준다.”(엠페도클레스)

이민하 작가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위상학은 이런 것이다. 신 스스로 ‘오늘’이라는 정신의 한 인간이 거처하는 곳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이런 특별한 작업의 행간과 복선 그리고 알레고리가 필요한 것이라고. 겹과 켜, 직접성과 현전성, 후각적 정신과 고도의 그노시스 같은 것들. 지금에 와서는 미디어 아트의 맥락에서 떠내려가듯 점차 폐기되어버렸다고, 뉴 미디어가 올드 미디어를 구축하는 것처럼 괄호 쳐졌다고 믿는 시대에 이민하 작가는 돌연히, 돌올하게 그 미디움(medium)의 시원적인 기호를 다시 호출해버린다. 그것도 모든 삶은 불멸이며, 불멸의 삶은 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망각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불멸을 알게 해주는 기호라고 증언하는 것처럼. “기념비도 추억도 심지어 증인조차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망각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삶”(벤야민)이 있다. 이 탁월한 긍정성이 인두와 그 불의 과학이 남기는 낙인의 흔적으로서의 문자 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으며, 마치 피닉스처럼 부정성이 변환된 긍정성으로 출현한다.

“모래바람에 눈을 감았다 뜨니 인천이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행동은 이기적인 자기만족.”

“마음속에서는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결혼과 함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구받았다.”

“얇은 종이처럼 팔랑거리는 차별들이 내 삶에 팽배했다.”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인간처럼, 그럼으로써 피닉스와도 같이 되살아나는 삶, 거기에 영원성의 지표이자 무늬가 찍혀진다는 듯이 이 종교적 언약 비슷한 느낌이 이민하 작가의 작업에는 있다. 거기에는 망각할 수 없는 것의 본질이 어떤 강렬도의 척도로부터 작동한다는 무언의 암시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남네시스(Anamnesis)>(2017)에서 이민하 작가는 상징적으로 인두질이 일어나는 타블로 판처럼 누워 있으며, 다른 이방의 사람들이 가진 각자의 사연들이 제각각의 다른 문자 체계의 잠언적인 언어로 화인된다. 그때 이민하 작가의 신체는 문자와 언어는 다르지만, 다시 헤쳐모이는 ‘집’으로서 일종의 바벨탑과도 같다. 흩어졌던 언어들이 영적인 씨앗의 방으로 모음 되는 곳, 거기에는 이민하 작가의 신체가 제공된다. 이 신체는 어린 양의 신체인 동시에 불길로 휩싸인 신체이며 동시에 잿더미이다. 그다음 순간, 재 속에서 다시 살아 오르는 다른 생명체의 신체이다. 바슐라르는 이를 ‘불의 새’라고 봤으며, 이민하 작가는 ‘상기(想起)’라고 봤다. 무엇을 상기하는가. 자신이, 또한 그 누구나 알아차리면 ‘불의 새’라는 엄연한 사실, 그노시스를 상기하는 것이다. 불의 과학으로 쓰이는 신체적 언어는 이처럼 희생제를 통한 ‘상기’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어떤 작업에서 이민하 작가는 인두로 문자를 찍고 그 화인 작업을 현재화하는 동시에 그 문자를 읊기도 한다. 통조림 된 문자가 아니라 불로 살아있는 문자가 퍼포먼스가 되는 것이다. 이때는 거대한 동굴이나 궁륭공간이 높은 중세도서관 같은 공간성으로 공명하기 시작한다. 쓰면서 읽는 것, 청각적 이미지를 통한 시각적이며 개념적인 차원의 개방은 ‘상기’의 가장 기본적인 루프이다. 가령,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에서 건강이 좋지 못한 젊은 사제는 고뇌하면서 일기를 적는데, 일기는 빈 여백에 쓰이면서 동시에 보이스오버로 읽힌다. 그리고 번역되는 자막은 다시 이 일기 내용을 가시화한다. 자신의 성독(聲讀)으로 울려진 텍스트를 다시 자신의 귀로 듣는다는 것은 공명하는 공간 자체가 부활하는 삶, 망각될 수 없는 삶의 기초라는 것이다. 그 공간성을 이민하 작가는 자신의 퍼포먼스에서 드러낸다.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바다 위에서 폭풍우를 만나 난파 직전까지 몰리는 것이 일반적이며,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악마의 맷돌이 돌아가는 사회에서 가속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민하 작가는 그러한 사회에 대한 응전의 형식이 아니라 그러한 사회로 초기 세팅된 정신적 형식을 완전히 새로운 서판으로 바꿔치기하여 깊은 망각 속에 있는 것들을 기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니 ‘상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망각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덧없는 삶은 덧없지 않다는 것, 이때의 ‘덧’이라는 찰나지간, 익명성, 겨를 없음은 그대로 영원성의 표지이다. 그 자체로 ‘덧’의 시간성은 불의 언어로 고정되고 가시화된다. 아니 신체화되어 타인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이 된다. 그노시스의 알아차림을 통해 이 삶의 고해를 항해하자는 것이 자칫하면 종교적 관념의 틀 속에서 헐벗은 반복이 될 수도 있지만, 이민하 작가는 그 인두질의 신체적 감각, 희생제적 자기 투신, ‘상기’와 부활의 본질로서 삶을 다시 바라보기를 요청한다. 아니 충격파를 던진다.

다시 한 번 더 묻는다. 왜 이민하 작가는 무두장이처럼 양가죽 위에 인두로 지지는 작업으로 자신의 영적인 언어를 추구하게 되었을까. 여기서 인두는 그 금속의 첨점 끝에 마치 ‘성 엘모의 불’처럼 응결된 불의 권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끝이 없는 거대한 파타고니아 협곡 사이를 아무런 안전보장이나 믿음 없이 그대로 던져진 운명의 무늬처럼 항해해갔던 마젤란 함대가 어느 모퉁이에서 번갯불이 돛대 끝에 둥글게 맺히는 현상을 만난 것처럼 말이다. 그때 선원들은 성스러운 여성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했다고 하는데, 이민하 작가의 작업은 바로 그러한 충동을 자연스럽게 촉발한다. 신이시여! 우리를 굽어살피소서. 암(闇), “울울하고 암암할 신의 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문밖까지 울려 나온다.” 우리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 소리가 울려 나올 때까지 인두로 지져야 한다. 인두는 비밀스럽다. 인두의 그 끝에 도사린 어떤 신적인 권능이 ‘불의 과학’으로 잠재해 있으며, 그것의 응축된 힘이 어떤 표면과 만나 화인될 때는 삶을 망각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망각할 수 없는 삶”이란 감각적이다. 감각의 경로를 따른다.

불길의 부조, 그 나타남의 사건은 마치 저 아득한 태초의 감각으로 일어난다. 우리말 “나타나다”는 음미할수록 어떤 신성한 현현의 느낌을 안으로 감싸고 있는데, 이민하 작가에게는 “나타나다”라는 동사는 그대로 ‘불’과 ‘연기’ 그리고 ‘냄새’의 언어로 표출된다. 오감으로 뒤덮인 채, 우리는 삶의 뜨거움과 누린내와 각성제를 한꺼번에 들이킨다. 이민하 작가의 작업 속에서 이는 불가피하다.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비평모음집에서 발췌

2018. 11 이민하: 불로 쓴 말 (김도희)

이 민 하 : 불로 쓴 말

김도희 (작가)

1.  간곡한 바람은 언제나 반복적이다. 기도문 필사는 손을 움직임과 동시에 목청 아래로 지속적으로 발음을 내려 보내 몸속에 그 말이 깃들기 바라는 행위이다. 이민하의 불로 쓰는 말, 인두 필사는 추상적 개념의 메시지, 그리고 육신을 연상시키는 가죽, 언 듯 보아 이 같은 반대의 요소 사이를 오간다. 겉과 속, 바꾸어 말하면 외부와 내부, 또 다르게 말하면 그림자와 이데아계 사이에 통로를 내고 넓혀 선명하게 한다. 새겨지는 것이 표면 속으로 침투하고 겹쳐지고 파고 들면 스며든다고 바꿔 말한다. 종이가 기름을 만나면 투명해지고 열이 가죽을 만나면 그을음이 눌어 앉는다. 이민하의 작업은 이러한 상반된 요소 사이를 기도하듯 오가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겹쳐진 몸을 표현하는 것 같다.

 2.  손에는 열이 흐르는 인두가 쥐어져 있고 그 아래에 가죽이 펼쳐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인 인두가 가죽 표면 위에 글씨를 남긴다. 펜은 종이 위 마찰을 일으키며 잉크를 남기지만, 인두는 피시식 치직 연기를 피워 올리며 가죽을 태우고 흔적을 남긴다. 성경에서 십계명이 새겨지는 순간, ‘온 백성이 천둥소리와 번개와 나팔소리를 듣고 산의 연기를 보았다.’ (출애굽기 20:18-20). 십계명이 구전이 아니라 반드시 ‘번개와 연기를 동반하여 비석에 새겨졌다’며 성경에 새겨져야(필사) 했던 이유는 그제야 비로소 말씀의 힘이 강한 실재감을 일으켜 믿음을 고취시키기 때문이다. ‘있으라.’ 말씀 한마디로 현상계를 창조한 신의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산이 되고, 사람이 되니 ‘속’을 빚는 힘이다. 그런데 이 ‘말’이 현상계인 ‘속’이 되면서 한계와 모순은 시작된다. 이민하의 작업에서는 이런 모순된 두 가지 축이 엿보인다. 육신을 초월한 것에 닿고자 하는 마음이 한 축, 그리고 그러한 마음의 양상이 물질(육체에 기반 한 인간 실존)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파괴적 상황이 다른 한 축이다. ‘번제’는 그런 모순의 일례이다. 육신을 정화하고 신에게 닿기 위해 죄를 범한 자기를 죽이는 대신 죄 없는 짐승을 제물로 삼는다. 죽이고 피를 보고, 태워서 하늘로 상승하는 연기와 그 타는 냄새를 감상하며 그 염원이 하늘에 닿는 것처럼 느낀다. ‘아버지 제 몸이 타고 있어요!’ 소원은 고통이다. 갖지 못한 것에 관한 고통이 번제물을 통해 표현된다. 그렇게 따지면 번제는 하늘의 통각을 자극하려는 일이거나 나의 결핍에 따른 고통의 대리물을 찾는 행위이다. 번제물이 깨끗하고 순수할수록 그 고통이 강조된다.

그녀는 커다란 가죽을 입은 듯, 덮은 듯, 죽은 듯 누워있다. 고통 받는 여자들이 둘러 앉아 그 위에 인두로 상처 입은 마음을 말로 새긴다. 작가는 고통의 대리인이 되기 위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나사렛 예수처럼 가죽 아래에 누워있다. 예수가 당한 육체적 고통에 관한 묘사가 치밀하고 극적일수록 신의 사랑이 강조되는 아이러니. 필사를 하는 사람들의 고통, 가죽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강조될수록 그 아래 누운 예술가의 몸은 ‘번제물’로서의 순결한 매체가 된다. 메시지가 가죽의 타는 냄새와 소리로 치환되니 이것은 ‘번제’다. 현상계로 침투하는 주술적 힘을 상상한다. 참가자들의 주문과도 같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은 이교도의 주문처럼 들린다. 남겨진 가죽은 예수가 무덤 속에 남겨 두었다는 피 묻은 헝겊과 같이 실재 고통의 증거 ‘아나포라 Anaphora-기억해 내기’이자 번제의 대리물이다. 아마 그들의 체증을 조금은 완화 ‘헤시키아 Hesychia-내적평안’되었을 것이다.

3. 나는 감정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믿는다. 감정은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에너지로 현상계와 맞물린다. 작게는 몸이고 크게는 우주. 번제물과 희생양은 이러한 에너지를 해소하거나 전이시키는 매체이다. 많은 경우 인간은 자기 행동이 용납되는 조건 하에서는 무슨 일이든 하게 된다. 논리와 이성은 여기서 억압된 인간 감정에너지 표출의 수단을 찾아 대령하거나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살육의 명분을 제공한다. 인간의 역사는 ‘종교’와 ‘이데올로기’ 즉, 유일신과 집단적 광기의 임계점이 낮은 곳에 유동 창궐하여 살육의 원인을 미화해 온 것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민하의 불도장은 대량학살이 일어난 곳, 분쟁지역, 자연재해가 있는 곳, 광기의 희생양이 대거 발생한 곳의 좌표에 기계적으로 도착해 ‘쿵!’, ‘쿵!’ 내리찍는다. 비극이 이미 벌어졌거나 벌어지는 중이므로, 이 도장 찍기는 양피지 위의 ‘기록’이자 ‘징표’로도 보인다. 이전의 필사가 그러하듯 가죽 위 연기와 그을음을 통해 참상과 고통을 상기할 수 있겠지만 나는 여기서 어떤 파멸의 징조와 좌절을 담은 저주(파괴적 소망)의 이미지 역시 떠올린다. 도장이 연기를 피우고 지나간 자리에는 정 반대의 말, ‘신의 가호를…’같은 기도 구절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염원은 다시 저주처럼 자기를 파괴하는 중이다. 좌표축 도장 찍기의 기계성은 욕망의 기계가 된 인간이 그 욕망에 냉정히 파괴되는 귀결이자 순리이다. 원인에 따른 자연한 귀결을 우리는 ‘신의 뜻’이라 부른다.

4. 쪽방촌과 바우하우스, 공감의 좌표뜨기

이민하는 바우하우스 판상형 주택의 아이디어가 한국에서 경제적 효율만 남아 쪽방이 되어버린 사연을 추적했다. 그리고 바우하우스의 높은 창, 빛을 투과하며 열린 형태로 이 방의 사연을 펼쳤다. 콩댐을 한 장판지로 만든 이 구조물은 입방체의 집을 단순히 펼친 모양이기도 하지만 창의 후광을 입은 십자가와 닮았다. 상자를 펼치면 그 펼쳐진 내부공간은 드러난 마음처럼 읽힌다. 살이 타는 감각적 자극이 사라진 곳에서 나는 함께 침묵을 유지한다. 쪽방의 장판지를 칼로 도려낸 연꽃 만다라는 ‘고통’을 확산 전이하지 않는다. 그러니 도려냈다기 보다는 피워냈다고 해야 옳다. 여기서 타인의 경험은 일방적 말씀으로 판별되는 ‘선’과 ‘악’으로 증폭되지 않았다. 대신 인간 삶, 보편의 고통으로 와 닿는다. 원인에 관한 분노와 원망이라는 누적된 감정이 없기에 징벌과 저주, 그리고 이에 따른 희생양과 번제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평화로움은 ‘안심’, 즉 나에게로 돌아오는 파괴력이 없는 중에서 그 업의 연쇄가 소거되는 상태이다. 조금 과장하면 가시관을 쓰고 피가 낭자한 고통받는 메시아가 사라진 말레비치의 십자가에 비유할 것이다. 감정의 대리물을 소급해 죄를 짊어지고 기꺼이 죽었던 예수가 ‘너희 죄를 사하였다’ 함은 본인 이후로 욕망과 감정의 ‘번제물’을 삼지 말라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민하가 예술을 통해 세상에 끼치고자 한다던 그 정신적 함양이란 이런 부분이 아니었을까.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협업프로젝트

2017. 9 성과 속을 매개하기, 희생양 되기 (고충환)

성과 속을 매개하기, 희생양 되기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이민하는 종이와 가죽에 텍스트를 쓰는 작업을 한다. 처음엔 기름을 먹인 종이에, 그리고 이후 점차 무두질된 양가죽, 소가죽, 돼지가죽, 그리고 사슴가죽에다 쓴다. 예나 지금이나 가죽을 무두질하는 것은 천한 일에 속한다. 작가가 가죽에다 텍스트를 쓰는 것은 이런 사회적 계급의식과, 사회적 약자로서의 자의식과 무관하지가 않다. 작가는 사회 문제며 사회 환경에 관심이 많다. 예컨대 전작(2017, 천 개의 문제풀이와 좌절)에서 작가는 가리봉동 쪽방촌의 한 방을 온통 텍스트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다. 기름을 먹인 종이로 도배를 한 후, 그 위에다 연필로 빼곡하게 텍스트를 기록했는데, 공무원시험, 토익시험, 부동산중개사자격증시험을 위한 기출문제들이다. 이런저런 시험에 내몰린 내일이 없는 청춘들의 암울한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2011년에는 가죽에 텍스트를 쓰고 그 과정을 전시하는 작업으로 동일본 대지진 참사의 희생자를 기리기도 했다(지난한 일).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 가죽에 텍스트를 새기는 행위는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하는 제의적 성격을 갖는다. 청춘과 희생자들 같은 사회적 약자의 상처를 보듬어 새살이 돋게 하는(재생) 것이다.

텍스트로는 세계의 모든 언어로 된 모든 종교의 기도문을 필사했다. 작가가 직접 필사하기도 하고, 참가자를 매개로 필사하기도 하고(관객참여), 때론 플로터를 통해서 필사를 하기도 한다. 왜 기도문인가. 작가의 작업에서 기도문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종이에, 가죽에 기도문을 필사하는 작가의 행위며 작업은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가지고 있는가. 사람들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이타적인 대의나 존재론적인 경우와 같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를 위해서도 기도한다. 이처럼 기도는 양가적이다. 성에도 속하고 속에도 속한다. 성과 속을 매개시켜준다. 속에 속한 것을 정화시켜 성의 차원으로 승화시켜준다. 정화와 승화를 매개로 성속을 연결시킨다(성속의 변증법?). 연결시킨다기보다는 원래 연결된 상태, 원초적 상태, 처음상태를 상기(아남네시스)시킨다. 처음상태(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원형)를 복원하고 회복시킨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존재의 처음상태는 성과 속이, 삶과 죽음이 하나로 연결돼 있었다고(연속성) 본다. 그리고 여기에 자본주의와 경제제일주의원칙이 매개되면서 생산적인 것(세속적인 삶)과 비생산적인 것(죽음과 성에 속한 것)이 분리되었다고(불연속성) 진단한다. 그러므로 불연속성을 넘어 원래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이 존재의 과제로서 주어진다.

작가는 그렇게 성과 속의 상관성에, 성과 속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여기서 성에 줄이 닿아있는 종교는 속을 정화하는 것, 속으로 하여금 성의 차원으로 승화시켜주는 것과 관련이 깊다. 그 방법이 여럿 있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가 경(기도문)을 외우는 것(독경)이고, 받아쓰는 것(필사)이다. 그렇게 받아쓰다보면 내가 지워지고 쓰는 행위만 남는다. 내가 지워진다? 번뇌가 지워지고, 욕망이 지워지고, 상처가 지워진다. 그렇게 지워진 내가 비로소 투명해지고 오롯해진다. 역설이다. 지움으로써 오롯해지는, 아를 지워 진아(진정한 나, 처음상태 그대로의 나)를 얻는 역설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종이에, 가죽에 기도문을 필사하는 행위는, 그리고 참가자로 하여금 필사에 참여시키는 행위는 이처럼 나를 지우는, 번뇌가 사라지고 욕망을 잠재우고 상처를 치유하는, 그럼으로써 진정한 나를 얻는, 진정한 나와 대면하는, 자기반성적인 행위와 관련이 깊다. 수신과 수행의 상징적 의미와 관련이 깊다.

그렇다면 작가는 가죽에다 어떤 텍스트를 어떻게 쓰는가. 어떤 텍스트로 치자면 주로 기도문을, 그리고 참가자가 있는 경우에 저마다의 내면독백(고백? 상처?)을 쓴다. 어떻게 쓰는가를 보면 인두로 필사를 한다. 그렇게 가죽에다 인두로 필사를 하다보면 가죽 타는 냄새가 나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참가자 저마다의 속말을 글로 뱉어내는 행위와 과정을 통해서 내면에 응축된 상처가 타고(정화?), 연기와 함께 해소(승화?)되는 것이다. 신자들이 지성소를 찾아 저마다의 죄(상처)를 고백하고 죄 사함(상처가 해소되는)을 받는 종교 예식을, 그 예식의 상징적 의미를 생각하면 되겠다. 실제로 작가는 전작에서 한 마을의 가장 높고 편평한 곳(아마도 성스러운 땅이면서 거룩한 곳, 땅에 있으면서 정작 그 주권이 하늘에 속한 곳, 그러므로 교회)에 지성소를 차리고, 마을주민들로부터 기원문을 적은 엽서를 전달받는다. 여기서 기원문은 기도하기, 죄를 고백하기, 고민을 털어놓기, 그리고 어쩌면 무슨 수건돌리기처럼 상처를 전이시키기와 통한다. 그리고 기원문을 적은 엽서를 전달받는 작가의 행위는 고민을 들어주고 상처를 덮어쓰는, 그럼으로써 마을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상처가 치유되는 상징적이고 주술적인 의미와 관련이 깊다. 저마다 내면의 상처를 털어놓아 상처가 해소되는 과정으로 보면 되겠고, 여기서 작가는 그 계기며 매개역할을 한다. 매개자다. 무당이다(요셉 보이스는 예술가를 무당이라고 했다).

작가는 참가자 저마다의 내면독백(상처)을 텍스트로 쓰게 한다고 했다. 여기에 작가가 누워있다. 편안해 보이기도 하고, 무방비 상태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무두질된 사슴 가죽을 의복처럼 이불처럼 덮어쓰고 있다. 그리고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5명의 외국인 참가자들(우즈베키스탄 2명, 중국, 터키, 이탈리아)이 겪은 차별받은 이야기를 저마다 가죽표면에다 인두로 쓴다. 차별받은 이야기는 작가가 참가자들에게 주문한 것인데, 작가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를테면 이주노동자 문제)이 반영된 것이고, 단순한 차별을 넘어서 저마다 내면에 응축된 존재론적인 상처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참가자들이 가죽표면에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쓰면 가죽이 타고 냄새가 나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상처가 전이되면서 해소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가죽이 타고 냄새가 나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은 중요하다. 바로 상처가 참가자로부터 작가에게로 전이되는 과정이 하나하나 기록되고 등록되는 상징적 지점이고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서 전해지는 상징적 제스처들이며 종교적 의례들의 원형으로 보면 되겠다.

이를 통해 상처가 참가자로부터 작가에게로 전이된다고 했다. 비록 가죽을 덮어쓰고 있다고는 하나, 여기서 가죽은 사실은 작가의 몸을 대리한다. 그러므로 가죽에 이야기를 쓰는 것은 곧 작가의 몸에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징적인 의미로는 작가의 몸에 이야기가 아로새겨지고, 작가의 몸이 타고, 작가의 몸에서 냄새가 나고, 작가의 몸이 연기가 돼 피어오른다. 번제다. 우리 죄를 대신할 희생양을 지목하고, 그 희생양을 바쳐 신의 분노를 잠재우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르네 지라르는 이런 희생양 만들기를 종교적 제의의 차원을 넘어 제도적 장치(제도기계)라고 본다. 사람들의 폭력욕망(욕망기계)을 투사하고 전이시키고 해소시켜줄 희생양 지목하기, 희생양 만들기, 희생양 내어주기에 모든 건전하고 건강한 제도의 성패가 달려있다. 그렇게 종교는 사회의 균형추 역할을 한다. 그 과정에서 폭력과 관련되고, 그런 만큼 제도는 희생양이 흘린 피 위에 축조된다. 그렇게 아마도 추후 작가의 행보는 폭력이 있는 곳, 세계 도처의 분쟁지역을 찾아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희생양을 자처하고 무당을 자처하는 행보가 될 것이다. 무당은 성과 속을 매개하고, 삶과 죽음을 넘나든다. 가죽은 죽은 짐승들의 몸이고, 죽음의 표상(주검)이다. 그 주검을 덧입어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재생이다. 참가자의 입장에서 보면 희생양(무당)의 죽음을 매개로 폭력(폭력욕망)이 해소되고 상처가 치유되는 재생이다. 작가는 그런 죽음의 표상(상처가 아로새겨진 가죽 그러므로 어쩌면 살과 피가 타는 몸)을 옷처럼 덧입기도 하고 이불처럼 덮어쓰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 세계의 상처와 폭력과 분쟁이 투사되는 스크린을 대신한다.

아나포라(Anaphora), 그리스어로 기억을 의미한다. 아남네시스(Anamnesis), 상기를 뜻한다. 기억보다 더 깊은 기억, 원형적 기억, 존재의 처음상태에 대한 기억이다. 그리고 헤쉬키아(Hesychia), 내적평안을 의미한다.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들이며, 작업을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에 해당한다. 이로써 유추해볼 때 작가의 작업은 존재의 원형을 상기시키고, 존재의 처음상태를 회복하고 복원하는 것과 관련이 깊다. 진정한 자기와 대면하는 자기반성적인 과정을 전제로 하는 이 과정(어쩌면 죽음너머로 재생되는, 그러므로 거듭나기와 정화의식)이 있은 연후에라야 존재는 비로소 내적평안을 되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이다. 가죽에 이야기를 쓰는 작가의 행위는 책을 쓰는 행위에 비유할 수 있다. 성과 속, 상처와 치유, 폭력과 희생양(르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이라고 했다), 놀이와 종교의식이 날실과 씨실로 직조된 고백의 문화학으로 집필된 책일 수 있다.

(2017년 개인전 ‘아남네시스’ 도록에서 발췌)

2017.4 <낮고 높고 좁은 방> 전시서문 (이민하)

<낮고높고좁은 방> 전시서문    

이민하 (작가, 전시기획)

간체자가 점령한 화려한 간판들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고층빌딩과 아파트숲의 풍경에 익숙한 나에게 중국의 어느 소도시를 방문한 듯한 인상을 주었다. 2014년 초가을, 서울에서 나고 자라 서울토박이였던 나는 구로구 주민들과 함께한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지역 리서치를 위해 참가한 구로공단 역사 투어를 통해 가리봉을 접하게 되었다.

70년대의 가리봉은 구로공단이라는 거대한 엔진이 시골에서 갓 상경한 젊은이들의 청춘과 꿈을 연소하면서 성장하던 시기였다. 공장의 기숙사에 미처 다 수용되지 못한 지친 노동자들을 위해 벌집들이 생겨났다. 가리봉의 벌집은 좁은 방 한칸과낮은부엌,길고좁은다락이맞물린특징적인구조의방들이수십채가연결된공동주택이다.

어린 여공들이 미싱을 타고 야학을 다니면서 꿈을 키우던 가리봉 벌집은 90년대에 들어서 구로공단이 쇠퇴하면서 2000년대에 들어서는 값싼 주거지를 찾아 유입된 중국동포들과 외국인 노동자, 노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구로구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도 낯설게 느껴지는 곳이다. 산업화의 아픔을 간직한 가리봉의 역사를 기억하고, 이 곳의 의미와 가치를 예술적인 접근으로 풀어내려는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전시 ‘낮고 높고 좁은 방’은 구로공단과 한국 근대화를 상징하는 가리봉 벌집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고시원 등의 오늘날 청년 세대가 겪는 불안정 주거공간이 이어지는 고리를 탐색한다. 이번 전시의 참여작가 8명은 전시주제의 문제의식에 동감하며, 구로공단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가리봉 지역을 답사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방’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전시공간의 입구에는 하꼬방1과 루핑집2으로 시작되는 불안정 주거공간의 다양한 명칭과 연표가 배치된다. 구로공단의 성장과 함께 생겨난 벌집방은 80년대에 등장한 고시원과 구조적인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연표는 고시원이 쪽방화 되는 과정과 IMF 이후 직장인들의 이용 증가로 인해 고급화되는 시점을 간략히 보여준다. 전시장의 초입은 현실적인 가리봉의 모습을 담은 방들로 시작하는데, 안으로 이동하면서 점차 사적이고 내밀한 방이 등장하는 순서로 배치되었다.

정희우는 도시의 공간에서 발견되는 작은 기호들을 탁본으로 어루만져 시각화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가리봉의 실제 벌집방을 탁본해서 방의 규모와 창문 및 3개의 문의 위치를 통해 관람객으로 하여금 벌집방의 특수한 구조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 사용감이 역력한 발이 엉성하게 묶여있는 왼편의 문은 대문으로 나갈 수 있는 주 출입구이다. 고개를 많이 숙여야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정면 왼쪽의 낮은 문은 방보다 낮게 만들어진 수도가 있는 다용도실로 연결된다. 정면 오른쪽의 약간 높은 문은 관 정도 크기의 좁고 긴 쪽다락방으로 연결된다.

전시제목인 ‘낮고 높고 좁은 방’은 정희우가 탁본한 방의 실제 구조적 특성을 보여주는 표현이자, 사회학자인 정민우가 그의 저서 ‘자기만의 방(2011, 이매진북스)’에서 언급한 청년세대의 주거 문제를 드러내기 위한 표현과도 연결된다. 정민우는 낮고(반지하방) 높고(옥탑방) 좁은(고시원)이라는 형용사들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도심 속 불안정 주거 공간을 지칭한다. 리빙텔, 미니텔 등 명칭의 변화는 있어왔으나 이러한 공간들은 집으로 인정받지도 못해왔고 정부의 시선 밖에 머물러 있었다. 하나로 명명하기 어려운 이런 공간들은 계속 탄생되고 방치되어 왔다.

김정은은 자신이 걸어다닌 길의 흔적을 활용해서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지도 만들기를 해오고 있다. 가리봉동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우연히 조우한 여객기를 통해 가리봉으로 향하는 여정을 표현하고자 한 작품 ‘self mapping 가리봉 벌집 비행’은 2~30분에 한 대씩 등장하는 여객기와 마주친 곳의 풍경, 위치 등을 기록한 것으로, 주관적이면서 개인적인 시선으로 기록된 가리봉의 현재이다.

김미라는 공산품과 복제 이미지, 영상을 매체로 ‘개인’이라는 단위로써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의 의문을 시각 예술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가리봉동에서 경험한 총천연색 간판들과 함께 자리한 커다란 분양 풍선은 한국사회가 지닌 주거공간에 대한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서울의 역사적 지층이 어느 한 순간에 멈춰있는 듯한 가리봉의 풍경들은 여러가지 사물과 간접 이미지로 분절되어 낯설게 다른 사물들과 결합한다.

이마로는 결벽증과 편집증적인 성향을 지닌 작가로 웹서핑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지금의 청년세대의 특성을 대변한다. 일반적인 소통은 어렵지만 그 자신이 하나의 세계를 오롯이 구축하고 있으며, 신체의 연장으로서의 ‘방’ 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구로탐방’은 웹서핑을 통해 수집한 이미지들이 30미터에 이르는 롤지에 걸쳐 제작된 드로잉 연작이다. 강박적이지만 과감한 선질은 그림을 통해 세계와 만나는 그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민하는 ‘성聖과 속俗’을 주제로 인간다움에 대한 탐구를 시각화하는 동시에, 주민참여형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각 지역에서 전개하고 있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시멘트로 덮여있는 슬레이트 지붕은 철거촌의 풍경이자 개발의 현장이기도 하다. 헌법35조 3항의 문구를 차용하여 행정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았던 불안정 주거공간에 대해 환기시킨다. 안쪽에 위치한 방은 콩댐이 된 장판지의 꿉꿉한 냄새와 빼곡히 필사된 기출문제들로 사각의 방 안에 갇힌 청년들의 현실을 드러낸다.

유한이는 작은 블록들을 조립하여 만들어진 건축적 구조물을 통해 변화와 상실을 거듭하는 삶의 모습을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시가 매입한 가리봉 벌집 두 채는 층계참이 붙어있는 독특한 계단이 존재한다. 작가는 이 마주보는 계단에서 파편화된 삶의 흔적을 채취하고 그려낸다. ‘각각의 방’ 시리즈는 각기 다른 문의 크기와 구조를 가진 벌집방의 특수성을 부각시키면서, 꿈과 희망이 있었을 그때의 삶을 무지개색으로 표현한다.

김보경은 기억과 재현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과 사건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설치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품 ‘The dim landscape of Sune’의 주인공은 기술을 배우고 짝을 이뤄서 도시에 정착하고자 하는 바램을 품고 시골에서 상경했다. 작가의 노동적 행위로 생겨난 작품 표면의 깊고 불규칙한 주름들은 주인공이 감내했어야 했던 삶의 고단함과 치열함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모양의 캔버스들은 Sune의 깊은 사색과 마주한 풍경의 시간들이며, 어둡게 드리워진 설치작품은 그 풍경을 뒤로 하고 떠나온 잔재들을 담담히 드러낸다.

김덕희는 주로 열과 빛을 소재로 설치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가는 한국 근대화의 상징인 구로 공단의 쪽방촌을 한국이라는 모태의 자궁이라 해석한다. 압축 성장 과정에서 겪은 급속한 근대화. 작가는 불안정 주거공간인 쪽방촌과 급속한 근대화의 그늘에서 태어난 2014년 여객선 참사를 자궁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하여 두 공간에서 존재했던 이들이 보았을 꿈들을 오브제와 그림자로 드러낸다. 관객은 가장 안쪽 방에 마련된 암실에 들어가서 그들의 꿈을 엿보거나 태내로 회귀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각각의 방은 참여 작가들의 기존 작업의 매체가 적극적으로 발현되고, 각자가 경험하고 생각해 온 사회문제에 대한 의식들을 자연스럽게 작품을 통해 드러내도록 유도한 구조적인 장치이다. 한국사회의 압축성장의 혜택을 본 30대 후반~40대 중반의 작가들이 지금의 청년 세대의 주거 문제와 ‘방’에 대한 생각들을 가리봉이라는 필터를 통해 바라보면서 작품을 통해 녹여냈다. 아직도 이름을 얻지 못한 많은 ‘방’들을 통해 우리가 봉착한 사회문제와 마주하면서, 모두가 함께 상상해 보기 위한 이러한 시도가 앞으로도 지속되기를 바란다.

(2017년 <낮고 높고 좁은 방> 전시도록에서 발췌)

2014.5 이민하: 타는 목마름, 아로새겨진 인간됨의 흔적 (박세연)

이민하: 타는 목마름, 아로새겨진 인간됨의 흔적
박세연(미술이론)

이민하는 종이와 가죽에 기도문을 쓰는 작업을 해왔다. 이를 위해 작가는 다국어로 된 기도문을 수집하고 그것을 한 글자 한 글자 필사(筆寫)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친 화면에는 국가와 종파, 인종을 초월해서 모여진 다양한 언어의 기도문들이 교차하고 중첩되면서 만들어낸 다채로운 족적이 남겨진다.

이렇게 기도문이라는 텍스트를 가지고와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일견 기성 종교에 대해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사실 작가가 주목한 것은 ‘반복해서 어떤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태도나 마음가짐’에 있다. 작가 노트에 따르면 ‘기도’하는 행위는 ‘성(聖)과 속(俗)’이라는 인간성의 딜레마가 표출되는 접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와 함께 이타적이고 보다 높은 차원을 지향하고자하는 마음 또한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즉 작가는 기도의 목적이 세속적인 것을 지향하든 숭고한 것을 지향하든 무언가를 간구하고 소망하는 기도라는 행위 자체가 가지는 진실성에 주목하였고 ‘기도’를 인간의 본질, 인간다움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테마라고 상정하게 된 것이다.

기도문을 필사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화선지 위에 붓과 먹으로 반복해서 선을 그었던 작업을 볼 수 있다. 담묵을 중첩해서 반복하는 선 긋기 행위를 통해 작가는 무아지경에 가까운 몰입을 경험하고, 반복 행위의 수행적인 측면을 자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필사라는 것 역시 예부터 현재까지 행해지고 있는 종교적인 수련의 한 방법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선을 긋는 행위와 경전이나 기도문을 필사하는 행위 사이의 유사성에 착안하여 현재의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 종이에 연필로 필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작업은 그 재료가 가죽과 인두로 바뀌어 진행되어 왔다. 흥미롭게도 종이에서 가죽으로 재료를 변경하게 된 것은 광우병에 대한 뉴스를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인간을 위해 대량 살육되는 동물들을 보며 인간성이 상실되어가는 과정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또한 작가는 예부터 천대받고 하위 산업으로 여겨진 가죽 산업에 내포된 차별과 억압의 역사까지 떠올린다. 이와 같은 연상 작용은 작가가 이러한 문제를 비롯하여 전쟁과 종교 분쟁 등 인간다움과 그 상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고민해왔던 것이 바탕이 되었다.

무두질 처리가 된 소가죽이나 양가죽 위에 인두로 기도문을 새기는 작업. 가죽 위에 뜨겁게 달궈진 인두로 지지면 가죽 타는 냄새와 연기가 나게 되는데 작가는 이를 통해 전쟁과 기아, 학살 등의 문제를 떠올린다. 성스러운 기도문을 필사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살이 타는 것 같은 냄새가 나고, 이렇게 가죽을 지져서 태움으로써 글자가 각인되는 과정은 파괴적인 성격을 띤다. 이러한 모순적인 속성이 생겨나는 지점이 작가가 관심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환기시키면서 기도문의 필사 작업은 계속 이어져 간다.

작가는 작업과정을 통해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관객과 공유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왔다. 관객들 앞에서 공개제작을 해서 관객을 직접참여하게 하고, 작가를 대신해 필사하는 장치를 고안해서 설치되어 있는 완성작품과 함께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을 볼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관객이 작품을 체험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을 연출하였는데 어두운 밀실같이 조성된 공간 안에 들어서면 커다란 스크린이 보이고 거기에 인체의 실루엣이 거대하게 비춰져 보인다. 스크린에 다가갈수록 팔과 손의 움직임에 주목하게 되는데 이 실루엣은 가죽에 기도문을 필사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일 것이라 짐작 가능하다. 이를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어두운 공간에 비춰지는 영상의 빛과 고요함 가운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람 소리, 무언가를 반복해서 쓰고 있는 거대한 사람 그림자 앞에 혼자 서있는 관객은 여러 감각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작품을 오롯이 경험할 수 있도록 유도된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아나포라(Anaphora)’는 그리스어로 ‘기억해 내는 것’에서 유래했고, 수사학 기법 중에서 어두반복을 의미한다고 한다. 작가가 계속해서 기도문을 필사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동시에 그 행위를 통해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기억해내고자 하는 의도를 함의시켜 놓았다. 이와 함께 위에서 언급한 영상설치 작품은 ‘내적평안’이라는 뜻의 ‘헤쉬키아(Hesychia)’라고 함으로써 속세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신적인 고양을 통한 내적인 평안함을 경험했으면 하는 희망적인 바람도 담고 있다.

이민하는 가죽에 인두질을 하는 온도와 세기를 조정하면서 진하고 연한 효과를 낼 수 있고, 한 번의 인두질로 흔적을 남겨가는 작업방식에서 수묵화에서의 농담표현이나 일필휘지와의 유사함을 찾는다. 이렇게 전통회화에서 시작한 경험을 살리면서도 가죽과 인두, 영상 설치 등의 다양한 매체 확장으로 이어지고 있는 그의 작품의 다음 향방은 어떠할까. 고대에 번제단을 쌓고 동물을 태워 하늘에 바치는 제사 의식을 통해 신과의 소통을 꾀했듯이 작가는 가죽을 태워 기도문을 새기는 것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나아가 보다 높은 차원과의 소통을 열망하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열망이 앞으로도 표현의 방식에 구애됨 없이 발현되어 가기를 기대한다.

2014년 5월 구로아트밸리 갤러리 개인전 평문

2012.2 아트인컬처 – 김화현 이민하展 리뷰 (박현정)

김화현 이민하展 리뷰
2011.11.18~2012.1.13 샘표 스페이스

보기만 해도 죄가 되는 일이 있다. 본다는 것은 때론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며, 관음증은 인류가 앓고 있는 흔한 병이다. 보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미소년을 그려온 김화현과 영원을 향한 인간의 의지를 종이와 가죽에 기도문으로 새겨 온 이민하는 2008년 일본의 작은 술집 나나에서 ‘성(聖)과 속(俗)’이라는 주제로 만났다. 일본 주택가라면 하나쯤 있기 마련이지만, 여성 종업원이 접대하는 스낵바는 정숙한 숙녀, 신사라면 기웃거리는 것조차 꺼려졌을 지도 모를 낮은 곳. 이 공간 속으로 초대하기 위해 두 작가가 선택한 방법은 성과 속의 혼재였다. 우선 술집 입구에 달린 작은 세면대에 꽃을 담고 성스러운 의식을 제공한다. 손을 씻고 거울을 보라는 문구를 벽에 써 두었지만, 실제로 손을 씻을 물도, 거울도 없다. 세속의 언어가 통용되지 않는 순간 두 작가의 주술이 힘을 발휘하면서 관객들은 입구에서 열린 다른 통로를 향해 발을 들여 놓는다.
1층 바, 여성 종업원은 간데 없고 미소년 넷이 액자 속에서 손님을 기다린다. 김화현이 이제껏 그려온 대담한 노출과는 달리 상반신만 드러낸 소년들은 얌전하다. 황금빛 광배와 매란국죽의 지물로 성스러움까지 더했음에도 여전히 잘 다듬어진 근육과 촉촉하게 부푼 입술은 여성 관객의 관음증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소년은 성스러움으로 치장하여 자신 뿐만 아니라 술집 내부에 대한 호기심과 관음증이라는 세속의 욕망을 긍정하도록 도우며, 그 죄책감을 사해준다.
김화현이 속의 공간을 성으로 중화시켰다면, 이민하는 여성 종업원이 쉬던 2층 방을 성으로 정화하기 시작한다. 가장 사적인 그 방은 어느 곳보다 관객의 관음증을 유발하지만, 층계를 올라 만나는 건 검고 거대한 기둥. 작은 방 곳곳에 솟아난 기둥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며 세속적인 공간을 영원을 향한 숭고한 공간으로 바꾼다. 그 위에 100개가 넘은 언어로 쓴 깨알 같은 기도문은 하늘을 향한 공덕이 되어 구제를 암시한다.
2011년 샘표공장으로 자리를 옮긴 나나에서 두 작가는 또 다른 변화를 시도한다. 술집의 2층만을 조립한 방을 세우고 속의 공간을 재현했지만, 성스러움을 입힌 남성들은 이제 술집 밖으로 나와 있다. 김화현은 속된 공간을 성화(聖化)시키고자 기둥이 있던 자리에 구멍 난 그물을 걸고, 이민하는 술집 밖에 기둥을 세웠다. 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나선의 기도문은 여전히 구제의 가능성을 시사하며 술집을 바라본다. 2008년 성과 속의 혼재를 보여 주던 작가들은 검은 기둥과 술집, 성과 속을 마주보게 함으로써 그 사이에 존재해 온 무수하고 애매한 경계에 대해 새롭게 질문을 던진다.

글 : 박현정 미술사
월간 아트 인 컬쳐, 2012년 2월호 p.173

2007.4 퍼블릭 아트 – 수평적 현실과 수직적 비상에의 꿈 (서정임)

수평적 현실과 수직적 비상에의 꿈
이민하 전 2007.3.7~3.13 갤러리 토포하우스

이민하의 작품을 보며 처음 떠오른 것은 이상의 ‘날개’라는 소설의 한 구절이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구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구나.” 날개가 돋기 위해 겨드랑이가 자주 가렵다던 한 패배주의자의 죽음에 이르기 직전의 순간. 그러나 그것이 죽음이 아닌 저자의 이름답게 ‘이상’을 향해서 다가가는 발걸음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날개는 신의 영역이 되기도 하고 ‘비상’을 꿈꾸며 이상을 찾아갈 수 있게끔 해주는 매개체라 여긴다. 작가의 작품에서 역시 거대하게 퍼져가는 날개는 소설에서의 주인공처럼 죽음과 이상 사이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가늘고 얽힌 필선, 손의 노동이 집약된 화면이 공간 속에서 부유하며 2차원의 평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3차원의 공간으로 튀어나와 몸에 들어붙어 비상할 수 있게 해줄 것 같다. 그리고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움직이며, 120도밖에 보지 못하는 시야를 넘어서는 존재는 위압감과 공포감까지 불러일으킨다. 작품을 다시 들여다보기에 앞서 검은 거대함은 우리의 눈을 속이고 경건하게, 숭고하게 만드는 장치로서 작용한 것이다. 또한 엉킨 검은 실타래는 빛을 흡수하는 블랙홀처럼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때문에 그의 내부를 들여다보기 어렵다.
그러나 꼼꼼히 짚어보면 날개 안에 펼쳐진 선의 겹침은 산맥과도 같고, 물의 형상으로도 보인다. 하여 <자연으로의 귀의에 의한 쾌>라는 작품에서 날개 속에 송대 화가 범관의 <계산 행려도>를 모사함으로써 이를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작가노트에 의하면 옛 선배들이 그림 속에서 ‘휴’를 얻었듯 자연을 가까이 두고자 하는 마음을 날개에 빗대어 표현하고 그 안에서 평안을 찾는다고 한다. 이러한 사고는 그가 설치회화라고 말하는 부분과 맞닿아 있다. 거대한 화면이 보여주는 공간의 적극적 개입은 자연 속에 관자의 정신이 흡수되었던 것이 아닌, 아예 화면 자체가 밖으로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거기서 우리는 저 멀리 숨어있는 감정의 꼬투리를 잡게 된다.

서정임 기자, 월간 퍼블릭 아트 2007년 4월호 리뷰

2007.3 이민하: 감정을 만나는 거울 (박영택)

이민하 – 감정을 만나는 거울
박영택(미술평론, 경기대 교수)

커다란 장지(長紙)에 먹과 청묵(靑墨), 분채(粉彩), 색연필 등으로 무수한 선을 그어 날개와 같은 덩어리를 그려 보이고 있다. 날개 한 쪽만이 화면에 매달려 있는 형국인데 그것은 특정한 새의 날개라기보다는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우리들 의식 속에 떠오르는 그런 날개 이미지를 닮았다. 날개는 새뿐만 아니라 천사나 신선들도 달고 다녔고 다 빈치(Da Vinci)보다 훨씬 앞서 다이달루스(Daidalos)같은 이는 아예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달고 다녔던 것 등을 보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옛사람들은 날개에 대한 강렬한 동경이 있었던 것 같다. 고구려들은 사람이 죽으면 관에 새의 커다란 날개를 부장(副葬)해 주었는가 하면 새의 깃털을 관모(冠帽)라 해서 꽂기도 하고 이후 한복의 옷 선이나 한옥의 처마 등이 모두 그 날개에 대한 동경과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중력의 법칙에 저당 잡힌 인간들이 이 현실계로부터의 비상이나 탈출을 꿈꿀 때면 흔히 새의 날개를 떠올렸던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다소 상투적이지만 자유의지나 기존 사회의 틀과 관습, 가치에 대한 도전 등을 표현하기 위해 흔히 날개 이미지가 차용되곤 한다. 날개는 비상이나 초월, 탈중력과 관계있기도 하지만 이민하의 경우 이 날개는 특정한 날개 이미지나 앞서 언급한 의미망에서 조금 벗어나 보인다. 여기서 날개 이미지는 순수 조형적 측면에서 차용되고 있는 듯하며 날개 형상이 선의 증식과 어디론가의 지향성, 유동적인 운동감과 생명성의 충일 등을 가시화하는데 적절한 형태로 다가오고 아울러 추상적인 선의 표현보다 다소의 구체성을 지닌, 그래서 망막에 대한 호소와 집중에 효과적인 편이라 차용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렇다고 실존적인 내용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날개 형상의 내부는 촘촘한 선들이 머리카락처럼, 나무뿌리나 호흡처럼 들러붙고 치밀하게 결구(結構)되어 마냥 증식되어 나가는 형국, 그 기간과 시간성을 보여준다. 결국 이 작가는 선을 가시화하고 선의 쓰임과 용례, 선의 표현과 동양화의 전통적인 선의 의미에 대한 ‘스터디’의 차원에서 날개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아울러 이 말개 형상을 한 검은 덩어리는 매우 커다란 크기를 보여준다. 사람의 신체성을 넘어서는 크기는 막막함과 숭고함, 두려움과 압도감을 준다. 장지를 몇 장씩 잇대어 붙여놓고 그 가운데로 연기처럼, 구름처럼 풀려나가는 검은 선들의 궤적과 집저근 마치 종이(화면, 날개)가 공간 속으로 미끄러지고 잠입하듯이 지나가며 무한히 팽창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횡적인 팽창과 종적인 팽창을 교대로 보여주는 화면은 각각 시선을 가로막는 무한함과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깊이감을 안겨준다. 이 거대함은 우선 작가에게는 수고스러운 노동과 수련을 안겨준다. 그것은 자기 치유적이기도 하고 극기, 초월에 좀 더 가까운 행위이다.

또한 광활한 화면에 무수한 긋기라는 신체성의 행위를 통해 무언가를 행해 나가는 이 작업은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순간순간 자신으로 몰입하는 그 시간성을 중요하게 알려준다. 종이의 단면은 막연한 공간이며 벽이고 그림 그리는 순간마다 불가피하게 맞닥뜨리는 공포를 안겨주는 실존적 장아리면 그 공간에 그리면서 만드는 행위를 온전히 올려놓고 있다는 인상이다. 어쨌든 이 큰 크기는 작가 자신의 노동의 흔적을 좀 더 확연하게 보여주기 위한 공간으로 선택되었다. 동시에 그 밑자락에는 숭고함과 종교성의 자취도 어른거린다. 숭고함과 정신주의에 대한 이미지의 증좌(證左)!

작가는 자잘한 선들을 채워 넣어 검은 덩어리를 만들었다. 여기서 선들은 무엇인가를 재현하려는 목적성을 지운 채 그것 자체로 의미 있는 생애를 살려고 한다. 선이 지시성과 명시성, 재현의 덫에서 풀려나 스스로의 존재를 형성해 나가는 그런 그림이다. 대부분 먹으로 그려나간 선들은 검은 색채 덩어리나 실타래, 검정 깃털로 이루어진 날개를 그려 보인다. 작가는 이 검은 색채로만 이루어진 단색의 화면에 어둡고 두려운 미지의 영역이란 의미를 얹어 놓았다. 그런가 하면 이 검은색은 타자를 억누르고 싶어 하는 욕망과도 관련이 있단다. 동시에 검정(어둠)은 모든 만물의 근원이자 싹을 틔우는 자궁의 역할과 관련되기도 하고 현(玄)이라 해서 모든 색을 가능하게 하는 긍정의 의미도 지녔다. 특히 이 검은색은 작가에게 무한한 깊이와 경이로움을 주기에 선택되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관자에게 이 그림을 통해 외경, 공포, 숭고, 찬탄과 같은 감정을 만나는 거울로 자기라길 원한다. 구체적인 대상이 지워진 단색의 화면을 통해 관자들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거울이기를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그림은 기존의 그림/작품과는 거리를 둔 채,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재현하기 보다는 그림을 화두 삼아 직관적으로 깨닫고 느끼게 하는 일종의 선화(禪畵)적 요소가 강하게 감지된다. 이는 시욕과 볼거리가 흘러넘치는 동시대의 미술에 역설적으로 침묵과 빈궁한 이미지를 제공하면서 관조와 직관의 힘을 환기시키는 편에 가깝다. 우리는 작가가 그려놓은 검고 어두우며 커다한 새의 날개 이미지 앞에 직립해 있으면 순수한 선의 생명력과 충일, 동시에 무한함과 숭고함을 주는 비의(秘儀)적 체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그림은 설치적 회화이며 공간과 관자의 신체에 관여하는 수묵화, 수묵 드로잉이기도 하며 나아가 새삼 정신적 활력을 자극하는 직관적, 관조적 그림의 한 측면을 드러낸다.

2007년 3월 토포하우스 개인전 평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