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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고양레지던시 – 불의 과학, 신체적 언어 그리고 “망각할 수 없는 것들”

이민하 작가: 불의 과학, 신체적 언어 그리고 “망각할 수 없는 것들”

김남수(안무비평)

#1. “빛은 사물의 표면에서 놀고 웃지만, 열은 침투한다.” (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중에서)

#2. “만약 이 삶 혹은 이 순간이 본질상 망각되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이 술어는 오류가 아니라 어떤 요구, 인간들이 부응하지 못했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일 터(…) 이것은 이 요구에 부응했던 영역, 즉 ‘신의 기억’을 가리킨다.” (벤야민, 『번역자의 과제』 중에서)

이민하 작가의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저 아득한 태초의 시대로부터 고의적 시대착오를 범해 ‘오늘’이라는 미래로 귀양살이 나온 고대인의 예술 같다. 시간의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으로 잠수했다가 무엇인가를 건져 올린 듯한 그의 작업은 고대적이며 그의 작업이 마치 “하늘에 부조되는 장엄한 무늬”처럼 본래 장식이 아니라 “무늬는 신의 언어였다”라는 의미에서 신성한 언어를 현재화한다. 고대의 신성성을 이 초연결 메가머신 사회에서 호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종교의 주요 테마이자 심지어 장사수단이었던 신성성의 코드를 예술이 취했을 때 어떤 컨템포러리의 특질로 바라볼 수 있을까. 아감벤처럼 컨템포러리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민하 작가의 작업은 “고대와 현재 사이의 비밀조약” 같은 것의 살아있는 예가 아닌가. 그만큼 그의 작업은 시간적 매듭의 성향이 아주 강하며, 이 매듭이 재미있는 것은 하나의 풀 길 없는 금지의 매듭이 아니라 본래 하나의 통일된 스피리추얼로 되돌아가는 고르디아스의 매듭처럼 다가온다. 그 매듭의 엉뚱한 나타남이라고 할까.

양가죽 위에 무두질하고 그 매끄러운 표면 위에 인두질을 통해 불의 언어로 무엇인가를 적어 내려간다는 것은 굉장히 풍토적인 동시에 그 해당 풍토의 대지에서도 이제는 근대 이전의 전통으로 관리되는 고대적인 풍습이다. 동굴 속의 목자나 유목 시대의 노마드가 무엇인가 가시적인 것이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소멸하여가는 것, 그런 의미에서 아주 특별한 비저너리 – “‘비저너리’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에서 시작해 이내 일반이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곳으로 뛰어올라 버린다”(콜린 윌슨) – 라고 할 수 있다. 어둠의 공간에서 저편의 삶을 기록한다는 것, 그것도 불의 과학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비저너리로써 ‘숨겨진 차원’을 연다는 것이다. 이 ‘숨겨진 차원’의 여밈과 펼침이 가장 발달한 것은 사막이며, 이민하 작가의 작업에는 이 사막의 풍토성이 강하게 풍긴다.

단순한 인두 작업이 아니다. 화인으로 가죽 표면에 글자를 찍는 작업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영적인 지식, 일종의 그노시스를 나타나게 하려는 작가의 의지와 욕망 – 욕망 아닌 욕망 – 이 자기 투신의 형태로 개입하고 있다.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면서 자신의 실존적 상황 자체를 되먹임시키는 작업이다. 기술적으로 용인되고 향상되는 작업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경험적 주체가 무한루프로 되풀이 되풀이 부엌 아궁이 속에 넣어지는 작업이다. 이는 어린 양과 사람 목숨이 등가로 표기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사람 목숨이라는 등식으로 성립하는 인식론에서 비롯된다. ‘숨겨진 차원’이 나타난다는 것은 어린 양의 희생제 없이는 곤란하다.

무엇인가가 기술적으로 술술 잘 풀려나간다는 것은 근대적인 시스템 속에서 예술이 분화된 기술체계 내부로 포섭됐다는 의미밖에는 없다. 반면, 이민하 작가의 악전고투 같은 투신은 장엄한 무늬로서의 문자가 본래 신의 권능으로부터 인간의 영역으로 이전될 때 엄밀한 의미의 ‘관계 개념’으로서 한 개인의 삶을 희생하는 과정이다. 이 ‘관계 개념’은 제한된 어떤 조건이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무한과 직결되는 매개이다.

#3. “아랍인들을 만족시키려면 폐쇄된 공간은 (…) 탁 트인 전망이 있어야 한다.” (에드워드 윌슨, 『숨겨진 차원』 중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어느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이민하 작가의 머무름이자 거주함은 언어이다. 정확히는 문자로 달리는 애벌레 주체로서의 언어이다. 애벌레처럼 기어가는, 캘리그라피화되어 살아서 꿈틀대는, 그럼으로써 생명적인 으르릉거림 – 존 케이지의 <로라토리오(Roaratorio)>처럼 – 이 강렬한 언어이다. 아랍 문자, 한자, 가나 문자 등등 흐르는 문자들이 갖는 그 여정과 흔적이 그대로 생명성의 징후로 나타난다. 그때는 애벌레 문자가 나아가는 각도와 방향조차도 언어이다. 갈림길에서 이쪽이냐 저쪽이냐는 중대해진다. 그때 언어는 외친다고 할까. 이 길이다! 그 길 안에 이 삶의 영원한 무늬를 찍어 넣겠다며, 아니 넣겠다는 듯이. 어떤 문자는 발음할 수 없으며 본래 신이 쓰던 것이라고 한다.

그런 관점일 때, ‘집’이란 돌아가야 하는 곳이다. 이 세계에 나타날 때는 그 ‘나타남의 사건’이 축복받고 기름 부음 받지만, 우리는 본래의 그 무면목(無面目) – 창조된 원류 그대로 혼돈의 “이목구비 없는 얼굴” -을 잃어버리고 망각한다. ‘집’은 모든 존재자가 모여들어 그동안 그러모은 사물의 언어와 질감 대신에 존재라는 그 첫 번째의 의미를 회복하는 씨앗의 방이다. 이민하 작가의 인두 작업은 사람들의 내력과 사연이 간명하게 불의 권능으로 쓰여져서 소리와 냄새로 음미 되는 과정에서 ‘집’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거기에는 ‘집’의 전망이 있다.

이민하 작가는 왜 무두장이처럼 양가죽 위에 인두로 지지는 작업으로 자신의 영적인 지식, 그노시스를 표현하려고 할까, 라고 질문한다면, 위와 같은 대답도 가설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쓰는 인두라는 도구이자 머신이 하나의 불의 과학 – 현대과학은 이 “‘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아직도 묵묵부답이다 – 의 소산이란 사실을 살펴봐야 한다. 이 인스트루먼트가 고대적인 연원을 갖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민하 작가의 사용 방식은 양가죽 위에 겹쳐 쓰기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불로 그대로 텍스트를 초벌 찍기 하는 것이다. 불의 언어, 불의 과학으로 오류 없이 쓰이는 책인 것. 그러므로 모든 생명이 돌아갈 비전과 함께 ‘집’의 전망이 있고, 그런 ‘숨겨진 차원’을 가시화하는 ‘비저너리(visionary)’의 내력이 가능하다. 다만 그러므로 이민하 작가의 작업은 더 모험적이고 신화적인 수사의 세계에서 조망할 필요가 있다. 그 작업은 종교적 성향과도 잇대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요청은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이다.

이민하 작가의 인두는 빛의 작업이 아니라 열의 작업이다. 그 열은 “침투하는 열(熱)”이다. 그 열기는 사람의 피부에 치직거리는 음향과 살타는 누린내 그리고 고통의 상상력이 환기되는 고대와 중세로부터 전해진 집단 무의식의 기억이 있다. 이 기억의 연대기를 펼치는 것이 이리저리 굴곡진 양가죽 표면이다. 이는 피하지방 아래 무의식화된 원형질적 기억들이 오래된 여행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어떤 타블로 판 같은 것이다. 이민하 작가가 불의 열기로 작업하는 공간은 이 판이다. 판은 사람들의 삶의 얼룩과 신산 그리고 망각되어서는 안된다는 윤리적 요청들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의 기억’(벤야민)으로만 가능하다. 이민하 작가의 작업이 동행하는 종교성은 이러한 측면에서 추론된다. 모든 것은 펼쳐내고 그 펼쳐낸 삶의 가혹한 깊이, 사연 많고 하염 많은 삶의 기록, 감히 공감이라고 말하기 버거운 차원에서 그 모두를 감당해내는 것이 라이프니츠적인 의미에서 ‘신’이다. 그에 따르면, 고백하는 것은 ‘신’이며, 어떤 고백은 ‘신적’이다.

#4. “불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무(無)를 찾는 것, 이것은 인간의 위대함을 말해준다.”(엠페도클레스)

이민하 작가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위상학은 이런 것이다. 신 스스로 ‘오늘’이라는 정신의 한 인간이 거처하는 곳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이런 특별한 작업의 행간과 복선 그리고 알레고리가 필요한 것이라고. 겹과 켜, 직접성과 현전성, 후각적 정신과 고도의 그노시스 같은 것들. 지금에 와서는 미디어 아트의 맥락에서 떠내려가듯 점차 폐기되어버렸다고, 뉴 미디어가 올드 미디어를 구축하는 것처럼 괄호 쳐졌다고 믿는 시대에 이민하 작가는 돌연히, 돌올하게 그 미디움(medium)의 시원적인 기호를 다시 호출해버린다. 그것도 모든 삶은 불멸이며, 불멸의 삶은 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망각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불멸을 알게 해주는 기호라고 증언하는 것처럼. “기념비도 추억도 심지어 증인조차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망각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삶”(벤야민)이 있다. 이 탁월한 긍정성이 인두와 그 불의 과학이 남기는 낙인의 흔적으로서의 문자 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으며, 마치 피닉스처럼 부정성이 변환된 긍정성으로 출현한다.

“모래바람에 눈을 감았다 뜨니 인천이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행동은 이기적인 자기만족.”

“마음속에서는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결혼과 함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구받았다.”

“얇은 종이처럼 팔랑거리는 차별들이 내 삶에 팽배했다.”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인간처럼, 그럼으로써 피닉스와도 같이 되살아나는 삶, 거기에 영원성의 지표이자 무늬가 찍혀진다는 듯이 이 종교적 언약 비슷한 느낌이 이민하 작가의 작업에는 있다. 거기에는 망각할 수 없는 것의 본질이 어떤 강렬도의 척도로부터 작동한다는 무언의 암시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남네시스(Anamnesis)>(2017)에서 이민하 작가는 상징적으로 인두질이 일어나는 타블로 판처럼 누워 있으며, 다른 이방의 사람들이 가진 각자의 사연들이 제각각의 다른 문자 체계의 잠언적인 언어로 화인된다. 그때 이민하 작가의 신체는 문자와 언어는 다르지만, 다시 헤쳐모이는 ‘집’으로서 일종의 바벨탑과도 같다. 흩어졌던 언어들이 영적인 씨앗의 방으로 모음 되는 곳, 거기에는 이민하 작가의 신체가 제공된다. 이 신체는 어린 양의 신체인 동시에 불길로 휩싸인 신체이며 동시에 잿더미이다. 그다음 순간, 재 속에서 다시 살아 오르는 다른 생명체의 신체이다. 바슐라르는 이를 ‘불의 새’라고 봤으며, 이민하 작가는 ‘상기(想起)’라고 봤다. 무엇을 상기하는가. 자신이, 또한 그 누구나 알아차리면 ‘불의 새’라는 엄연한 사실, 그노시스를 상기하는 것이다. 불의 과학으로 쓰이는 신체적 언어는 이처럼 희생제를 통한 ‘상기’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어떤 작업에서 이민하 작가는 인두로 문자를 찍고 그 화인 작업을 현재화하는 동시에 그 문자를 읊기도 한다. 통조림 된 문자가 아니라 불로 살아있는 문자가 퍼포먼스가 되는 것이다. 이때는 거대한 동굴이나 궁륭공간이 높은 중세도서관 같은 공간성으로 공명하기 시작한다. 쓰면서 읽는 것, 청각적 이미지를 통한 시각적이며 개념적인 차원의 개방은 ‘상기’의 가장 기본적인 루프이다. 가령,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에서 건강이 좋지 못한 젊은 사제는 고뇌하면서 일기를 적는데, 일기는 빈 여백에 쓰이면서 동시에 보이스오버로 읽힌다. 그리고 번역되는 자막은 다시 이 일기 내용을 가시화한다. 자신의 성독(聲讀)으로 울려진 텍스트를 다시 자신의 귀로 듣는다는 것은 공명하는 공간 자체가 부활하는 삶, 망각될 수 없는 삶의 기초라는 것이다. 그 공간성을 이민하 작가는 자신의 퍼포먼스에서 드러낸다.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바다 위에서 폭풍우를 만나 난파 직전까지 몰리는 것이 일반적이며,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악마의 맷돌이 돌아가는 사회에서 가속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민하 작가는 그러한 사회에 대한 응전의 형식이 아니라 그러한 사회로 초기 세팅된 정신적 형식을 완전히 새로운 서판으로 바꿔치기하여 깊은 망각 속에 있는 것들을 기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니 ‘상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망각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덧없는 삶은 덧없지 않다는 것, 이때의 ‘덧’이라는 찰나지간, 익명성, 겨를 없음은 그대로 영원성의 표지이다. 그 자체로 ‘덧’의 시간성은 불의 언어로 고정되고 가시화된다. 아니 신체화되어 타인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이 된다. 그노시스의 알아차림을 통해 이 삶의 고해를 항해하자는 것이 자칫하면 종교적 관념의 틀 속에서 헐벗은 반복이 될 수도 있지만, 이민하 작가는 그 인두질의 신체적 감각, 희생제적 자기 투신, ‘상기’와 부활의 본질로서 삶을 다시 바라보기를 요청한다. 아니 충격파를 던진다.

다시 한 번 더 묻는다. 왜 이민하 작가는 무두장이처럼 양가죽 위에 인두로 지지는 작업으로 자신의 영적인 언어를 추구하게 되었을까. 여기서 인두는 그 금속의 첨점 끝에 마치 ‘성 엘모의 불’처럼 응결된 불의 권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끝이 없는 거대한 파타고니아 협곡 사이를 아무런 안전보장이나 믿음 없이 그대로 던져진 운명의 무늬처럼 항해해갔던 마젤란 함대가 어느 모퉁이에서 번갯불이 돛대 끝에 둥글게 맺히는 현상을 만난 것처럼 말이다. 그때 선원들은 성스러운 여성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했다고 하는데, 이민하 작가의 작업은 바로 그러한 충동을 자연스럽게 촉발한다. 신이시여! 우리를 굽어살피소서. 암(闇), “울울하고 암암할 신의 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문밖까지 울려 나온다.” 우리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 소리가 울려 나올 때까지 인두로 지져야 한다. 인두는 비밀스럽다. 인두의 그 끝에 도사린 어떤 신적인 권능이 ‘불의 과학’으로 잠재해 있으며, 그것의 응축된 힘이 어떤 표면과 만나 화인될 때는 삶을 망각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망각할 수 없는 삶”이란 감각적이다. 감각의 경로를 따른다.

불길의 부조, 그 나타남의 사건은 마치 저 아득한 태초의 감각으로 일어난다. 우리말 “나타나다”는 음미할수록 어떤 신성한 현현의 느낌을 안으로 감싸고 있는데, 이민하 작가에게는 “나타나다”라는 동사는 그대로 ‘불’과 ‘연기’ 그리고 ‘냄새’의 언어로 표출된다. 오감으로 뒤덮인 채, 우리는 삶의 뜨거움과 누린내와 각성제를 한꺼번에 들이킨다. 이민하 작가의 작업 속에서 이는 불가피하다.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비평모음집에서 발췌

2018. 11 고양레지던시 협업프로젝트 – 불로 쓴 말

이 민 하 : 불로 쓴 말

김도희 (작가)

1.  간곡한 바람은 언제나 반복적이다. 기도문 필사는 손을 움직임과 동시에 목청 아래로 지속적으로 발음을 내려 보내 몸속에 그 말이 깃들기 바라는 행위이다. 이민하의 불로 쓰는 말, 인두 필사는 추상적 개념의 메시지, 그리고 육신을 연상시키는 가죽, 언 듯 보아 이 같은 반대의 요소 사이를 오간다. 겉과 속, 바꾸어 말하면 외부와 내부, 또 다르게 말하면 그림자와 이데아계 사이에 통로를 내고 넓혀 선명하게 한다. 새겨지는 것이 표면 속으로 침투하고 겹쳐지고 파고 들면 스며든다고 바꿔 말한다. 종이가 기름을 만나면 투명해지고 열이 가죽을 만나면 그을음이 눌어 앉는다. 이민하의 작업은 이러한 상반된 요소 사이를 기도하듯 오가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겹쳐진 몸을 표현하는 것 같다.

 2.  손에는 열이 흐르는 인두가 쥐어져 있고 그 아래에 가죽이 펼쳐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인 인두가 가죽 표면 위에 글씨를 남긴다. 펜은 종이 위 마찰을 일으키며 잉크를 남기지만, 인두는 피시식 치직 연기를 피워 올리며 가죽을 태우고 흔적을 남긴다. 성경에서 십계명이 새겨지는 순간, ‘온 백성이 천둥소리와 번개와 나팔소리를 듣고 산의 연기를 보았다.’ (출애굽기 20:18-20). 십계명이 구전이 아니라 반드시 ‘번개와 연기를 동반하여 비석에 새겨졌다’며 성경에 새겨져야(필사) 했던 이유는 그제야 비로소 말씀의 힘이 강한 실재감을 일으켜 믿음을 고취시키기 때문이다. ‘있으라.’ 말씀 한마디로 현상계를 창조한 신의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산이 되고, 사람이 되니 ‘속’을 빚는 힘이다. 그런데 이 ‘말’이 현상계인 ‘속’이 되면서 한계와 모순은 시작된다. 이민하의 작업에서는 이런 모순된 두 가지 축이 엿보인다. 육신을 초월한 것에 닿고자 하는 마음이 한 축, 그리고 그러한 마음의 양상이 물질(육체에 기반 한 인간 실존)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파괴적 상황이 다른 한 축이다. ‘번제’는 그런 모순의 일례이다. 육신을 정화하고 신에게 닿기 위해 죄를 범한 자기를 죽이는 대신 죄 없는 짐승을 제물로 삼는다. 죽이고 피를 보고, 태워서 하늘로 상승하는 연기와 그 타는 냄새를 감상하며 그 염원이 하늘에 닿는 것처럼 느낀다. ‘아버지 제 몸이 타고 있어요!’ 소원은 고통이다. 갖지 못한 것에 관한 고통이 번제물을 통해 표현된다. 그렇게 따지면 번제는 하늘의 통각을 자극하려는 일이거나 나의 결핍에 따른 고통의 대리물을 찾는 행위이다. 번제물이 깨끗하고 순수할수록 그 고통이 강조된다.

그녀는 커다란 가죽을 입은 듯, 덮은 듯, 죽은 듯 누워있다. 고통 받는 여자들이 둘러 앉아 그 위에 인두로 상처 입은 마음을 말로 새긴다. 작가는 고통의 대리인이 되기 위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나사렛 예수처럼 가죽 아래에 누워있다. 예수가 당한 육체적 고통에 관한 묘사가 치밀하고 극적일수록 신의 사랑이 강조되는 아이러니. 필사를 하는 사람들의 고통, 가죽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강조될수록 그 아래 누운 예술가의 몸은 ‘번제물’로서의 순결한 매체가 된다. 메시지가 가죽의 타는 냄새와 소리로 치환되니 이것은 ‘번제’다. 현상계로 침투하는 주술적 힘을 상상한다. 참가자들의 주문과도 같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은 이교도의 주문처럼 들린다. 남겨진 가죽은 예수가 무덤 속에 남겨 두었다는 피 묻은 헝겊과 같이 실재 고통의 증거 ‘아나포라 Anaphora-기억해 내기’이자 번제의 대리물이다. 아마 그들의 체증을 조금은 완화 ‘헤시키아 Hesychia-내적평안’되었을 것이다.

3. 나는 감정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믿는다. 감정은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에너지로 현상계와 맞물린다. 작게는 몸이고 크게는 우주. 번제물과 희생양은 이러한 에너지를 해소하거나 전이시키는 매체이다. 많은 경우 인간은 자기 행동이 용납되는 조건 하에서는 무슨 일이든 하게 된다. 논리와 이성은 여기서 억압된 인간 감정에너지 표출의 수단을 찾아 대령하거나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살육의 명분을 제공한다. 인간의 역사는 ‘종교’와 ‘이데올로기’ 즉, 유일신과 집단적 광기의 임계점이 낮은 곳에 유동 창궐하여 살육의 원인을 미화해 온 것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민하의 불도장은 대량학살이 일어난 곳, 분쟁지역, 자연재해가 있는 곳, 광기의 희생양이 대거 발생한 곳의 좌표에 기계적으로 도착해 ‘쿵!’, ‘쿵!’ 내리찍는다. 비극이 이미 벌어졌거나 벌어지는 중이므로, 이 도장 찍기는 양피지 위의 ‘기록’이자 ‘징표’로도 보인다. 이전의 필사가 그러하듯 가죽 위 연기와 그을음을 통해 참상과 고통을 상기할 수 있겠지만 나는 여기서 어떤 파멸의 징조와 좌절을 담은 저주(파괴적 소망)의 이미지 역시 떠올린다. 도장이 연기를 피우고 지나간 자리에는 정 반대의 말, ‘신의 가호를…’같은 기도 구절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염원은 다시 저주처럼 자기를 파괴하는 중이다. 좌표축 도장 찍기의 기계성은 욕망의 기계가 된 인간이 그 욕망에 냉정히 파괴되는 귀결이자 순리이다. 원인에 따른 자연한 귀결을 우리는 ‘신의 뜻’이라 부른다.

4. 쪽방촌과 바우하우스, 공감의 좌표뜨기

이민하는 바우하우스 판상형 주택의 아이디어가 한국에서 경제적 효율만 남아 쪽방이 되어버린 사연을 추적했다. 그리고 바우하우스의 높은 창, 빛을 투과하며 열린 형태로 이 방의 사연을 펼쳤다. 콩댐을 한 장판지로 만든 이 구조물은 입방체의 집을 단순히 펼친 모양이기도 하지만 창의 후광을 입은 십자가와 닮았다. 상자를 펼치면 그 펼쳐진 내부공간은 드러난 마음처럼 읽힌다. 살이 타는 감각적 자극이 사라진 곳에서 나는 함께 침묵을 유지한다. 쪽방의 장판지를 칼로 도려낸 연꽃 만다라는 ‘고통’을 확산 전이하지 않는다. 그러니 도려냈다기 보다는 피워냈다고 해야 옳다. 여기서 타인의 경험은 일방적 말씀으로 판별되는 ‘선’과 ‘악’으로 증폭되지 않았다. 대신 인간 삶, 보편의 고통으로 와 닿는다. 원인에 관한 분노와 원망이라는 누적된 감정이 없기에 징벌과 저주, 그리고 이에 따른 희생양과 번제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평화로움은 ‘안심’, 즉 나에게로 돌아오는 파괴력이 없는 중에서 그 업의 연쇄가 소거되는 상태이다. 조금 과장하면 가시관을 쓰고 피가 낭자한 고통받는 메시아가 사라진 말레비치의 십자가에 비유할 것이다. 감정의 대리물을 소급해 죄를 짊어지고 기꺼이 죽었던 예수가 ‘너희 죄를 사하였다’ 함은 본인 이후로 욕망과 감정의 ‘번제물’을 삼지 말라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민하가 예술을 통해 세상에 끼치고자 한다던 그 정신적 함양이란 이런 부분이 아니었을까.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협업프로젝트

2017.9 개인전 평문 – 성과 속을 매개하기, 희생양 되기

성과 속을 매개하기, 희생양 되기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이민하는 종이와 가죽에 텍스트를 쓰는 작업을 한다. 처음엔 기름을 먹인 종이에, 그리고 이후 점차 무두질된 양가죽, 소가죽, 돼지가죽, 그리고 사슴가죽에다 쓴다. 예나 지금이나 가죽을 무두질하는 것은 천한 일에 속한다. 작가가 가죽에다 텍스트를 쓰는 것은 이런 사회적 계급의식과, 사회적 약자로서의 자의식과 무관하지가 않다. 작가는 사회 문제며 사회 환경에 관심이 많다. 예컨대 전작(2017, 천 개의 문제풀이와 좌절)에서 작가는 가리봉동 쪽방촌의 한 방을 온통 텍스트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다. 기름을 먹인 종이로 도배를 한 후, 그 위에다 연필로 빼곡하게 텍스트를 기록했는데, 공무원시험, 토익시험, 부동산중개사자격증시험을 위한 기출문제들이다. 이런저런 시험에 내몰린 내일이 없는 청춘들의 암울한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2011년에는 가죽에 텍스트를 쓰고 그 과정을 전시하는 작업으로 동일본 대지진 참사의 희생자를 기리기도 했다(지난한 일).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 가죽에 텍스트를 새기는 행위는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하는 제의적 성격을 갖는다. 청춘과 희생자들 같은 사회적 약자의 상처를 보듬어 새살이 돋게 하는(재생) 것이다.

텍스트로는 세계의 모든 언어로 된 모든 종교의 기도문을 필사했다. 작가가 직접 필사하기도 하고, 참가자를 매개로 필사하기도 하고(관객참여), 때론 플로터를 통해서 필사를 하기도 한다. 왜 기도문인가. 작가의 작업에서 기도문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종이에, 가죽에 기도문을 필사하는 작가의 행위며 작업은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가지고 있는가. 사람들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이타적인 대의나 존재론적인 경우와 같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를 위해서도 기도한다. 이처럼 기도는 양가적이다. 성에도 속하고 속에도 속한다. 성과 속을 매개시켜준다. 속에 속한 것을 정화시켜 성의 차원으로 승화시켜준다. 정화와 승화를 매개로 성속을 연결시킨다(성속의 변증법?). 연결시킨다기보다는 원래 연결된 상태, 원초적 상태, 처음상태를 상기(아남네시스)시킨다. 처음상태(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원형)를 복원하고 회복시킨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존재의 처음상태는 성과 속이, 삶과 죽음이 하나로 연결돼 있었다고(연속성) 본다. 그리고 여기에 자본주의와 경제제일주의원칙이 매개되면서 생산적인 것(세속적인 삶)과 비생산적인 것(죽음과 성에 속한 것)이 분리되었다고(불연속성) 진단한다. 그러므로 불연속성을 넘어 원래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이 존재의 과제로서 주어진다.

작가는 그렇게 성과 속의 상관성에, 성과 속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여기서 성에 줄이 닿아있는 종교는 속을 정화하는 것, 속으로 하여금 성의 차원으로 승화시켜주는 것과 관련이 깊다. 그 방법이 여럿 있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가 경(기도문)을 외우는 것(독경)이고, 받아쓰는 것(필사)이다. 그렇게 받아쓰다보면 내가 지워지고 쓰는 행위만 남는다. 내가 지워진다? 번뇌가 지워지고, 욕망이 지워지고, 상처가 지워진다. 그렇게 지워진 내가 비로소 투명해지고 오롯해진다. 역설이다. 지움으로써 오롯해지는, 아를 지워 진아(진정한 나, 처음상태 그대로의 나)를 얻는 역설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종이에, 가죽에 기도문을 필사하는 행위는, 그리고 참가자로 하여금 필사에 참여시키는 행위는 이처럼 나를 지우는, 번뇌가 사라지고 욕망을 잠재우고 상처를 치유하는, 그럼으로써 진정한 나를 얻는, 진정한 나와 대면하는, 자기반성적인 행위와 관련이 깊다. 수신과 수행의 상징적 의미와 관련이 깊다.

그렇다면 작가는 가죽에다 어떤 텍스트를 어떻게 쓰는가. 어떤 텍스트로 치자면 주로 기도문을, 그리고 참가자가 있는 경우에 저마다의 내면독백(고백? 상처?)을 쓴다. 어떻게 쓰는가를 보면 인두로 필사를 한다. 그렇게 가죽에다 인두로 필사를 하다보면 가죽 타는 냄새가 나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참가자 저마다의 속말을 글로 뱉어내는 행위와 과정을 통해서 내면에 응축된 상처가 타고(정화?), 연기와 함께 해소(승화?)되는 것이다. 신자들이 지성소를 찾아 저마다의 죄(상처)를 고백하고 죄 사함(상처가 해소되는)을 받는 종교 예식을, 그 예식의 상징적 의미를 생각하면 되겠다. 실제로 작가는 전작에서 한 마을의 가장 높고 편평한 곳(아마도 성스러운 땅이면서 거룩한 곳, 땅에 있으면서 정작 그 주권이 하늘에 속한 곳, 그러므로 교회)에 지성소를 차리고, 마을주민들로부터 기원문을 적은 엽서를 전달받는다. 여기서 기원문은 기도하기, 죄를 고백하기, 고민을 털어놓기, 그리고 어쩌면 무슨 수건돌리기처럼 상처를 전이시키기와 통한다. 그리고 기원문을 적은 엽서를 전달받는 작가의 행위는 고민을 들어주고 상처를 덮어쓰는, 그럼으로써 마을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상처가 치유되는 상징적이고 주술적인 의미와 관련이 깊다. 저마다 내면의 상처를 털어놓아 상처가 해소되는 과정으로 보면 되겠고, 여기서 작가는 그 계기며 매개역할을 한다. 매개자다. 무당이다(요셉 보이스는 예술가를 무당이라고 했다).

작가는 참가자 저마다의 내면독백(상처)을 텍스트로 쓰게 한다고 했다. 여기에 작가가 누워있다. 편안해 보이기도 하고, 무방비 상태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무두질된 사슴 가죽을 의복처럼 이불처럼 덮어쓰고 있다. 그리고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5명의 외국인 참가자들(우즈베키스탄 2명, 중국, 터키, 이탈리아)이 겪은 차별받은 이야기를 저마다 가죽표면에다 인두로 쓴다. 차별받은 이야기는 작가가 참가자들에게 주문한 것인데, 작가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를테면 이주노동자 문제)이 반영된 것이고, 단순한 차별을 넘어서 저마다 내면에 응축된 존재론적인 상처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참가자들이 가죽표면에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쓰면 가죽이 타고 냄새가 나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상처가 전이되면서 해소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가죽이 타고 냄새가 나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은 중요하다. 바로 상처가 참가자로부터 작가에게로 전이되는 과정이 하나하나 기록되고 등록되는 상징적 지점이고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서 전해지는 상징적 제스처들이며 종교적 의례들의 원형으로 보면 되겠다.

이를 통해 상처가 참가자로부터 작가에게로 전이된다고 했다. 비록 가죽을 덮어쓰고 있다고는 하나, 여기서 가죽은 사실은 작가의 몸을 대리한다. 그러므로 가죽에 이야기를 쓰는 것은 곧 작가의 몸에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징적인 의미로는 작가의 몸에 이야기가 아로새겨지고, 작가의 몸이 타고, 작가의 몸에서 냄새가 나고, 작가의 몸이 연기가 돼 피어오른다. 번제다. 우리 죄를 대신할 희생양을 지목하고, 그 희생양을 바쳐 신의 분노를 잠재우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르네 지라르는 이런 희생양 만들기를 종교적 제의의 차원을 넘어 제도적 장치(제도기계)라고 본다. 사람들의 폭력욕망(욕망기계)을 투사하고 전이시키고 해소시켜줄 희생양 지목하기, 희생양 만들기, 희생양 내어주기에 모든 건전하고 건강한 제도의 성패가 달려있다. 그렇게 종교는 사회의 균형추 역할을 한다. 그 과정에서 폭력과 관련되고, 그런 만큼 제도는 희생양이 흘린 피 위에 축조된다. 그렇게 아마도 추후 작가의 행보는 폭력이 있는 곳, 세계 도처의 분쟁지역을 찾아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희생양을 자처하고 무당을 자처하는 행보가 될 것이다. 무당은 성과 속을 매개하고, 삶과 죽음을 넘나든다. 가죽은 죽은 짐승들의 몸이고, 죽음의 표상(주검)이다. 그 주검을 덧입어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재생이다. 참가자의 입장에서 보면 희생양(무당)의 죽음을 매개로 폭력(폭력욕망)이 해소되고 상처가 치유되는 재생이다. 작가는 그런 죽음의 표상(상처가 아로새겨진 가죽 그러므로 어쩌면 살과 피가 타는 몸)을 옷처럼 덧입기도 하고 이불처럼 덮어쓰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 세계의 상처와 폭력과 분쟁이 투사되는 스크린을 대신한다.

아나포라(Anaphora), 그리스어로 기억을 의미한다. 아남네시스(Anamnesis), 상기를 뜻한다. 기억보다 더 깊은 기억, 원형적 기억, 존재의 처음상태에 대한 기억이다. 그리고 헤쉬키아(Hesychia), 내적평안을 의미한다.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들이며, 작업을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에 해당한다. 이로써 유추해볼 때 작가의 작업은 존재의 원형을 상기시키고, 존재의 처음상태를 회복하고 복원하는 것과 관련이 깊다. 진정한 자기와 대면하는 자기반성적인 과정을 전제로 하는 이 과정(어쩌면 죽음너머로 재생되는, 그러므로 거듭나기와 정화의식)이 있은 연후에라야 존재는 비로소 내적평안을 되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이다. 가죽에 이야기를 쓰는 작가의 행위는 책을 쓰는 행위에 비유할 수 있다. 성과 속, 상처와 치유, 폭력과 희생양(르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이라고 했다), 놀이와 종교의식이 날실과 씨실로 직조된 고백의 문화학으로 집필된 책일 수 있다.

2017.4 낮고높고좁은 방 – 기획글

전시서문    이민하 (작가, 전시기획)

간체자가 점령한 화려한 간판들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고층빌딩과 아파트숲의 풍경에 익숙한 나에게 중국의 어느 소도시를 방문한 듯한 인상을 주었다. 2014년 초가을, 서울에서 나고 자라 서울토박이였던 나는 구로구 주민들과 함께한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지역 리서치를 위해 참가한 구로공단 역사 투어를 통해 가리봉을 접하게 되었다.

70년대의 가리봉은 구로공단이라는 거대한 엔진이 시골에서 갓 상경한 젊은이들의 청춘과 꿈을 연소하면서 성장하던 시기였다. 공장의 기숙사에 미처 다 수용되지 못한 지친 노동자들을 위해 벌집들이 생겨났다. 가리봉의 벌집은 좁은 방 한칸과낮은부엌,길고좁은다락이맞물린특징적인구조의방들이수십채가연결된공동주택이다.

어린 여공들이 미싱을 타고 야학을 다니면서 꿈을 키우던 가리봉 벌집은 90년대에 들어서 구로공단이 쇠퇴하면서 2000년대에 들어서는 값싼 주거지를 찾아 유입된 중국동포들과 외국인 노동자, 노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구로구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도 낯설게 느껴지는 곳이다. 산업화의 아픔을 간직한 가리봉의 역사를 기억하고, 이 곳의 의미와 가치를 예술적인 접근으로 풀어내려는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전시 ‘낮고 높고 좁은 방’은 구로공단과 한국 근대화를 상징하는 가리봉 벌집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고시원 등의 오늘날 청년 세대가 겪는 불안정 주거공간이 이어지는 고리를 탐색한다. 이번 전시의 참여작가 8명은 전시주제의 문제의식에 동감하며, 구로공단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가리봉 지역을 답사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방’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전시공간의 입구에는 하꼬방1과 루핑집2으로 시작되는 불안정 주거공간의 다양한 명칭과 연표가 배치된다. 구로공단의 성장과 함께 생겨난 벌집방은 80년대에 등장한 고시원과 구조적인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연표는 고시원이 쪽방화 되는 과정과 IMF 이후 직장인들의 이용 증가로 인해 고급화되는 시점을 간략히 보여준다. 전시장의 초입은 현실적인 가리봉의 모습을 담은 방들로 시작하는데, 안으로 이동하면서 점차 사적이고 내밀한 방이 등장하는 순서로 배치되었다.

정희우는 도시의 공간에서 발견되는 작은 기호들을 탁본으로 어루만져 시각화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가리봉의 실제 벌집방을 탁본해서 방의 규모와 창문 및 3개의 문의 위치를 통해 관람객으로 하여금 벌집방의 특수한 구조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 사용감이 역력한 발이 엉성하게 묶여있는 왼편의 문은 대문으로 나갈 수 있는 주 출입구이다. 고개를 많이 숙여야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정면 왼쪽의 낮은 문은 방보다 낮게 만들어진 수도가 있는 다용도실로 연결된다. 정면 오른쪽의 약간 높은 문은 관 정도 크기의 좁고 긴 쪽다락방으로 연결된다.

전시제목인 ‘낮고 높고 좁은 방’은 정희우가 탁본한 방의 실제 구조적 특성을 보여주는 표현이자, 사회학자인 정민우가 그의 저서 ‘자기만의 방(2011, 이매진북스)’에서 언급한 청년세대의 주거 문제를 드러내기 위한 표현과도 연결된다. 정민우는 낮고(반지하방) 높고(옥탑방) 좁은(고시원)이라는 형용사들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도심 속 불안정 주거 공간을 지칭한다. 리빙텔, 미니텔 등 명칭의 변화는 있어왔으나 이러한 공간들은 집으로 인정받지도 못해왔고 정부의 시선 밖에 머물러 있었다. 하나로 명명하기 어려운 이런 공간들은 계속 탄생되고 방치되어 왔다.

김정은은 자신이 걸어다닌 길의 흔적을 활용해서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지도 만들기를 해오고 있다. 가리봉동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우연히 조우한 여객기를 통해 가리봉으로 향하는 여정을 표현하고자 한 작품 ‘self mapping 가리봉 벌집 비행’은 2~30분에 한 대씩 등장하는 여객기와 마주친 곳의 풍경, 위치 등을 기록한 것으로, 주관적이면서 개인적인 시선으로 기록된 가리봉의 현재이다.

김미라는 공산품과 복제 이미지, 영상을 매체로 ‘개인’이라는 단위로써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의 의문을 시각 예술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가리봉동에서 경험한 총천연색 간판들과 함께 자리한 커다란 분양 풍선은 한국사회가 지닌 주거공간에 대한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서울의 역사적 지층이 어느 한 순간에 멈춰있는 듯한 가리봉의 풍경들은 여러가지 사물과 간접 이미지로 분절되어 낯설게 다른 사물들과 결합한다.

이마로는 결벽증과 편집증적인 성향을 지닌 작가로 웹서핑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지금의 청년세대의 특성을 대변한다. 일반적인 소통은 어렵지만 그 자신이 하나의 세계를 오롯이 구축하고 있으며, 신체의 연장으로서의 ‘방’ 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구로탐방’은 웹서핑을 통해 수집한 이미지들이 30미터에 이르는 롤지에 걸쳐 제작된 드로잉 연작이다. 강박적이지만 과감한 선질은 그림을 통해 세계와 만나는 그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민하는 ‘성聖과 속俗’을 주제로 인간다움에 대한 탐구를 시각화하는 동시에, 주민참여형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각 지역에서 전개하고 있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시멘트로 덮여있는 슬레이트 지붕은 철거촌의 풍경이자 개발의 현장이기도 하다. 헌법35조 3항의 문구를 차용하여 행정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았던 불안정 주거공간에 대해 환기시킨다. 안쪽에 위치한 방은 콩댐이 된 장판지의 꿉꿉한 냄새와 빼곡히 필사된 기출문제들로 사각의 방 안에 갇힌 청년들의 현실을 드러낸다.

유한이는 작은 블록들을 조립하여 만들어진 건축적 구조물을 통해 변화와 상실을 거듭하는 삶의 모습을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시가 매입한 가리봉 벌집 두 채는 층계참이 붙어있는 독특한 계단이 존재한다. 작가는 이 마주보는 계단에서 파편화된 삶의 흔적을 채취하고 그려낸다. ‘각각의 방’ 시리즈는 각기 다른 문의 크기와 구조를 가진 벌집방의 특수성을 부각시키면서, 꿈과 희망이 있었을 그때의 삶을 무지개색으로 표현한다.

김보경은 기억과 재현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과 사건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설치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품 ‘The dim landscape of Sune’의 주인공은 기술을 배우고 짝을 이뤄서 도시에 정착하고자 하는 바램을 품고 시골에서 상경했다. 작가의 노동적 행위로 생겨난 작품 표면의 깊고 불규칙한 주름들은 주인공이 감내했어야 했던 삶의 고단함과 치열함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모양의 캔버스들은 Sune의 깊은 사색과 마주한 풍경의 시간들이며, 어둡게 드리워진 설치작품은 그 풍경을 뒤로 하고 떠나온 잔재들을 담담히 드러낸다.

김덕희는 주로 열과 빛을 소재로 설치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가는 한국 근대화의 상징인 구로 공단의 쪽방촌을 한국이라는 모태의 자궁이라 해석한다. 압축 성장 과정에서 겪은 급속한 근대화. 작가는 불안정 주거공간인 쪽방촌과 급속한 근대화의 그늘에서 태어난 2014년 여객선 참사를 자궁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하여 두 공간에서 존재했던 이들이 보았을 꿈들을 오브제와 그림자로 드러낸다. 관객은 가장 안쪽 방에 마련된 암실에 들어가서 그들의 꿈을 엿보거나 태내로 회귀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각각의 방은 참여 작가들의 기존 작업의 매체가 적극적으로 발현되고, 각자가 경험하고 생각해 온 사회문제에 대한 의식들을 자연스럽게 작품을 통해 드러내도록 유도한 구조적인 장치이다. 한국사회의 압축성장의 혜택을 본 30대 후반~40대 중반의 작가들이 지금의 청년 세대의 주거 문제와 ‘방’에 대한 생각들을 가리봉이라는 필터를 통해 바라보면서 작품을 통해 녹여냈다. 아직도 이름을 얻지 못한 많은 ‘방’들을 통해 우리가 봉착한 사회문제와 마주하면서, 모두가 함께 상상해 보기 위한 이러한 시도가 앞으로도 지속되기를 바란다.

2014.5 개인전 평문 – 타는 목마름, 아로새겨진 인간됨의 흔적

이민하: 타는 목마름, 아로새겨진 인간됨의 흔적
박세연(미술이론)

이민하는 종이와 가죽에 기도문을 쓰는 작업을 해왔다. 이를 위해 작가는 다국어로 된 기도문을 수집하고 그것을 한 글자 한 글자 필사(筆寫)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친 화면에는 국가와 종파, 인종을 초월해서 모여진 다양한 언어의 기도문들이 교차하고 중첩되면서 만들어낸 다채로운 족적이 남겨진다.

이렇게 기도문이라는 텍스트를 가지고와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일견 기성 종교에 대해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사실 작가가 주목한 것은 ‘반복해서 어떤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태도나 마음가짐’에 있다. 작가 노트에 따르면 ‘기도’하는 행위는 ‘성(聖)과 속(俗)’이라는 인간성의 딜레마가 표출되는 접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와 함께 이타적이고 보다 높은 차원을 지향하고자하는 마음 또한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즉 작가는 기도의 목적이 세속적인 것을 지향하든 숭고한 것을 지향하든 무언가를 간구하고 소망하는 기도라는 행위 자체가 가지는 진실성에 주목하였고 ‘기도’를 인간의 본질, 인간다움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테마라고 상정하게 된 것이다.

기도문을 필사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화선지 위에 붓과 먹으로 반복해서 선을 그었던 작업을 볼 수 있다. 담묵을 중첩해서 반복하는 선 긋기 행위를 통해 작가는 무아지경에 가까운 몰입을 경험하고, 반복 행위의 수행적인 측면을 자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필사라는 것 역시 예부터 현재까지 행해지고 있는 종교적인 수련의 한 방법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선을 긋는 행위와 경전이나 기도문을 필사하는 행위 사이의 유사성에 착안하여 현재의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 종이에 연필로 필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작업은 그 재료가 가죽과 인두로 바뀌어 진행되어 왔다. 흥미롭게도 종이에서 가죽으로 재료를 변경하게 된 것은 광우병에 대한 뉴스를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인간을 위해 대량 살육되는 동물들을 보며 인간성이 상실되어가는 과정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또한 작가는 예부터 천대받고 하위 산업으로 여겨진 가죽 산업에 내포된 차별과 억압의 역사까지 떠올린다. 이와 같은 연상 작용은 작가가 이러한 문제를 비롯하여 전쟁과 종교 분쟁 등 인간다움과 그 상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고민해왔던 것이 바탕이 되었다.

무두질 처리가 된 소가죽이나 양가죽 위에 인두로 기도문을 새기는 작업. 가죽 위에 뜨겁게 달궈진 인두로 지지면 가죽 타는 냄새와 연기가 나게 되는데 작가는 이를 통해 전쟁과 기아, 학살 등의 문제를 떠올린다. 성스러운 기도문을 필사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살이 타는 것 같은 냄새가 나고, 이렇게 가죽을 지져서 태움으로써 글자가 각인되는 과정은 파괴적인 성격을 띤다. 이러한 모순적인 속성이 생겨나는 지점이 작가가 관심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환기시키면서 기도문의 필사 작업은 계속 이어져 간다.

작가는 작업과정을 통해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관객과 공유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왔다. 관객들 앞에서 공개제작을 해서 관객을 직접참여하게 하고, 작가를 대신해 필사하는 장치를 고안해서 설치되어 있는 완성작품과 함께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을 볼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관객이 작품을 체험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을 연출하였는데 어두운 밀실같이 조성된 공간 안에 들어서면 커다란 스크린이 보이고 거기에 인체의 실루엣이 거대하게 비춰져 보인다. 스크린에 다가갈수록 팔과 손의 움직임에 주목하게 되는데 이 실루엣은 가죽에 기도문을 필사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일 것이라 짐작 가능하다. 이를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어두운 공간에 비춰지는 영상의 빛과 고요함 가운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람 소리, 무언가를 반복해서 쓰고 있는 거대한 사람 그림자 앞에 혼자 서있는 관객은 여러 감각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작품을 오롯이 경험할 수 있도록 유도된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아나포라(Anaphora)’는 그리스어로 ‘기억해 내는 것’에서 유래했고, 수사학 기법 중에서 어두반복을 의미한다고 한다. 작가가 계속해서 기도문을 필사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동시에 그 행위를 통해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기억해내고자 하는 의도를 함의시켜 놓았다. 이와 함께 위에서 언급한 영상설치 작품은 ‘내적평안’이라는 뜻의 ‘헤쉬키아(Hesychia)’라고 함으로써 속세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신적인 고양을 통한 내적인 평안함을 경험했으면 하는 희망적인 바람도 담고 있다.

이민하는 가죽에 인두질을 하는 온도와 세기를 조정하면서 진하고 연한 효과를 낼 수 있고, 한 번의 인두질로 흔적을 남겨가는 작업방식에서 수묵화에서의 농담표현이나 일필휘지와의 유사함을 찾는다. 이렇게 전통회화에서 시작한 경험을 살리면서도 가죽과 인두, 영상 설치 등의 다양한 매체 확장으로 이어지고 있는 그의 작품의 다음 향방은 어떠할까. 고대에 번제단을 쌓고 동물을 태워 하늘에 바치는 제사 의식을 통해 신과의 소통을 꾀했듯이 작가는 가죽을 태워 기도문을 새기는 것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나아가 보다 높은 차원과의 소통을 열망하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열망이 앞으로도 표현의 방식에 구애됨 없이 발현되어 가기를 기대한다.

2014년 5월 구로아트밸리 갤러리 개인전 평문

2012.2 아트인컬처 – 김화현 이민하展 리뷰

김화현 이민하展 리뷰
2011.11.18~2012.1.13 샘표 스페이스

보기만 해도 죄가 되는 일이 있다. 본다는 것은 때론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며, 관음증은 인류가 앓고 있는 흔한 병이다. 보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미소년을 그려온 김화현과 영원을 향한 인간의 의지를 종이와 가죽에 기도문으로 새겨 온 이민하는 2008년 일본의 작은 술집 나나에서 ‘성(聖)과 속(俗)’이라는 주제로 만났다. 일본 주택가라면 하나쯤 있기 마련이지만, 여성 종업원이 접대하는 스낵바는 정숙한 숙녀, 신사라면 기웃거리는 것조차 꺼려졌을 지도 모를 낮은 곳. 이 공간 속으로 초대하기 위해 두 작가가 선택한 방법은 성과 속의 혼재였다. 우선 술집 입구에 달린 작은 세면대에 꽃을 담고 성스러운 의식을 제공한다. 손을 씻고 거울을 보라는 문구를 벽에 써 두었지만, 실제로 손을 씻을 물도, 거울도 없다. 세속의 언어가 통용되지 않는 순간 두 작가의 주술이 힘을 발휘하면서 관객들은 입구에서 열린 다른 통로를 향해 발을 들여 놓는다.
1층 바, 여성 종업원은 간데 없고 미소년 넷이 액자 속에서 손님을 기다린다. 김화현이 이제껏 그려온 대담한 노출과는 달리 상반신만 드러낸 소년들은 얌전하다. 황금빛 광배와 매란국죽의 지물로 성스러움까지 더했음에도 여전히 잘 다듬어진 근육과 촉촉하게 부푼 입술은 여성 관객의 관음증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소년은 성스러움으로 치장하여 자신 뿐만 아니라 술집 내부에 대한 호기심과 관음증이라는 세속의 욕망을 긍정하도록 도우며, 그 죄책감을 사해준다.
김화현이 속의 공간을 성으로 중화시켰다면, 이민하는 여성 종업원이 쉬던 2층 방을 성으로 정화하기 시작한다. 가장 사적인 그 방은 어느 곳보다 관객의 관음증을 유발하지만, 층계를 올라 만나는 건 검고 거대한 기둥. 작은 방 곳곳에 솟아난 기둥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며 세속적인 공간을 영원을 향한 숭고한 공간으로 바꾼다. 그 위에 100개가 넘은 언어로 쓴 깨알 같은 기도문은 하늘을 향한 공덕이 되어 구제를 암시한다.
2011년 샘표공장으로 자리를 옮긴 나나에서 두 작가는 또 다른 변화를 시도한다. 술집의 2층만을 조립한 방을 세우고 속의 공간을 재현했지만, 성스러움을 입힌 남성들은 이제 술집 밖으로 나와 있다. 김화현은 속된 공간을 성화(聖化)시키고자 기둥이 있던 자리에 구멍 난 그물을 걸고, 이민하는 술집 밖에 기둥을 세웠다. 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나선의 기도문은 여전히 구제의 가능성을 시사하며 술집을 바라본다. 2008년 성과 속의 혼재를 보여 주던 작가들은 검은 기둥과 술집, 성과 속을 마주보게 함으로써 그 사이에 존재해 온 무수하고 애매한 경계에 대해 새롭게 질문을 던진다.

글 : 박현정 미술사
월간 아트 인 컬쳐, 2012년 2월호 p.173

2007.4 퍼블릭 아트 – 수평적 현실과 수직적 비상에의 꿈

수평적 현실과 수직적 비상에의 꿈
이민하 전 2007.3.7~3.13 갤러리 토포하우스

이민하의 작품을 보며 처음 떠오른 것은 이상의 ‘날개’라는 소설의 한 구절이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구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구나.” 날개가 돋기 위해 겨드랑이가 자주 가렵다던 한 패배주의자의 죽음에 이르기 직전의 순간. 그러나 그것이 죽음이 아닌 저자의 이름답게 ‘이상’을 향해서 다가가는 발걸음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날개는 신의 영역이 되기도 하고 ‘비상’을 꿈꾸며 이상을 찾아갈 수 있게끔 해주는 매개체라 여긴다. 작가의 작품에서 역시 거대하게 퍼져가는 날개는 소설에서의 주인공처럼 죽음과 이상 사이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가늘고 얽힌 필선, 손의 노동이 집약된 화면이 공간 속에서 부유하며 2차원의 평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3차원의 공간으로 튀어나와 몸에 들어붙어 비상할 수 있게 해줄 것 같다. 그리고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움직이며, 120도밖에 보지 못하는 시야를 넘어서는 존재는 위압감과 공포감까지 불러일으킨다. 작품을 다시 들여다보기에 앞서 검은 거대함은 우리의 눈을 속이고 경건하게, 숭고하게 만드는 장치로서 작용한 것이다. 또한 엉킨 검은 실타래는 빛을 흡수하는 블랙홀처럼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때문에 그의 내부를 들여다보기 어렵다.
그러나 꼼꼼히 짚어보면 날개 안에 펼쳐진 선의 겹침은 산맥과도 같고, 물의 형상으로도 보인다. 하여 <자연으로의 귀의에 의한 쾌>라는 작품에서 날개 속에 송대 화가 범관의 <계산 행려도>를 모사함으로써 이를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작가노트에 의하면 옛 선배들이 그림 속에서 ‘휴’를 얻었듯 자연을 가까이 두고자 하는 마음을 날개에 빗대어 표현하고 그 안에서 평안을 찾는다고 한다. 이러한 사고는 그가 설치회화라고 말하는 부분과 맞닿아 있다. 거대한 화면이 보여주는 공간의 적극적 개입은 자연 속에 관자의 정신이 흡수되었던 것이 아닌, 아예 화면 자체가 밖으로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거기서 우리는 저 멀리 숨어있는 감정의 꼬투리를 잡게 된다.

서정임 기자, 월간 퍼블릭 아트 2007년 4월호 리뷰

2007.3 개인전 평문 – 감정을 만나는 거울

이민하 – 감정을 만나는 거울
박영택(미술평론, 경기대 교수)

커다란 장지(長紙)에 먹과 청묵(靑墨), 분채(粉彩), 색연필 등으로 무수한 선을 그어 날개와 같은 덩어리를 그려 보이고 있다. 날개 한 쪽만이 화면에 매달려 있는 형국인데 그것은 특정한 새의 날개라기보다는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우리들 의식 속에 떠오르는 그런 날개 이미지를 닮았다. 날개는 새뿐만 아니라 천사나 신선들도 달고 다녔고 다 빈치(Da Vinci)보다 훨씬 앞서 다이달루스(Daidalos)같은 이는 아예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달고 다녔던 것 등을 보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옛사람들은 날개에 대한 강렬한 동경이 있었던 것 같다. 고구려들은 사람이 죽으면 관에 새의 커다란 날개를 부장(副葬)해 주었는가 하면 새의 깃털을 관모(冠帽)라 해서 꽂기도 하고 이후 한복의 옷 선이나 한옥의 처마 등이 모두 그 날개에 대한 동경과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중력의 법칙에 저당 잡힌 인간들이 이 현실계로부터의 비상이나 탈출을 꿈꿀 때면 흔히 새의 날개를 떠올렸던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다소 상투적이지만 자유의지나 기존 사회의 틀과 관습, 가치에 대한 도전 등을 표현하기 위해 흔히 날개 이미지가 차용되곤 한다. 날개는 비상이나 초월, 탈중력과 관계있기도 하지만 이민하의 경우 이 날개는 특정한 날개 이미지나 앞서 언급한 의미망에서 조금 벗어나 보인다. 여기서 날개 이미지는 순수 조형적 측면에서 차용되고 있는 듯하며 날개 형상이 선의 증식과 어디론가의 지향성, 유동적인 운동감과 생명성의 충일 등을 가시화하는데 적절한 형태로 다가오고 아울러 추상적인 선의 표현보다 다소의 구체성을 지닌, 그래서 망막에 대한 호소와 집중에 효과적인 편이라 차용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렇다고 실존적인 내용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날개 형상의 내부는 촘촘한 선들이 머리카락처럼, 나무뿌리나 호흡처럼 들러붙고 치밀하게 결구(結構)되어 마냥 증식되어 나가는 형국, 그 기간과 시간성을 보여준다. 결국 이 작가는 선을 가시화하고 선의 쓰임과 용례, 선의 표현과 동양화의 전통적인 선의 의미에 대한 ‘스터디’의 차원에서 날개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아울러 이 말개 형상을 한 검은 덩어리는 매우 커다란 크기를 보여준다. 사람의 신체성을 넘어서는 크기는 막막함과 숭고함, 두려움과 압도감을 준다. 장지를 몇 장씩 잇대어 붙여놓고 그 가운데로 연기처럼, 구름처럼 풀려나가는 검은 선들의 궤적과 집저근 마치 종이(화면, 날개)가 공간 속으로 미끄러지고 잠입하듯이 지나가며 무한히 팽창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횡적인 팽창과 종적인 팽창을 교대로 보여주는 화면은 각각 시선을 가로막는 무한함과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깊이감을 안겨준다. 이 거대함은 우선 작가에게는 수고스러운 노동과 수련을 안겨준다. 그것은 자기 치유적이기도 하고 극기, 초월에 좀 더 가까운 행위이다.

또한 광활한 화면에 무수한 긋기라는 신체성의 행위를 통해 무언가를 행해 나가는 이 작업은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순간순간 자신으로 몰입하는 그 시간성을 중요하게 알려준다. 종이의 단면은 막연한 공간이며 벽이고 그림 그리는 순간마다 불가피하게 맞닥뜨리는 공포를 안겨주는 실존적 장아리면 그 공간에 그리면서 만드는 행위를 온전히 올려놓고 있다는 인상이다. 어쨌든 이 큰 크기는 작가 자신의 노동의 흔적을 좀 더 확연하게 보여주기 위한 공간으로 선택되었다. 동시에 그 밑자락에는 숭고함과 종교성의 자취도 어른거린다. 숭고함과 정신주의에 대한 이미지의 증좌(證左)!

작가는 자잘한 선들을 채워 넣어 검은 덩어리를 만들었다. 여기서 선들은 무엇인가를 재현하려는 목적성을 지운 채 그것 자체로 의미 있는 생애를 살려고 한다. 선이 지시성과 명시성, 재현의 덫에서 풀려나 스스로의 존재를 형성해 나가는 그런 그림이다. 대부분 먹으로 그려나간 선들은 검은 색채 덩어리나 실타래, 검정 깃털로 이루어진 날개를 그려 보인다. 작가는 이 검은 색채로만 이루어진 단색의 화면에 어둡고 두려운 미지의 영역이란 의미를 얹어 놓았다. 그런가 하면 이 검은색은 타자를 억누르고 싶어 하는 욕망과도 관련이 있단다. 동시에 검정(어둠)은 모든 만물의 근원이자 싹을 틔우는 자궁의 역할과 관련되기도 하고 현(玄)이라 해서 모든 색을 가능하게 하는 긍정의 의미도 지녔다. 특히 이 검은색은 작가에게 무한한 깊이와 경이로움을 주기에 선택되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관자에게 이 그림을 통해 외경, 공포, 숭고, 찬탄과 같은 감정을 만나는 거울로 자기라길 원한다. 구체적인 대상이 지워진 단색의 화면을 통해 관자들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거울이기를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그림은 기존의 그림/작품과는 거리를 둔 채,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재현하기 보다는 그림을 화두 삼아 직관적으로 깨닫고 느끼게 하는 일종의 선화(禪畵)적 요소가 강하게 감지된다. 이는 시욕과 볼거리가 흘러넘치는 동시대의 미술에 역설적으로 침묵과 빈궁한 이미지를 제공하면서 관조와 직관의 힘을 환기시키는 편에 가깝다. 우리는 작가가 그려놓은 검고 어두우며 커다한 새의 날개 이미지 앞에 직립해 있으면 순수한 선의 생명력과 충일, 동시에 무한함과 숭고함을 주는 비의(秘儀)적 체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그림은 설치적 회화이며 공간과 관자의 신체에 관여하는 수묵화, 수묵 드로잉이기도 하며 나아가 새삼 정신적 활력을 자극하는 직관적, 관조적 그림의 한 측면을 드러낸다.

2007년 3월 토포하우스 개인전 평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