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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7 공공(public)의 기억을 소환하는 기념비적인 내러티브 (마동은)

공공(public)의 기억을 소환하는 기념비적인 내러티브

마동은, 대구미술관 전시기획팀장

2021년 여름,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개최된 이민하의 개인전 《검은 씨앗》에서는 그동안 작가가 꾸준히 확장시켜왔던 가죽에 인두질을 하는 작업 외에 방법론적으로 처음 시도한 사운드 설치 작품 <습작>(2021)이 공개되었다. 칠흑 같은 어두운 방 안에 오롯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작가의 목소리에 온 감각을 집중시키게 하는 이번 작품은, 대전시 동구 낭월동에서 시작되어 베른부르크 안락사 센터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어진 일종의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작업이었다.

작가의 작은 독백으로 시작하여 실제 전시실내 설치된 사이렌을 통해 온 공간을 공습 소리로 에워싸며 절정에 이르게 하는 이 작업은 지극히 주관적인 작가의 해석을 기반으로 작품의 내러티브를 구축해 나간다. 그러나 실상 작품의 내용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작가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닌 공공의 성격을 띤 기념비적 기시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역사적 기억에 대해 재조립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과 ‘기념비’, 이번에 처음 시도한 작가의 사운드 설치 작업에 대해 필자가 내세운 주제어이다. 필자는 이번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층위의 이면을 떠올리며,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기억(memory), 기념적인(memorial), 기념비(monument), 기념비성(monumentality) 등의 개념이 그의 작업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 되짚어 보고자 한다.

기념비는 고대 라틴어의 어원처럼 ‘기억나게 하는 것’ 혹은 ‘기념하는 것’이라는 원초적인 기능을 함의했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며 기념비는 그 개념과 실제에 있어 급격한 변환을 맞이한다. 공통의 가치나 이상을 추구하고자 했던 기념비의 전통적 개념이 양차 대전을 겪으면서 근대라는 시기와 불가피하게 충돌하게 된 것이다. 이는 정치적 기억의 교차점이라는 기념비의 태생적 특성에 20세기의 미적 혹은 사회정치적 변환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던 결과이다. 시대의 변화로 인해 파편화되고 혼성적인 상태가 지속될수록 이 사회는 이질적인 경험과 개인의 기억에 공통적 가치를 부여하며 공통된 공간(물리적 혹은 비물리적 공간)에 통합될 것을 요구받는다. 이로써 이미 공유된 신념이나 공통 관심사의 부재 속에 공공적 이슈를 담은 작품은, 흩어져 있는 대중을 공통된 시공간으로 안내하는데, 여기에서 기념비는 공통의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관객에게 공동의 기억이라는 일루전을 선전한다. 이민하 작가가 홀로코스트라는 주제를 기저에 놓고 작업을 시작했을 그 순간부터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미 공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작가는 잔잔하고 낮은 목소리로 베른부르크 안락사 센터와 아우슈비츠에 대한 기념비적 독백을 이어간다. 그의 독백은 과거의 상황을 현재적 장소에 집중시키는 고도의 상징적 행위이다. 한 두 개의 단어와 짧은 문장 그리고 그 내용을 전하는 목소리만으로 관객은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념비’ 혹은 ‘기념비적인 무언가’가 가지는 또 다른 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그의 첫 사운드 설치 작품을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작업으로 소개한 것일까?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기억을 소환시키고자 한 것일까?

일반적으로 홀로코스트와 같은 기념비적 내용을 앞세울 때에는 그것의 동기가 명확하고, 그 기념비가 생산해내는 여러 기억의 종류들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거나 다양하다. 어떤 기념비는 기념하는 대상에 대해 대중으로 하여금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요구를 하기도 하고, 반면 어떤 기념비는 한 국가, 한 민족의 과거를 스스로 설명하라는 요구를 받기도 한다. 또 다른 기념비는 다음 세대를 교육하고 그들에게 공동의 경험과 깨달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기도 하며, 극히 일부이지만 심지어 어떤 기념비는 단순히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의도에서 탄생하기도 한다.

한 예로, 미국에서는 홀로코스트를 기념하고자 하는 동기가 미국을 구성하고 있는 다국적의 인구만큼 복합적인 것이어서, 고상하면서도 냉소적이고 실용적이면서도 미학적이다. 그러나 이민하의 기념비 – 필자는 그의 작품 <습작>을 일종의 기념비라고 칭하고 싶다 – 는 매우 명료하고 효율적이다. 그의 기념비는 흔히 상상할 수 있는 풍경 속에 자리하며 흡사 박제물과 같은 기념비가 아닌, 시공간을 초월해 신경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지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무형의 기념비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습작>의 독백에서, 오랜 시간 내전으로 황폐해진 시리아의 길거리에서도, 골목마다 기관총을 들고 서 있는 다마스쿠스의 군인들을 지나치면서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일종의 두려움을 대전 골령골에서 처음 경험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나의 민족, 나의 국가에 대한 역사라는 것이 그에게 더 남다른 현장감을 주었던 것일까? 자신의 옆에 누가 있는지조차 전혀 알 수 없는 어두운 방 안에서 작가의 목소리만을 귀 기울이며 집중한 사람이라면 이내 그가 느꼈던 두려움을 찰나의 순간 공감했을 것이다.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의 영문과 교수이면서 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 문화적 기억과 관련된 분야를 활발히 연구하고 있는 제임스 영(James E. Young)은 ‘불가능한 영속성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의 사회적 이해관계들을 포괄하면서 시간적으로도 확장 가능한 기념비가 필요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 특히 기념비의 제작 동기와 과정, 제작 이후 관람자의 반응 등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맥락을 밝히면서 기념비의 기능에 있어서 대중과 사회적 기능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기념비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의 삶과 공동체 정신 속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위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행위의 중심에는 대중(관객)이 있다. 작가의 작품이 온전히 완성되기 위해서는 이 기념비적 작품이 관객에게 진실되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실 기념비에 대한 시각은 매우 다양하다. 앞서 언급한 제임스 영이 기념비의 당위성을 염두해 두고 이론을 펼쳤다면, 미술사학자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근대 시기에 만들어진 기념비들이 순수한 지표로서 자신을 초월하는 그 어떤 것도 언급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추상적이고 자기 창조적인 기념비는 외부에 존재하는 사건을 기념할 수 없으며 그것은 단지 전위된(dislocated) 기호라고 본 것이다. 또 더 나아가 기념비가 공동체의 기억 작용을 밀어내고, 공공의 기억을 자신의 물질적 형태로 고정시킴으로써 그것을 보전하는 대신 완전히 대체한다는 주장도 있다. 피에르 노라(Pierre Nora)는 기억이 내부로부터 적게 경험될수록 그것은 외부의 비계와 외적 기호를 통해 존재하게 된다’라고 경고했고, 안드레아스 후이센(Andreas Huyssen)은 심지어 현대의 대량 기억 생산과 과거의 기념비화, 그 관조 및 연구 사이에는 반비례 관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들은 기념비적 형식을 일단 대중의 기억에 부여하고 나면 대중은 어느 정도 그 기억에 대한 의무를 벗어버릴 수 있다는 전제를 가정하고 있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미술계는 추상적 형태의 기념비가 이 사회가 품고 있는 공공의 문제와 이상적인 가치를 재현하는데 더 효과적이라는 의견으로 잠식되어 가고 있다. 이민하 작가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물성으로서의 작품의 외형을 탈피하고, 인간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청각과 상상력에 의지하여 형체가 없으며 빠르게 확산시킬 수 있는 사운드 매체를 이용해 이 기념비적 작품을 제작했다.

이번 출품작은 제목 그대로 습작이다. 앞으로 작가는 더 발전된 방식으로 사운드 설치 작업을 선보일 것이다. 그 작업의 주제가 여전히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공공의 기억을 건드리는 방향으로 이어진다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후에는 작가 스스로에 의해 반(反)기념비적인 작품이 또 하나 탄생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

(2021년 7월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진행한 개인전 <검은 씨앗> 도록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