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리를 지키는 공증
이지민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1958년부터 1960년까지 3년간 중국인 3,000만 명이 아사한다. 북한 총인구수보다 많은 수치다. 이는 마오쩌둥이 쓰촨성 농촌을 시찰하던 중 곡식을 쪼아 먹는 참새를 보고 화를 내며 던진 한마디의 말 ‘저 새는 해로운 새다’의 파장이었다. 이후 구성된 ‘참새 섬멸 총지휘부’가 참새를 닥치는 대로 소탕하자 해충이 창궐하게 되어 생태계가 무너지게 되면서 농작물이 초토화되고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된 것이다. 독일 3 제국 최대 규모의 강제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에서는 유대인을 비롯한 동성애자, 장애인 등 나치즘에 반대하는 자들이 대량 학살된다.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자마다 논란이 지속 중이지만 수용소에서 학살당한 유대인 수만 350만여 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학살은 실로 다양한 방법으로 고안되며 창의성과 폭력성 그리고 야만성의 경계를 오갔다. 그중에서도 살인 주체인 군인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안으로 마련된 방책은 그들만의 목적으로 인본주의를 거스르며 정당성을 확보했다.
위 사건들은 이민하의 드로잉 시리즈 <수 없는 재난과 한 생명의 태어남>으로 실현된 이야기 중 일부다. 양 또는 염소 가죽을 인두로 지져 타들어 가는 흔적으로 그려낸 드로잉은 작가의 관심으로부터 출발한 다양한 화두를 시각화하며 1940년대 폴란드와 독일의 정치·사회적 사건으로부터 2011년 동일본 대지진까지 약 70년에 걸친 역사를 소환한다. 이 작업을 마주하기 전에는 높이가 4미터에 달하는 대형 설치 <선홍빛 장벽>을 거쳐 가게 된다. 전시장의 벽면을 유럽풍 무늬의 벽지로 뒤덮은 다음 세 명의 여성이 파고 긁어내며 특정 문양을 형성한 입체 작업이다. 그 문양은 불교에서 우주의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도형화한 원형의 불화인 만다라(Mandala)를 닮았다. <수 없는 재난과 한 생명의 태어남>과 <선홍빛 장벽>은 지지고 긁어내는 행위를 통해 발현된 결과물로 매우 정교한 정성과 다소 긴 작업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작가는 작업 과정을 오체투지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하며, 기존의 작업 행보도 ‘제의적 형식’이라는 프리즘으로 읽혀 왔다.
<선홍빛 장벽>전을 관람하고 나서 이번에는 작가의 행위, 주제, 메시지를 특정 방법론으로 명제화 하기보다, 작가가 선택한 물질과 도출된 시각 이미지가 서로 공존하는 영역에 집중해보기로 한다. 동물의 가죽에는 돌이킬 수 없는 그을림을 내고, 깨끗하게 벽을 포장한 벽지는 칼로 찢어 흠집을 내면서 작가는 상처를 박제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그를 위로하는 정신을 팽팽하게 공존시킨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자신의 실천을 뒀다. 늘 쉽게 잊혀 버렸거나 왜곡되고 감춰져 온 신호들을 드러내기에 힘 써온 작가는 결과 양산보다는 그 지표에 직접 부대끼는 몸부림을 선행해 왔다. 수시로 차오르는 문제의식을 외면할 수 없어 자신의 몸으로 예술이 실현할 수 있는 국면을 전개해온 것이다.
이민하의 작품에서 다뤄지는 모든 사건이 한 곳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아채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작가의 본능적 순리는 멀끔한 공공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작품의 배경이 되는 일련의 사건들로부터 알 수 있듯이 기형적인 퇴행의 신호들은 우리를 둘러싼 상식을 훼손하고 있다. 작가가 지키려는 순리에 가해지는 위협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리의 지평에서 작가는 작업의 결과가 또 다른 제도와 논리로 굳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경계해온 신호들과 표현의 극한은 획일화라는 범주로 묶이면서 같은 오류를 범하게 되기 때문에 더욱 실천의 과정이 중요해진다. 작가의 실천은 스스로를 관통하면서 작품 내에서 정직한 기준이 되어 일종의 공증으로 기능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점점 상처에 무감각해지고 있다. 예측 불가능한 자극의 지속 때문이다. 이민하의 상처내기/위로하기 중심의 영역에서 그의 공증 지표를 따라 각자의 행동력을 발휘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가로막는 덫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보자. 그러면 작가 그리고 우리가 지키려는 순리를 만나게 될 것이라 기대한다.
(2020년 10월 이민하 개인전 전시리뷰 – 동무비평 삼사 원고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