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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고양레지던시 – 불의 과학, 신체적 언어 그리고 “망각할 수 없는 것들”

이민하 작가: 불의 과학, 신체적 언어 그리고 “망각할 수 없는 것들”

김남수(안무비평)

#1. “빛은 사물의 표면에서 놀고 웃지만, 열은 침투한다.” (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중에서)

#2. “만약 이 삶 혹은 이 순간이 본질상 망각되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이 술어는 오류가 아니라 어떤 요구, 인간들이 부응하지 못했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일 터(…) 이것은 이 요구에 부응했던 영역, 즉 ‘신의 기억’을 가리킨다.” (벤야민, 『번역자의 과제』 중에서)

이민하 작가의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저 아득한 태초의 시대로부터 고의적 시대착오를 범해 ‘오늘’이라는 미래로 귀양살이 나온 고대인의 예술 같다. 시간의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으로 잠수했다가 무엇인가를 건져 올린 듯한 그의 작업은 고대적이며 그의 작업이 마치 “하늘에 부조되는 장엄한 무늬”처럼 본래 장식이 아니라 “무늬는 신의 언어였다”라는 의미에서 신성한 언어를 현재화한다. 고대의 신성성을 이 초연결 메가머신 사회에서 호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종교의 주요 테마이자 심지어 장사수단이었던 신성성의 코드를 예술이 취했을 때 어떤 컨템포러리의 특질로 바라볼 수 있을까. 아감벤처럼 컨템포러리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민하 작가의 작업은 “고대와 현재 사이의 비밀조약” 같은 것의 살아있는 예가 아닌가. 그만큼 그의 작업은 시간적 매듭의 성향이 아주 강하며, 이 매듭이 재미있는 것은 하나의 풀 길 없는 금지의 매듭이 아니라 본래 하나의 통일된 스피리추얼로 되돌아가는 고르디아스의 매듭처럼 다가온다. 그 매듭의 엉뚱한 나타남이라고 할까.

양가죽 위에 무두질하고 그 매끄러운 표면 위에 인두질을 통해 불의 언어로 무엇인가를 적어 내려간다는 것은 굉장히 풍토적인 동시에 그 해당 풍토의 대지에서도 이제는 근대 이전의 전통으로 관리되는 고대적인 풍습이다. 동굴 속의 목자나 유목 시대의 노마드가 무엇인가 가시적인 것이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소멸하여가는 것, 그런 의미에서 아주 특별한 비저너리 – “‘비저너리’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에서 시작해 이내 일반이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곳으로 뛰어올라 버린다”(콜린 윌슨) – 라고 할 수 있다. 어둠의 공간에서 저편의 삶을 기록한다는 것, 그것도 불의 과학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비저너리로써 ‘숨겨진 차원’을 연다는 것이다. 이 ‘숨겨진 차원’의 여밈과 펼침이 가장 발달한 것은 사막이며, 이민하 작가의 작업에는 이 사막의 풍토성이 강하게 풍긴다.

단순한 인두 작업이 아니다. 화인으로 가죽 표면에 글자를 찍는 작업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영적인 지식, 일종의 그노시스를 나타나게 하려는 작가의 의지와 욕망 – 욕망 아닌 욕망 – 이 자기 투신의 형태로 개입하고 있다.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면서 자신의 실존적 상황 자체를 되먹임시키는 작업이다. 기술적으로 용인되고 향상되는 작업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경험적 주체가 무한루프로 되풀이 되풀이 부엌 아궁이 속에 넣어지는 작업이다. 이는 어린 양과 사람 목숨이 등가로 표기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사람 목숨이라는 등식으로 성립하는 인식론에서 비롯된다. ‘숨겨진 차원’이 나타난다는 것은 어린 양의 희생제 없이는 곤란하다.

무엇인가가 기술적으로 술술 잘 풀려나간다는 것은 근대적인 시스템 속에서 예술이 분화된 기술체계 내부로 포섭됐다는 의미밖에는 없다. 반면, 이민하 작가의 악전고투 같은 투신은 장엄한 무늬로서의 문자가 본래 신의 권능으로부터 인간의 영역으로 이전될 때 엄밀한 의미의 ‘관계 개념’으로서 한 개인의 삶을 희생하는 과정이다. 이 ‘관계 개념’은 제한된 어떤 조건이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무한과 직결되는 매개이다.

#3. “아랍인들을 만족시키려면 폐쇄된 공간은 (…) 탁 트인 전망이 있어야 한다.” (에드워드 윌슨, 『숨겨진 차원』 중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어느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이민하 작가의 머무름이자 거주함은 언어이다. 정확히는 문자로 달리는 애벌레 주체로서의 언어이다. 애벌레처럼 기어가는, 캘리그라피화되어 살아서 꿈틀대는, 그럼으로써 생명적인 으르릉거림 – 존 케이지의 <로라토리오(Roaratorio)>처럼 – 이 강렬한 언어이다. 아랍 문자, 한자, 가나 문자 등등 흐르는 문자들이 갖는 그 여정과 흔적이 그대로 생명성의 징후로 나타난다. 그때는 애벌레 문자가 나아가는 각도와 방향조차도 언어이다. 갈림길에서 이쪽이냐 저쪽이냐는 중대해진다. 그때 언어는 외친다고 할까. 이 길이다! 그 길 안에 이 삶의 영원한 무늬를 찍어 넣겠다며, 아니 넣겠다는 듯이. 어떤 문자는 발음할 수 없으며 본래 신이 쓰던 것이라고 한다.

그런 관점일 때, ‘집’이란 돌아가야 하는 곳이다. 이 세계에 나타날 때는 그 ‘나타남의 사건’이 축복받고 기름 부음 받지만, 우리는 본래의 그 무면목(無面目) – 창조된 원류 그대로 혼돈의 “이목구비 없는 얼굴” -을 잃어버리고 망각한다. ‘집’은 모든 존재자가 모여들어 그동안 그러모은 사물의 언어와 질감 대신에 존재라는 그 첫 번째의 의미를 회복하는 씨앗의 방이다. 이민하 작가의 인두 작업은 사람들의 내력과 사연이 간명하게 불의 권능으로 쓰여져서 소리와 냄새로 음미 되는 과정에서 ‘집’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거기에는 ‘집’의 전망이 있다.

이민하 작가는 왜 무두장이처럼 양가죽 위에 인두로 지지는 작업으로 자신의 영적인 지식, 그노시스를 표현하려고 할까, 라고 질문한다면, 위와 같은 대답도 가설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쓰는 인두라는 도구이자 머신이 하나의 불의 과학 – 현대과학은 이 “‘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아직도 묵묵부답이다 – 의 소산이란 사실을 살펴봐야 한다. 이 인스트루먼트가 고대적인 연원을 갖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민하 작가의 사용 방식은 양가죽 위에 겹쳐 쓰기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불로 그대로 텍스트를 초벌 찍기 하는 것이다. 불의 언어, 불의 과학으로 오류 없이 쓰이는 책인 것. 그러므로 모든 생명이 돌아갈 비전과 함께 ‘집’의 전망이 있고, 그런 ‘숨겨진 차원’을 가시화하는 ‘비저너리(visionary)’의 내력이 가능하다. 다만 그러므로 이민하 작가의 작업은 더 모험적이고 신화적인 수사의 세계에서 조망할 필요가 있다. 그 작업은 종교적 성향과도 잇대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요청은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이다.

이민하 작가의 인두는 빛의 작업이 아니라 열의 작업이다. 그 열은 “침투하는 열(熱)”이다. 그 열기는 사람의 피부에 치직거리는 음향과 살타는 누린내 그리고 고통의 상상력이 환기되는 고대와 중세로부터 전해진 집단 무의식의 기억이 있다. 이 기억의 연대기를 펼치는 것이 이리저리 굴곡진 양가죽 표면이다. 이는 피하지방 아래 무의식화된 원형질적 기억들이 오래된 여행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어떤 타블로 판 같은 것이다. 이민하 작가가 불의 열기로 작업하는 공간은 이 판이다. 판은 사람들의 삶의 얼룩과 신산 그리고 망각되어서는 안된다는 윤리적 요청들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의 기억’(벤야민)으로만 가능하다. 이민하 작가의 작업이 동행하는 종교성은 이러한 측면에서 추론된다. 모든 것은 펼쳐내고 그 펼쳐낸 삶의 가혹한 깊이, 사연 많고 하염 많은 삶의 기록, 감히 공감이라고 말하기 버거운 차원에서 그 모두를 감당해내는 것이 라이프니츠적인 의미에서 ‘신’이다. 그에 따르면, 고백하는 것은 ‘신’이며, 어떤 고백은 ‘신적’이다.

#4. “불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무(無)를 찾는 것, 이것은 인간의 위대함을 말해준다.”(엠페도클레스)

이민하 작가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위상학은 이런 것이다. 신 스스로 ‘오늘’이라는 정신의 한 인간이 거처하는 곳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이런 특별한 작업의 행간과 복선 그리고 알레고리가 필요한 것이라고. 겹과 켜, 직접성과 현전성, 후각적 정신과 고도의 그노시스 같은 것들. 지금에 와서는 미디어 아트의 맥락에서 떠내려가듯 점차 폐기되어버렸다고, 뉴 미디어가 올드 미디어를 구축하는 것처럼 괄호 쳐졌다고 믿는 시대에 이민하 작가는 돌연히, 돌올하게 그 미디움(medium)의 시원적인 기호를 다시 호출해버린다. 그것도 모든 삶은 불멸이며, 불멸의 삶은 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망각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불멸을 알게 해주는 기호라고 증언하는 것처럼. “기념비도 추억도 심지어 증인조차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망각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삶”(벤야민)이 있다. 이 탁월한 긍정성이 인두와 그 불의 과학이 남기는 낙인의 흔적으로서의 문자 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으며, 마치 피닉스처럼 부정성이 변환된 긍정성으로 출현한다.

“모래바람에 눈을 감았다 뜨니 인천이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행동은 이기적인 자기만족.”

“마음속에서는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결혼과 함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구받았다.”

“얇은 종이처럼 팔랑거리는 차별들이 내 삶에 팽배했다.”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인간처럼, 그럼으로써 피닉스와도 같이 되살아나는 삶, 거기에 영원성의 지표이자 무늬가 찍혀진다는 듯이 이 종교적 언약 비슷한 느낌이 이민하 작가의 작업에는 있다. 거기에는 망각할 수 없는 것의 본질이 어떤 강렬도의 척도로부터 작동한다는 무언의 암시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남네시스(Anamnesis)>(2017)에서 이민하 작가는 상징적으로 인두질이 일어나는 타블로 판처럼 누워 있으며, 다른 이방의 사람들이 가진 각자의 사연들이 제각각의 다른 문자 체계의 잠언적인 언어로 화인된다. 그때 이민하 작가의 신체는 문자와 언어는 다르지만, 다시 헤쳐모이는 ‘집’으로서 일종의 바벨탑과도 같다. 흩어졌던 언어들이 영적인 씨앗의 방으로 모음 되는 곳, 거기에는 이민하 작가의 신체가 제공된다. 이 신체는 어린 양의 신체인 동시에 불길로 휩싸인 신체이며 동시에 잿더미이다. 그다음 순간, 재 속에서 다시 살아 오르는 다른 생명체의 신체이다. 바슐라르는 이를 ‘불의 새’라고 봤으며, 이민하 작가는 ‘상기(想起)’라고 봤다. 무엇을 상기하는가. 자신이, 또한 그 누구나 알아차리면 ‘불의 새’라는 엄연한 사실, 그노시스를 상기하는 것이다. 불의 과학으로 쓰이는 신체적 언어는 이처럼 희생제를 통한 ‘상기’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어떤 작업에서 이민하 작가는 인두로 문자를 찍고 그 화인 작업을 현재화하는 동시에 그 문자를 읊기도 한다. 통조림 된 문자가 아니라 불로 살아있는 문자가 퍼포먼스가 되는 것이다. 이때는 거대한 동굴이나 궁륭공간이 높은 중세도서관 같은 공간성으로 공명하기 시작한다. 쓰면서 읽는 것, 청각적 이미지를 통한 시각적이며 개념적인 차원의 개방은 ‘상기’의 가장 기본적인 루프이다. 가령,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에서 건강이 좋지 못한 젊은 사제는 고뇌하면서 일기를 적는데, 일기는 빈 여백에 쓰이면서 동시에 보이스오버로 읽힌다. 그리고 번역되는 자막은 다시 이 일기 내용을 가시화한다. 자신의 성독(聲讀)으로 울려진 텍스트를 다시 자신의 귀로 듣는다는 것은 공명하는 공간 자체가 부활하는 삶, 망각될 수 없는 삶의 기초라는 것이다. 그 공간성을 이민하 작가는 자신의 퍼포먼스에서 드러낸다.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바다 위에서 폭풍우를 만나 난파 직전까지 몰리는 것이 일반적이며,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악마의 맷돌이 돌아가는 사회에서 가속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민하 작가는 그러한 사회에 대한 응전의 형식이 아니라 그러한 사회로 초기 세팅된 정신적 형식을 완전히 새로운 서판으로 바꿔치기하여 깊은 망각 속에 있는 것들을 기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니 ‘상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망각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덧없는 삶은 덧없지 않다는 것, 이때의 ‘덧’이라는 찰나지간, 익명성, 겨를 없음은 그대로 영원성의 표지이다. 그 자체로 ‘덧’의 시간성은 불의 언어로 고정되고 가시화된다. 아니 신체화되어 타인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이 된다. 그노시스의 알아차림을 통해 이 삶의 고해를 항해하자는 것이 자칫하면 종교적 관념의 틀 속에서 헐벗은 반복이 될 수도 있지만, 이민하 작가는 그 인두질의 신체적 감각, 희생제적 자기 투신, ‘상기’와 부활의 본질로서 삶을 다시 바라보기를 요청한다. 아니 충격파를 던진다.

다시 한 번 더 묻는다. 왜 이민하 작가는 무두장이처럼 양가죽 위에 인두로 지지는 작업으로 자신의 영적인 언어를 추구하게 되었을까. 여기서 인두는 그 금속의 첨점 끝에 마치 ‘성 엘모의 불’처럼 응결된 불의 권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끝이 없는 거대한 파타고니아 협곡 사이를 아무런 안전보장이나 믿음 없이 그대로 던져진 운명의 무늬처럼 항해해갔던 마젤란 함대가 어느 모퉁이에서 번갯불이 돛대 끝에 둥글게 맺히는 현상을 만난 것처럼 말이다. 그때 선원들은 성스러운 여성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했다고 하는데, 이민하 작가의 작업은 바로 그러한 충동을 자연스럽게 촉발한다. 신이시여! 우리를 굽어살피소서. 암(闇), “울울하고 암암할 신의 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문밖까지 울려 나온다.” 우리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 소리가 울려 나올 때까지 인두로 지져야 한다. 인두는 비밀스럽다. 인두의 그 끝에 도사린 어떤 신적인 권능이 ‘불의 과학’으로 잠재해 있으며, 그것의 응축된 힘이 어떤 표면과 만나 화인될 때는 삶을 망각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망각할 수 없는 삶”이란 감각적이다. 감각의 경로를 따른다.

불길의 부조, 그 나타남의 사건은 마치 저 아득한 태초의 감각으로 일어난다. 우리말 “나타나다”는 음미할수록 어떤 신성한 현현의 느낌을 안으로 감싸고 있는데, 이민하 작가에게는 “나타나다”라는 동사는 그대로 ‘불’과 ‘연기’ 그리고 ‘냄새’의 언어로 표출된다. 오감으로 뒤덮인 채, 우리는 삶의 뜨거움과 누린내와 각성제를 한꺼번에 들이킨다. 이민하 작가의 작업 속에서 이는 불가피하다.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비평모음집에서 발췌

2018. 11 고양레지던시 협업프로젝트 – 불로 쓴 말

이 민 하 : 불로 쓴 말

김도희 (작가)

1.  간곡한 바람은 언제나 반복적이다. 기도문 필사는 손을 움직임과 동시에 목청 아래로 지속적으로 발음을 내려 보내 몸속에 그 말이 깃들기 바라는 행위이다. 이민하의 불로 쓰는 말, 인두 필사는 추상적 개념의 메시지, 그리고 육신을 연상시키는 가죽, 언 듯 보아 이 같은 반대의 요소 사이를 오간다. 겉과 속, 바꾸어 말하면 외부와 내부, 또 다르게 말하면 그림자와 이데아계 사이에 통로를 내고 넓혀 선명하게 한다. 새겨지는 것이 표면 속으로 침투하고 겹쳐지고 파고 들면 스며든다고 바꿔 말한다. 종이가 기름을 만나면 투명해지고 열이 가죽을 만나면 그을음이 눌어 앉는다. 이민하의 작업은 이러한 상반된 요소 사이를 기도하듯 오가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겹쳐진 몸을 표현하는 것 같다.

 2.  손에는 열이 흐르는 인두가 쥐어져 있고 그 아래에 가죽이 펼쳐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인 인두가 가죽 표면 위에 글씨를 남긴다. 펜은 종이 위 마찰을 일으키며 잉크를 남기지만, 인두는 피시식 치직 연기를 피워 올리며 가죽을 태우고 흔적을 남긴다. 성경에서 십계명이 새겨지는 순간, ‘온 백성이 천둥소리와 번개와 나팔소리를 듣고 산의 연기를 보았다.’ (출애굽기 20:18-20). 십계명이 구전이 아니라 반드시 ‘번개와 연기를 동반하여 비석에 새겨졌다’며 성경에 새겨져야(필사) 했던 이유는 그제야 비로소 말씀의 힘이 강한 실재감을 일으켜 믿음을 고취시키기 때문이다. ‘있으라.’ 말씀 한마디로 현상계를 창조한 신의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산이 되고, 사람이 되니 ‘속’을 빚는 힘이다. 그런데 이 ‘말’이 현상계인 ‘속’이 되면서 한계와 모순은 시작된다. 이민하의 작업에서는 이런 모순된 두 가지 축이 엿보인다. 육신을 초월한 것에 닿고자 하는 마음이 한 축, 그리고 그러한 마음의 양상이 물질(육체에 기반 한 인간 실존)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파괴적 상황이 다른 한 축이다. ‘번제’는 그런 모순의 일례이다. 육신을 정화하고 신에게 닿기 위해 죄를 범한 자기를 죽이는 대신 죄 없는 짐승을 제물로 삼는다. 죽이고 피를 보고, 태워서 하늘로 상승하는 연기와 그 타는 냄새를 감상하며 그 염원이 하늘에 닿는 것처럼 느낀다. ‘아버지 제 몸이 타고 있어요!’ 소원은 고통이다. 갖지 못한 것에 관한 고통이 번제물을 통해 표현된다. 그렇게 따지면 번제는 하늘의 통각을 자극하려는 일이거나 나의 결핍에 따른 고통의 대리물을 찾는 행위이다. 번제물이 깨끗하고 순수할수록 그 고통이 강조된다.

그녀는 커다란 가죽을 입은 듯, 덮은 듯, 죽은 듯 누워있다. 고통 받는 여자들이 둘러 앉아 그 위에 인두로 상처 입은 마음을 말로 새긴다. 작가는 고통의 대리인이 되기 위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나사렛 예수처럼 가죽 아래에 누워있다. 예수가 당한 육체적 고통에 관한 묘사가 치밀하고 극적일수록 신의 사랑이 강조되는 아이러니. 필사를 하는 사람들의 고통, 가죽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강조될수록 그 아래 누운 예술가의 몸은 ‘번제물’로서의 순결한 매체가 된다. 메시지가 가죽의 타는 냄새와 소리로 치환되니 이것은 ‘번제’다. 현상계로 침투하는 주술적 힘을 상상한다. 참가자들의 주문과도 같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은 이교도의 주문처럼 들린다. 남겨진 가죽은 예수가 무덤 속에 남겨 두었다는 피 묻은 헝겊과 같이 실재 고통의 증거 ‘아나포라 Anaphora-기억해 내기’이자 번제의 대리물이다. 아마 그들의 체증을 조금은 완화 ‘헤시키아 Hesychia-내적평안’되었을 것이다.

3. 나는 감정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믿는다. 감정은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에너지로 현상계와 맞물린다. 작게는 몸이고 크게는 우주. 번제물과 희생양은 이러한 에너지를 해소하거나 전이시키는 매체이다. 많은 경우 인간은 자기 행동이 용납되는 조건 하에서는 무슨 일이든 하게 된다. 논리와 이성은 여기서 억압된 인간 감정에너지 표출의 수단을 찾아 대령하거나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살육의 명분을 제공한다. 인간의 역사는 ‘종교’와 ‘이데올로기’ 즉, 유일신과 집단적 광기의 임계점이 낮은 곳에 유동 창궐하여 살육의 원인을 미화해 온 것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민하의 불도장은 대량학살이 일어난 곳, 분쟁지역, 자연재해가 있는 곳, 광기의 희생양이 대거 발생한 곳의 좌표에 기계적으로 도착해 ‘쿵!’, ‘쿵!’ 내리찍는다. 비극이 이미 벌어졌거나 벌어지는 중이므로, 이 도장 찍기는 양피지 위의 ‘기록’이자 ‘징표’로도 보인다. 이전의 필사가 그러하듯 가죽 위 연기와 그을음을 통해 참상과 고통을 상기할 수 있겠지만 나는 여기서 어떤 파멸의 징조와 좌절을 담은 저주(파괴적 소망)의 이미지 역시 떠올린다. 도장이 연기를 피우고 지나간 자리에는 정 반대의 말, ‘신의 가호를…’같은 기도 구절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염원은 다시 저주처럼 자기를 파괴하는 중이다. 좌표축 도장 찍기의 기계성은 욕망의 기계가 된 인간이 그 욕망에 냉정히 파괴되는 귀결이자 순리이다. 원인에 따른 자연한 귀결을 우리는 ‘신의 뜻’이라 부른다.

4. 쪽방촌과 바우하우스, 공감의 좌표뜨기

이민하는 바우하우스 판상형 주택의 아이디어가 한국에서 경제적 효율만 남아 쪽방이 되어버린 사연을 추적했다. 그리고 바우하우스의 높은 창, 빛을 투과하며 열린 형태로 이 방의 사연을 펼쳤다. 콩댐을 한 장판지로 만든 이 구조물은 입방체의 집을 단순히 펼친 모양이기도 하지만 창의 후광을 입은 십자가와 닮았다. 상자를 펼치면 그 펼쳐진 내부공간은 드러난 마음처럼 읽힌다. 살이 타는 감각적 자극이 사라진 곳에서 나는 함께 침묵을 유지한다. 쪽방의 장판지를 칼로 도려낸 연꽃 만다라는 ‘고통’을 확산 전이하지 않는다. 그러니 도려냈다기 보다는 피워냈다고 해야 옳다. 여기서 타인의 경험은 일방적 말씀으로 판별되는 ‘선’과 ‘악’으로 증폭되지 않았다. 대신 인간 삶, 보편의 고통으로 와 닿는다. 원인에 관한 분노와 원망이라는 누적된 감정이 없기에 징벌과 저주, 그리고 이에 따른 희생양과 번제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평화로움은 ‘안심’, 즉 나에게로 돌아오는 파괴력이 없는 중에서 그 업의 연쇄가 소거되는 상태이다. 조금 과장하면 가시관을 쓰고 피가 낭자한 고통받는 메시아가 사라진 말레비치의 십자가에 비유할 것이다. 감정의 대리물을 소급해 죄를 짊어지고 기꺼이 죽었던 예수가 ‘너희 죄를 사하였다’ 함은 본인 이후로 욕망과 감정의 ‘번제물’을 삼지 말라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민하가 예술을 통해 세상에 끼치고자 한다던 그 정신적 함양이란 이런 부분이 아니었을까.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협업프로젝트

Pan×Sori×W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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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소리꾼 ‘권송희’씨와 3채널 영상 작품을 협업해서 선보입니다.

I collaborate with a young Korean traditional singer ‘Song hee Kwon’ and make a 3-channel video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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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 Studio 14, MMCA Goyang Resid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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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시 명: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오픈스튜디오14

○ 전시기간: 2018. 11. 9.(금)∼11. 11.(일), 3일간

○ 참여작가: 총 20명

김도희, 김두진, 김소영, 민예은, 박석민, 송민규, 신이피, 안유리, 오화진, 이민하,

이재욱, 정혜정, 조은용, 허수영, 다니엘 슈투벤폴, 루오 저신, 루트 후터,

안드레스 브리손, 켄지 마키조노, 필립 알라르

 
○ 전시장소: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전시실 및 기타공간

○ 관람시간

- 11. 9.(금) : 13:00∼20:00

- 11. 10.(토)~11.(일) : 13:00∼18:00

 
○ 개막: 2018. 11. 9.(금) 19:00/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 이벤트 및 퍼포먼스

- 11. 9.(금) 16:00~18:00 : 고양온에어(모더레이터: 정시우 큐레이터)

- 11.9(금) 18:00 조은용&정혜정 ‘오쇠동 라이브’

- 11.9(금) 18:30 안드레스 브리손 라이브 세트

- 11.9(금)~11(일) 13:00~18:00 : 석민네 데키타테

- 11.9(금)~11(일) 13:00~14:30 : 김도희 뱃봉우리

- 11.9(금)~11(일) 13:00~18:00 : 경품 추첨행사

- 11.9(금)~11(일) 13:00~18:00 : 15실의 스튜디오 방문확인 스템프 수령 이벤트

- 11.11(일) 13:00~14:51 : 김소영 1+1+1+1 낭독회

 

○ 연계전시

-《이동하는 예술가들 Artist On The Move》 : 전시실

- 협업 프로젝트 기획전《고양레지던시 예술가협동조합: COOP》 : 스튜디오17

- 국제교환입주작가전 《이동하는 예술가들: 국제교환편》 : 스튜디오18(고양), 미디어아트월(서울)

- 고양아트숍(기획:송민규) : 스튜디오5

- 민민민화‘도’(민예은, 송민규, 오화진, 이민하) : 1층 복도

○ Title: MMCA Residency Goyang Open Studio 14

○ Date: 2018. 11. 9.(Fri)∼11. 11.(Sun)

○ Artist

Dohee KIM,  Du Jin KIM, Soyoung KIM, Ye-Eun MIN, Seok Min PARK,  Mingyu SONG,  Ifie SIN, Yuri AN, Hwajin OH, Minha LEE, Jaeuk LEE, Hae Jung JUNG, Eun Yong CHO,  Suyoung HEO,  Daniel Stubenvoll, Ruth Hutter, Luo Jr-Shin, Andrés Brisson,  Kenji Makizono, Philippe Allard

○ Venue: MMCA Residency Goyang Gallery, etc.

○ Opening Hours

- 11. 9.(Fri) : 13:00∼20:00

- 11. 10.(Sat)~11.(Sun) : 13:00∼18:00

○ Opening: 2018. 11. 9.(Fri) 19:00/ MMCA Residency Goyang
○ Event & Performance

- 11. 9.(Fri) 16:00~18:00 : Goyang On Air (Moderator Chung Seawoo Curator)

- 11.9(Fri) 18:00 Eung Yong CHO& Hae Jung JUNG ‘Osoe-dong Live’

- 11.9(Fri) 18:30 Andrés Brisson Live Set

- 11.9(Fri)~11(Sun) 13:00~18:00 : Seokmin’s Snack Bar

- 11.9(Fri)~11(Sun) 13:00~14:30 : Belly Peak by Dohee KIM

- 11.9(Fri)~11(Sun) 13:00~18:00 : Giveaway Event

- 11.9(Fri)~11(Sun) 13:00~18:00 : VIP Lounge(Please collect the 15 stamps of artist studio)

- 11.11(Sun) 13:00~14:51 : 1+1+1+1 Reading&Recording by Soyoung KIM

○ Related Exhibitions

- 《Artist On The Move》: Gallery & Main Hall

- 14 Korean artists-in-residency collaboration exhibition 《MMCA Residency Goayng COOP》: Studio 17

-  International Residency Exchange Program Artists Exhibition 《Artists On The Move: International Residency Exchange Episode》: Studio18(Goyang), Media Art Wall(Seoul)

- Goyang Artshop : Studio 5

- MMMH Drawing (Ye-Eun MIN, Mingyu Song, Hwajin OH, Minha LEE) : 1F Hallway

○ Free Shuttle Bus(MMCA Seoul-Gupabal Stn. Exit3 – MMCA Residency Goyang)

Exhibition Curation 전시기획 : 충칭의 바람, 인천에 머물다

* English information follows.

인천문화재단 인천-충칭 문화예술국제교류기획지원 결과보고 전시에 기획자 및 작가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충칭교류단 멤버 18명의 작품과 연계포럼 등의 부대행사가 진행됩니다.

오프닝 리셉션 : 2017년 12월 28일 (목) 오후 3시
기간 : 2017년 12월 27일(수) ~ 12월 31일(일) 10:00~18:00
장소 : 부평아트센터 갤러리 꽃누리
〒21440 인천광역시 부평구 아트센터로 166
Tel : 032-500-2000

오시는 방법 : 1호선 백운역 2번 출구에서 도보 5분

참여작가 : 김윤희, 노희정, 류성환, 민지원, 박경종, 박다애, 서효은, 손송이, 송용일, 송한결, 예미, 윤석, 이경희, 이민하, 이정민, 정연지, 정혜진, 조규훈

기획 : 류성환, 손송이, 이민하, 박석태

연계포럼 : 2000년대 이후 중국 현대미술의 상황 – 구오 슈오보 (미술사학자/사천미술학원 교수), 중국에서 갤러리를 경영한다는 것은? – 쩡 투 (충칭 십방아트센터 디렉터)


Exhibition Curation – The Wind of Chongqing stays in Incheon

Opening Reception : 28th Dec (Thur) pm. 3
27th Dec (Wed) ~ 31th Dec (Sun) 2017, Open / 10:00~18:00
at Bupyeong Arts Center Gallery Kot-Nu-Ri

(21440) 166 Artcenter-ro, Bupyeong-gu, Incheon, Korea
Tel : +82-032-500-2000

2th exit in Baegun station route 1,  5 minutes on foot

2017.9 개인전 평문 – 성과 속을 매개하기, 희생양 되기

성과 속을 매개하기, 희생양 되기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이민하는 종이와 가죽에 텍스트를 쓰는 작업을 한다. 처음엔 기름을 먹인 종이에, 그리고 이후 점차 무두질된 양가죽, 소가죽, 돼지가죽, 그리고 사슴가죽에다 쓴다. 예나 지금이나 가죽을 무두질하는 것은 천한 일에 속한다. 작가가 가죽에다 텍스트를 쓰는 것은 이런 사회적 계급의식과, 사회적 약자로서의 자의식과 무관하지가 않다. 작가는 사회 문제며 사회 환경에 관심이 많다. 예컨대 전작(2017, 천 개의 문제풀이와 좌절)에서 작가는 가리봉동 쪽방촌의 한 방을 온통 텍스트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다. 기름을 먹인 종이로 도배를 한 후, 그 위에다 연필로 빼곡하게 텍스트를 기록했는데, 공무원시험, 토익시험, 부동산중개사자격증시험을 위한 기출문제들이다. 이런저런 시험에 내몰린 내일이 없는 청춘들의 암울한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2011년에는 가죽에 텍스트를 쓰고 그 과정을 전시하는 작업으로 동일본 대지진 참사의 희생자를 기리기도 했다(지난한 일).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 가죽에 텍스트를 새기는 행위는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하는 제의적 성격을 갖는다. 청춘과 희생자들 같은 사회적 약자의 상처를 보듬어 새살이 돋게 하는(재생) 것이다.

텍스트로는 세계의 모든 언어로 된 모든 종교의 기도문을 필사했다. 작가가 직접 필사하기도 하고, 참가자를 매개로 필사하기도 하고(관객참여), 때론 플로터를 통해서 필사를 하기도 한다. 왜 기도문인가. 작가의 작업에서 기도문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종이에, 가죽에 기도문을 필사하는 작가의 행위며 작업은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가지고 있는가. 사람들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이타적인 대의나 존재론적인 경우와 같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를 위해서도 기도한다. 이처럼 기도는 양가적이다. 성에도 속하고 속에도 속한다. 성과 속을 매개시켜준다. 속에 속한 것을 정화시켜 성의 차원으로 승화시켜준다. 정화와 승화를 매개로 성속을 연결시킨다(성속의 변증법?). 연결시킨다기보다는 원래 연결된 상태, 원초적 상태, 처음상태를 상기(아남네시스)시킨다. 처음상태(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원형)를 복원하고 회복시킨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존재의 처음상태는 성과 속이, 삶과 죽음이 하나로 연결돼 있었다고(연속성) 본다. 그리고 여기에 자본주의와 경제제일주의원칙이 매개되면서 생산적인 것(세속적인 삶)과 비생산적인 것(죽음과 성에 속한 것)이 분리되었다고(불연속성) 진단한다. 그러므로 불연속성을 넘어 원래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이 존재의 과제로서 주어진다.

작가는 그렇게 성과 속의 상관성에, 성과 속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여기서 성에 줄이 닿아있는 종교는 속을 정화하는 것, 속으로 하여금 성의 차원으로 승화시켜주는 것과 관련이 깊다. 그 방법이 여럿 있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가 경(기도문)을 외우는 것(독경)이고, 받아쓰는 것(필사)이다. 그렇게 받아쓰다보면 내가 지워지고 쓰는 행위만 남는다. 내가 지워진다? 번뇌가 지워지고, 욕망이 지워지고, 상처가 지워진다. 그렇게 지워진 내가 비로소 투명해지고 오롯해진다. 역설이다. 지움으로써 오롯해지는, 아를 지워 진아(진정한 나, 처음상태 그대로의 나)를 얻는 역설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종이에, 가죽에 기도문을 필사하는 행위는, 그리고 참가자로 하여금 필사에 참여시키는 행위는 이처럼 나를 지우는, 번뇌가 사라지고 욕망을 잠재우고 상처를 치유하는, 그럼으로써 진정한 나를 얻는, 진정한 나와 대면하는, 자기반성적인 행위와 관련이 깊다. 수신과 수행의 상징적 의미와 관련이 깊다.

그렇다면 작가는 가죽에다 어떤 텍스트를 어떻게 쓰는가. 어떤 텍스트로 치자면 주로 기도문을, 그리고 참가자가 있는 경우에 저마다의 내면독백(고백? 상처?)을 쓴다. 어떻게 쓰는가를 보면 인두로 필사를 한다. 그렇게 가죽에다 인두로 필사를 하다보면 가죽 타는 냄새가 나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참가자 저마다의 속말을 글로 뱉어내는 행위와 과정을 통해서 내면에 응축된 상처가 타고(정화?), 연기와 함께 해소(승화?)되는 것이다. 신자들이 지성소를 찾아 저마다의 죄(상처)를 고백하고 죄 사함(상처가 해소되는)을 받는 종교 예식을, 그 예식의 상징적 의미를 생각하면 되겠다. 실제로 작가는 전작에서 한 마을의 가장 높고 편평한 곳(아마도 성스러운 땅이면서 거룩한 곳, 땅에 있으면서 정작 그 주권이 하늘에 속한 곳, 그러므로 교회)에 지성소를 차리고, 마을주민들로부터 기원문을 적은 엽서를 전달받는다. 여기서 기원문은 기도하기, 죄를 고백하기, 고민을 털어놓기, 그리고 어쩌면 무슨 수건돌리기처럼 상처를 전이시키기와 통한다. 그리고 기원문을 적은 엽서를 전달받는 작가의 행위는 고민을 들어주고 상처를 덮어쓰는, 그럼으로써 마을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상처가 치유되는 상징적이고 주술적인 의미와 관련이 깊다. 저마다 내면의 상처를 털어놓아 상처가 해소되는 과정으로 보면 되겠고, 여기서 작가는 그 계기며 매개역할을 한다. 매개자다. 무당이다(요셉 보이스는 예술가를 무당이라고 했다).

작가는 참가자 저마다의 내면독백(상처)을 텍스트로 쓰게 한다고 했다. 여기에 작가가 누워있다. 편안해 보이기도 하고, 무방비 상태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무두질된 사슴 가죽을 의복처럼 이불처럼 덮어쓰고 있다. 그리고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5명의 외국인 참가자들(우즈베키스탄 2명, 중국, 터키, 이탈리아)이 겪은 차별받은 이야기를 저마다 가죽표면에다 인두로 쓴다. 차별받은 이야기는 작가가 참가자들에게 주문한 것인데, 작가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를테면 이주노동자 문제)이 반영된 것이고, 단순한 차별을 넘어서 저마다 내면에 응축된 존재론적인 상처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참가자들이 가죽표면에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쓰면 가죽이 타고 냄새가 나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상처가 전이되면서 해소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가죽이 타고 냄새가 나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은 중요하다. 바로 상처가 참가자로부터 작가에게로 전이되는 과정이 하나하나 기록되고 등록되는 상징적 지점이고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서 전해지는 상징적 제스처들이며 종교적 의례들의 원형으로 보면 되겠다.

이를 통해 상처가 참가자로부터 작가에게로 전이된다고 했다. 비록 가죽을 덮어쓰고 있다고는 하나, 여기서 가죽은 사실은 작가의 몸을 대리한다. 그러므로 가죽에 이야기를 쓰는 것은 곧 작가의 몸에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징적인 의미로는 작가의 몸에 이야기가 아로새겨지고, 작가의 몸이 타고, 작가의 몸에서 냄새가 나고, 작가의 몸이 연기가 돼 피어오른다. 번제다. 우리 죄를 대신할 희생양을 지목하고, 그 희생양을 바쳐 신의 분노를 잠재우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르네 지라르는 이런 희생양 만들기를 종교적 제의의 차원을 넘어 제도적 장치(제도기계)라고 본다. 사람들의 폭력욕망(욕망기계)을 투사하고 전이시키고 해소시켜줄 희생양 지목하기, 희생양 만들기, 희생양 내어주기에 모든 건전하고 건강한 제도의 성패가 달려있다. 그렇게 종교는 사회의 균형추 역할을 한다. 그 과정에서 폭력과 관련되고, 그런 만큼 제도는 희생양이 흘린 피 위에 축조된다. 그렇게 아마도 추후 작가의 행보는 폭력이 있는 곳, 세계 도처의 분쟁지역을 찾아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희생양을 자처하고 무당을 자처하는 행보가 될 것이다. 무당은 성과 속을 매개하고, 삶과 죽음을 넘나든다. 가죽은 죽은 짐승들의 몸이고, 죽음의 표상(주검)이다. 그 주검을 덧입어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재생이다. 참가자의 입장에서 보면 희생양(무당)의 죽음을 매개로 폭력(폭력욕망)이 해소되고 상처가 치유되는 재생이다. 작가는 그런 죽음의 표상(상처가 아로새겨진 가죽 그러므로 어쩌면 살과 피가 타는 몸)을 옷처럼 덧입기도 하고 이불처럼 덮어쓰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 세계의 상처와 폭력과 분쟁이 투사되는 스크린을 대신한다.

아나포라(Anaphora), 그리스어로 기억을 의미한다. 아남네시스(Anamnesis), 상기를 뜻한다. 기억보다 더 깊은 기억, 원형적 기억, 존재의 처음상태에 대한 기억이다. 그리고 헤쉬키아(Hesychia), 내적평안을 의미한다.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들이며, 작업을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에 해당한다. 이로써 유추해볼 때 작가의 작업은 존재의 원형을 상기시키고, 존재의 처음상태를 회복하고 복원하는 것과 관련이 깊다. 진정한 자기와 대면하는 자기반성적인 과정을 전제로 하는 이 과정(어쩌면 죽음너머로 재생되는, 그러므로 거듭나기와 정화의식)이 있은 연후에라야 존재는 비로소 내적평안을 되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이다. 가죽에 이야기를 쓰는 작가의 행위는 책을 쓰는 행위에 비유할 수 있다. 성과 속, 상처와 치유, 폭력과 희생양(르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이라고 했다), 놀이와 종교의식이 날실과 씨실로 직조된 고백의 문화학으로 집필된 책일 수 있다.

2017.4 낮고높고좁은 방 – 기획글

전시서문    이민하 (작가, 전시기획)

간체자가 점령한 화려한 간판들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고층빌딩과 아파트숲의 풍경에 익숙한 나에게 중국의 어느 소도시를 방문한 듯한 인상을 주었다. 2014년 초가을, 서울에서 나고 자라 서울토박이였던 나는 구로구 주민들과 함께한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지역 리서치를 위해 참가한 구로공단 역사 투어를 통해 가리봉을 접하게 되었다.

70년대의 가리봉은 구로공단이라는 거대한 엔진이 시골에서 갓 상경한 젊은이들의 청춘과 꿈을 연소하면서 성장하던 시기였다. 공장의 기숙사에 미처 다 수용되지 못한 지친 노동자들을 위해 벌집들이 생겨났다. 가리봉의 벌집은 좁은 방 한칸과낮은부엌,길고좁은다락이맞물린특징적인구조의방들이수십채가연결된공동주택이다.

어린 여공들이 미싱을 타고 야학을 다니면서 꿈을 키우던 가리봉 벌집은 90년대에 들어서 구로공단이 쇠퇴하면서 2000년대에 들어서는 값싼 주거지를 찾아 유입된 중국동포들과 외국인 노동자, 노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구로구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도 낯설게 느껴지는 곳이다. 산업화의 아픔을 간직한 가리봉의 역사를 기억하고, 이 곳의 의미와 가치를 예술적인 접근으로 풀어내려는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전시 ‘낮고 높고 좁은 방’은 구로공단과 한국 근대화를 상징하는 가리봉 벌집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고시원 등의 오늘날 청년 세대가 겪는 불안정 주거공간이 이어지는 고리를 탐색한다. 이번 전시의 참여작가 8명은 전시주제의 문제의식에 동감하며, 구로공단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가리봉 지역을 답사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방’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전시공간의 입구에는 하꼬방1과 루핑집2으로 시작되는 불안정 주거공간의 다양한 명칭과 연표가 배치된다. 구로공단의 성장과 함께 생겨난 벌집방은 80년대에 등장한 고시원과 구조적인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연표는 고시원이 쪽방화 되는 과정과 IMF 이후 직장인들의 이용 증가로 인해 고급화되는 시점을 간략히 보여준다. 전시장의 초입은 현실적인 가리봉의 모습을 담은 방들로 시작하는데, 안으로 이동하면서 점차 사적이고 내밀한 방이 등장하는 순서로 배치되었다.

정희우는 도시의 공간에서 발견되는 작은 기호들을 탁본으로 어루만져 시각화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가리봉의 실제 벌집방을 탁본해서 방의 규모와 창문 및 3개의 문의 위치를 통해 관람객으로 하여금 벌집방의 특수한 구조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 사용감이 역력한 발이 엉성하게 묶여있는 왼편의 문은 대문으로 나갈 수 있는 주 출입구이다. 고개를 많이 숙여야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정면 왼쪽의 낮은 문은 방보다 낮게 만들어진 수도가 있는 다용도실로 연결된다. 정면 오른쪽의 약간 높은 문은 관 정도 크기의 좁고 긴 쪽다락방으로 연결된다.

전시제목인 ‘낮고 높고 좁은 방’은 정희우가 탁본한 방의 실제 구조적 특성을 보여주는 표현이자, 사회학자인 정민우가 그의 저서 ‘자기만의 방(2011, 이매진북스)’에서 언급한 청년세대의 주거 문제를 드러내기 위한 표현과도 연결된다. 정민우는 낮고(반지하방) 높고(옥탑방) 좁은(고시원)이라는 형용사들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도심 속 불안정 주거 공간을 지칭한다. 리빙텔, 미니텔 등 명칭의 변화는 있어왔으나 이러한 공간들은 집으로 인정받지도 못해왔고 정부의 시선 밖에 머물러 있었다. 하나로 명명하기 어려운 이런 공간들은 계속 탄생되고 방치되어 왔다.

김정은은 자신이 걸어다닌 길의 흔적을 활용해서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지도 만들기를 해오고 있다. 가리봉동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우연히 조우한 여객기를 통해 가리봉으로 향하는 여정을 표현하고자 한 작품 ‘self mapping 가리봉 벌집 비행’은 2~30분에 한 대씩 등장하는 여객기와 마주친 곳의 풍경, 위치 등을 기록한 것으로, 주관적이면서 개인적인 시선으로 기록된 가리봉의 현재이다.

김미라는 공산품과 복제 이미지, 영상을 매체로 ‘개인’이라는 단위로써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의 의문을 시각 예술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가리봉동에서 경험한 총천연색 간판들과 함께 자리한 커다란 분양 풍선은 한국사회가 지닌 주거공간에 대한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서울의 역사적 지층이 어느 한 순간에 멈춰있는 듯한 가리봉의 풍경들은 여러가지 사물과 간접 이미지로 분절되어 낯설게 다른 사물들과 결합한다.

이마로는 결벽증과 편집증적인 성향을 지닌 작가로 웹서핑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지금의 청년세대의 특성을 대변한다. 일반적인 소통은 어렵지만 그 자신이 하나의 세계를 오롯이 구축하고 있으며, 신체의 연장으로서의 ‘방’ 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구로탐방’은 웹서핑을 통해 수집한 이미지들이 30미터에 이르는 롤지에 걸쳐 제작된 드로잉 연작이다. 강박적이지만 과감한 선질은 그림을 통해 세계와 만나는 그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민하는 ‘성聖과 속俗’을 주제로 인간다움에 대한 탐구를 시각화하는 동시에, 주민참여형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각 지역에서 전개하고 있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시멘트로 덮여있는 슬레이트 지붕은 철거촌의 풍경이자 개발의 현장이기도 하다. 헌법35조 3항의 문구를 차용하여 행정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았던 불안정 주거공간에 대해 환기시킨다. 안쪽에 위치한 방은 콩댐이 된 장판지의 꿉꿉한 냄새와 빼곡히 필사된 기출문제들로 사각의 방 안에 갇힌 청년들의 현실을 드러낸다.

유한이는 작은 블록들을 조립하여 만들어진 건축적 구조물을 통해 변화와 상실을 거듭하는 삶의 모습을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시가 매입한 가리봉 벌집 두 채는 층계참이 붙어있는 독특한 계단이 존재한다. 작가는 이 마주보는 계단에서 파편화된 삶의 흔적을 채취하고 그려낸다. ‘각각의 방’ 시리즈는 각기 다른 문의 크기와 구조를 가진 벌집방의 특수성을 부각시키면서, 꿈과 희망이 있었을 그때의 삶을 무지개색으로 표현한다.

김보경은 기억과 재현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과 사건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설치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품 ‘The dim landscape of Sune’의 주인공은 기술을 배우고 짝을 이뤄서 도시에 정착하고자 하는 바램을 품고 시골에서 상경했다. 작가의 노동적 행위로 생겨난 작품 표면의 깊고 불규칙한 주름들은 주인공이 감내했어야 했던 삶의 고단함과 치열함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모양의 캔버스들은 Sune의 깊은 사색과 마주한 풍경의 시간들이며, 어둡게 드리워진 설치작품은 그 풍경을 뒤로 하고 떠나온 잔재들을 담담히 드러낸다.

김덕희는 주로 열과 빛을 소재로 설치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가는 한국 근대화의 상징인 구로 공단의 쪽방촌을 한국이라는 모태의 자궁이라 해석한다. 압축 성장 과정에서 겪은 급속한 근대화. 작가는 불안정 주거공간인 쪽방촌과 급속한 근대화의 그늘에서 태어난 2014년 여객선 참사를 자궁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하여 두 공간에서 존재했던 이들이 보았을 꿈들을 오브제와 그림자로 드러낸다. 관객은 가장 안쪽 방에 마련된 암실에 들어가서 그들의 꿈을 엿보거나 태내로 회귀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각각의 방은 참여 작가들의 기존 작업의 매체가 적극적으로 발현되고, 각자가 경험하고 생각해 온 사회문제에 대한 의식들을 자연스럽게 작품을 통해 드러내도록 유도한 구조적인 장치이다. 한국사회의 압축성장의 혜택을 본 30대 후반~40대 중반의 작가들이 지금의 청년 세대의 주거 문제와 ‘방’에 대한 생각들을 가리봉이라는 필터를 통해 바라보면서 작품을 통해 녹여냈다. 아직도 이름을 얻지 못한 많은 ‘방’들을 통해 우리가 봉착한 사회문제와 마주하면서, 모두가 함께 상상해 보기 위한 이러한 시도가 앞으로도 지속되기를 바란다.

2017.9 Solo Exhibition – Mediating the Sacred and the Profane, Becoming a Sacrifice

Mediating the Sacred and the Profane, Becoming a Sacrifice
Kho Chung-Hwan (Art Critic)

The work of Lee Minha involves writing texts onto paper and leather. Lee began with oiled paper, and then gradually moved on to tanned sheepskin, cowhide, hog leather and deerskin. The job of tanning animal hides has long been considered menial. Therefore, the artist’s decision to transcribe texts on leather is not unrelated to her self-awareness of social vulnerability, not to mention the problems of social class distinctions. Lee is very much concerned with social issues and communal environments. For her recent project titled One Thousand Questions and Despair (2017), the walls of a tiny room in the Garibong-dong shantytown were almost entirely covered with texts. Firstly, Lee plastered the walls with oiled paper, and then filled up the surface with sample questions for civil service exams, the TOEIC test, and the real estate licensing exam. On the whole, the project can be described as a satire on the grim realities faced by today’s youth who have been driven to desperation with little hope for the future. In addition, Lee’s 2011 project Very Difficult Labor, which exhibited the entire process of inscribing texts on leather, was a way of honouring the victims of the Great East Japan Earthquake. The act of incising texts onto leather thus acquired a ritualistic undertone. By embracing the anguish of such socially disadvantaged groups as the younger generation and disaster victims, the artist heals their wounds and allows new flesh to grow (i.e. regeneration).

As for textual sources, Lee Minha has transcribed a variety of prayers written in many different languages. Sometimes the artist herself takes on the task of transcribing texts. Sometimes it is left to participants (as a form of audience participation), and sometimes a plotter is used for transcription. Why does she turn to prayers? What significance do prayers have in her work? What profound meanings can we find in the artistic transcription of prayers on paper and leather? Indeed, people pray for personal gain, and yet at the same time they are prompted by more fundamental concerns including altruistic and ontological values. Prayers are therefore ambivalent in nature, belonging to both sacred and profane realms. As a result, prayers mediate the sacred and the profane. By purifying what belongs to the profane world, prayers sublimate it to the sacred level. The sacred-profane connected is created through purification and sublimation (the sacred-profane dialectic?). Or, rather than newly uniting the two, Lee Minha reminds us (which then results in anamnesis) of the initial, connected state, the most primitive state, or the state at the beginning. The initial state (and therefore the archetype of existence) is then reconstructed and restored. Georges Bataille argues that in the initial form of existence, the sacred and the profane as well as life and death are all connected as one (continuity). According to him, mediation by capitalism and economy-first principles has led to a divide (discontinuity) between what is productive (secular life) and what is unproductive (the sacred realm of death). Given this, our task is to overcome the consequent discontinuity and restore the original continuity.

Lee Minha explores the correlation between the sacred and the profane, not to mention the restoration of continuity between the two realms. In this respect, religion is closely associated with the practice of purifying secular things and subliming them to the sacred level. One of the most effective ways to achieve this is to recite and transcribe prayers. If you continue transcribing prayers, you will eventually find that ‘self’ has been erased and that you’re only left with the act of transcribing. What does it mean to have one’s ‘self’ obliterated? It wipes out all your agony, desires and wounds. Having thus been erased, one then finally becomes transparent and complete. Here lies a paradox; paradoxically, deletion brings about completeness and ‘true self’ (true ego in the original state) arises only when ‘self’ is gone. In short, the act of transcribing prayers on paper and leather and inviting audience to participate in the effort is closely connected to the process of introspection that wipes out all anguish and desires, and then heals wounds by erasing ‘self’ and confronting ‘true self.’

What kind of texts does Lee Minha write on leather and how? As for textual materials, she mainly uses prayers, and sometimes participants are asked to each come up with an internal monologue (in doing so, they offer confessions and reveal their wounds). In terms of methodology, the artist uses irons to transcribe her chosen texts. When texts are transcribed onto leather with irons, participants soon smell the burning leather and see smoke. As they each give words to their internal thoughts, their wounds buried deep within are burned (purification) and then go up in smoke (sublimation). This is reminiscent of religious rites whereby believers visit holy places to confess their sins (wounds) and find forgiveness (alleviate wounds). We must also consider its symbolic significance. In fact, in one of her previous projects, Lee Minha built a sanctum in the highest and most even place (possibly a holy and divine place, a place that is found here on earth but is ruled by the heaven above – in other words, a church) and received postcards from local residents carrying their invocations. Such invocations are closely related to the act of praying, confessing sins and worries, and then transferring wounds perhaps very much in the same manner as the drop the handkerchief game. Furthermore, the act of receiving the villagers’ postcards with their invocations written on them has a symbolic and shamanistic meaning. This way, the artist lends an ear to their worries and embraces their wounds, thereby healing them as far as the villagers are concerned. Since participants resolve their inner wounds by revealing them, the artist serves as an impetus and mediator. She becomes a shaman (Joseph Beuys asserts that all artists are shamans).

As mentioned above, the artist invites each participant to share his or her internal monologue (wounds) in the form of written texts. Here lies the artist. She looks relaxed and at the same time somewhat defenceless. She covers herself with tanned deerskin as if it were clothing or a blanket. A group of five immigrants (two from Uzbekistan and one each from China, Turkey and Italy) currently living in Korea write down their stories of discrimination on leather using irons. The artist has asked them share such stories, which not only reflect her own interest in social issues (such as the situations of immigrant workers) but also encompass ontological wounds condensed deep within, going far beyond the simple problem of discrimination. When the participants incise their stories onto the surface of leather, the leather burns and smoke arises. Their wounds are resolved through metastasis, and within that process it is important to observe the leather burning and smoke arising. This is because it marks a symbolic phenomenon that records each step in the metastasis of the participants’ wounds onto the artist. It can be viewed as an archetype of the existing symbolic gestures and religious rites.

As I mentioned above, the participants’ wounds are transferred onto the artist through this process. Even though she is wrapped in leather, here the leather in fact replaces her body. Therefore, writing on the leather equates to writing on the artist’s body. In symbolic terms, the stories are etched on her body before it burns, gives off a smell and then goes up in smoke. Lee Minha becomes a burnt sacrifice. We single someone out as a scapegoat for our sins and offer that sacrifice to appease God’s wrath. Interestingly, René Girard regards this sacrificial process as part of our institutional frame (institutional mechanism) that transcends religious rites. The success of any sound and healthy system depends on how well we recognise scapegoats, who could reflect, transfer and alleviate people’s violent nature and desires (desire mechanism), turn people into scapegoats and offer sacrifice. This way, religion serves as a counterweight in the society steeped in violence, where the core system is built upon sacrificial blood.

In the future, Lee Minha is most likely to visit areas of conflict across the world where violence prevails. She will profess herself to be a shaman and sacrifice. A shaman mediates the sacred and the profane, and crosses the boundaries between life and death. Leather is taken from dead animals and therefore embodies death (corpses). Writing on corpses and overcoming death result in regeneration. From participants’ point of view, the death of the scapegoat (shaman) heals wounds and generates new life by reducing violence (violence and desires). The artist sometimes puts on such an emblem of death (leather inscribed with wounds and therefore a body of burning flesh and blood) as if it were clothing, and sometimes uses it as a blanket to cover herself. Sometimes it even works like a screen onto which the world’s agony, violence and disputes are projected.

In Greek, anaphora means remembrance and anamnesis means recollection – a memory deeper than remembrance, an archetypal memory, a memory of existence in its original state. In addition, hesychia refers to inner tranquillity. These three words are central to the work of Lee Minha and provide contextual insights based in humanities. It can be inferred that Lee aims to remind us of the archetypal existence while restoring and reconstructing the original state of existence. Only after we’ve experienced a process of self-reflection that forces us confront ‘true self’ (all of which perhaps leads to regeneration beyond death, and therefore can be seen as reform as well as cleansing rituals), can we regain inner tranquillity. Art is a narrative technique. The act of writing stories on leather can be compared to the act of writing a book. The book can be completed through the culturology of confessions that delicately weaves together the sacred and the profane, wounds and cures, violence and sacrifice (or Violence and the Sacred according to René Girard) as well as amusement and religious rites.

from the Solo Exhibition Catalog September. 2017

5th Solo Exhibition – Anamnesis

* English information follows.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5번째 개인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5명의 외국인 참가자들과 함께한 프로젝트의 4K영상 작품과 오브제를 중심으로 선보입니다.

오프닝 리셉션 : 2017년 9월 22일 (금) 저녁 5시
기간 : 2017년 9월 22일(금) ~ 10월 8일(일) 9:00~18:00 (휴관일 없음)
장소 : 인천화교역사관 1층 갤러리 (한중문화관 별관)

〒22314 인천광역시 중구 제물량로 238
Tel : 032-760-7860

오시는 방법 : 1호선 인천역 1번 출구로 나와서 도보 약 6분 소요


Minha LEE 5th Solo Exhibition – Anamnesis

Opening Reception : 22th September (Fri.) pm. 5
22th September (Fri.) ~ 8th October (Sun.) 2017, Open / 9:00~18:00
at Incheon Korean-Chinese Cultural Center 1F Gallery

(22314) 238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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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Jung-gu, Incheon, Korea
Tel : +82-32-760-7860

6 minutes on foot from Incheon Station  (1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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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L – Low, High and Narrow Room

기획전 ‘낮고 높고 좁은 방’

구로공단과 한국 근대화를 상징하는 가리봉 벌집(쪽방촌)과 지금의 청년세대가 겪는 불안정 주거공간이 이어지는 고리를 탐색하기 위한 전시를 기획했습니다.

전시기간 : 2017년 4월 7일(금) ~ 4월 28일(금)
오픈행사 : 2017년 4월 7일(금) 오후 5시
관람시간 : 10:00 ~ 18:00 (일요일 휴관)
참여작가 : 김덕희, 김미라, 김보경, 김정은, 유한이, 이마로, 이민하, 정희우

기획 : 이민하
주최 : 구로문화재단
후원 : 구로구, gallery ARTD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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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L – Low, High and Narrow Room

Artists : Kim Doki, Kim Mira, Kim Bokyong, Kim Jungeun, Yoo Haney, Lee Maro, Lee Minha, Jeong Heewoo

Opening Reception : 7th April (Fri.) 5pm
Period : 7th April (Fri.) ~ 28th April (Sun.) 2017

Time : 10:00~18:00  Close / Sun.
at Gallery Guruji (Guro Community Center 1F)

Curated by Lee, Minha
Organized by Guro Cultural Foundation
Supported by Guro-gu, gallery ARTDock

(08301) 1F, Guro Community Center, 21, Gamasan-ro 25-gil, Guro-gu, Seoul, Korea
Tel : +82-2-2029−1700

At the bus stop which goes out of the 4th exit in Daerim station route 2/7, and it’s the second by Guro 10 bus, getting off or 15 minutes on foot

Hang-dong Art Rail Project 2015

2015.6.18

구로문화재단 주최로 오류2동에 있는 푸른수목원 옆 항동철길에서 아트레일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작년의 ‘생각의 나무’팀과 했던 작업처럼, 이번에도 항동철길을 사랑하는 주민들이 모여서 커뮤니티 아트의 기초를 다지는 프로젝트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참가를 원하시는 분은 구로문화재단 02-2029-1736 문화정책팀 또는 저에게 연락주세요.

I’m participating an Hang-dong Art Rail Project as art director with Guro Cultural Foundation.

http://cafe.naver.com/communityartguro


Participatory Public Art Project 2014

2014. 11. 10

구로문화재단 주최로 무지개다리 사업의 일환인 시민참여형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 야외에 전시되어 있으니 많은 관람 바랍니다.

기간 : 2014년 11월 15일(토)~현재 상설전시중
장소 :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 야외
주최 : 구로문화재단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九老文化財団の主催で、市民参加型のパブリック・アート・プロジェクトを行いました。九老アーツバリー芸術劇場の野外で展示されておりますので、お近くにお越しの折は、是非お立ち寄り下さい。

A participatory public art project was performed by sponsorship of Guro cultural foundation. The artwork exhibited at the outdoors at Guro arts valley art theater, please come and see it.

Period : 15(Sat) Nov. 2014 ~ ongoing
Venue : Guro Arts Valley, Seoul, Korea
Organized by Guro Cultural Foundation
Sponsored by  Ministry of Culture, Sports and Tourism, Arts Council Korea

View Project

World Script Symposia 2014

2014. 10. 15

세계문자심포지아 2014 “문자를 맛보다”展에 참가합니다.
世界の文字祝祭2014 “文字を味わう”展に参加します。
I join the exhibition of World Script Symposia 2014 in Seoul.

https://ko-kr.facebook.com/scriptsymposia

기간 : 2014년 10월 24일 (금) ~ 11월 2일 (일) 10일간
장소 : 세종문화회관 야외 뜨락

24(Fri) Oct – 2(Sun) Nov 2014
at Sejong Center, Seoul, Korea

View Project

이민하 개인전 / Minha LEE Solo Exhibition – Anaphora

2014. 5. 20

이민하 개인전 / 李 旻河 個展 / Minha LEE Solo Exhibition – Anaphora

* English / Japanese information follows.

이번에 구로문화재단의 기획초대로 4번째 개인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오랜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해서 진행하는 첫 전시이니 많은 관람 바랍니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박사과정 졸업전에 선보였던 영상설치와 신작 영상설치를 중심으로 선보입니다.

오프닝 리셉션 : 2014년 5월 30일 (금) 저녁 5시
기간 : 2014년 5월 30일(금) ~ 6월 29일(일) 10:00~19:00 (월요일 휴관)
장소 : 구로아트밸리 갤러리 (B1)
〒152-842 서울시 구로구 구로동 101
Tel : 02-2029-1700~1
http://www.guroartsvalley.or.kr/exhibition/exhibition_view.asp?idx=66

오시는 방법 : 2/7호선 대림역 4번 출구로 나와서 구로10번 마을버스 승차 후 2정거장 또는 도보 15분


Minha LEE Solo Exhibition – Anaphora

Opening Reception : 30th May (Fri.) pm. 5~
30th May (Fri.) ~ 29th June (Sun.) 2014, Open / 10:00~19:00 Close / Mon.
at Guro Arts Valley Gallery (B1)

(152−842) 101 Guro-dong, Guro-gu, Seoul, Korea
Tel : +82-2-2029−1700~1
http://www.guroartsvalley.or.kr/exhibition/exhibition_view.asp?idx=66

At the bus stop which goes out of the 4th exit in Daerim station route 2/7, and it’s the second by Guro 10 bus, getting off or 15 minutes on foot


李 旻河 個展 – アナポラ

このたび、九老文化財団の企画招待で、4回目の個展を開催する運びとなりました。日本での長い留学生活を終え、韓国に帰国して初めて行う個展です。お近くにお越しの折は、是非お立ち寄り下さい。今回は、博士卒展でお見せした映像インスタレーションと、新作の映像インスタレーションがメインになります。

オープニング・レセプション : 2014年5月30日(金)5:00pm~
会期:2014年5月30日(金)〜6月29日(日) Open / 10:00~19:00 Close / Mon.
場所:九老アーツベリーギャラリー (B1)
〒152-842 ソウル市 九老区 九老洞 101
Tel : +82-2-2029-1700~1
http://www.guroartsvalley.or.kr/exhibition/exhibition_view.asp?idx=66/

2/7号線、大林(デリム)駅の4番出口を出て、九老10番バスで二つ目のバス停で下車、または徒歩15分


2014.5 個展ー渇望、刻み込まれた「人間たる所以」の跡

李 旻河(イ・ミンハ):渇望、刻み込まれた「人間たる所以」の跡
朴 世姸(パク・セヨン、美術理論)

イ・ミンハは、紙と革に祈りを書く作業をして来た。そのために作家は多国語の祈りを収集し、それらを一文字ずつ筆写する。そしてその過程を経た画面には国家と宗派、人種を超えて集まった多様な言語の祈りが交差、重畳し創り上げられた多彩な形跡が残る。

このように祈りというテキストを用いて作業をしているため、一見既成宗教に対して表現しようとしたものように考えられるが、実際に作家が注目しているのは、「繰り返してある行為を行う人々の態度や心得」である。作家ノートによると「祈る」行為は、「聖」と「俗」という人間性のジレンマが表出される接点に見られ、人間なら誰でも自分の安慰を最優先にする本能を持っているが、それと共に利他的であり、より高い次元を志向する心も持っ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話だ。すなわち、作家は祈りの目的が世俗的なものであろうが、崇高なものを志向することであろうが、何かを切に求めて望む祈りという行為自体が持つ真実性に注目し、「祈り」を人間の本質、人間たる所為を最もよく表せるテーマであると想定したのである。

祈りを筆写するに至った過去の作品では、韓紙に筆と墨で繰り返し線を描いた作品がある。薄墨を重ね、反復する「線描」行為を通じて、作家は無我の境地に近い没入を経験し、反復行為の修行的な側面を自覚できたのであろう。筆写というものは、やはり昔から現在まで行われてきた宗教的な修練の一つの方法であるということを思うと、線描行為と経典や祈りを筆写する行為の類似性に着目し、現在の制作へ続いていることが分かる。

最初、紙に鉛筆で筆写することで始まった作業は、その材料が革と焼きごてへと変わり、続けられてきた。興味深いところは、材料を紙から革に変えたきっかけが、狂牛病に関するニュースだったということだ。人間のために大量殺肉される動物を見て、人間性を失っていく過程を見たのである。また作家は昔から疎かにあしらわれ賎民の業であった革産業に内包された差別と抑圧の歴史まで思い浮かべる。このような連想作用は、作家がこれらの問題を始め、戦争や宗教紛争など、人間たる所以とその喪失について感心も持ち、悩んで来たことが素地になっている。

鞣した牛や豚、羊革の上に焼きごてで祈りを焼き刻む作業。革の上に熱くなった焼きごてで焼き刻むと、革が焼ける臭いと煙が生じるが、作家はその臭いと煙から戦争や飢餓、虐殺などの問題を思い出す。聖なる祈りを筆写すると同時に肉が焼かれる臭いが生じる。そさらに革を焼き刻み、文字を刻印して行く過程は破壊的な性格を帯びている。このように矛盾した属性が生じる点が、作家が感心を持っていた複数の問題を喚起させ、祈りの筆写作業は続いていく。

作家は、作業過程を通じて経験し、感じたものを観客と共有するために、様々な試みを行ってきた。観客の前で公開制作をし、観客が直接感じるようにしたり、作家の代わりに筆写する装置を考案し、設置された完成作品と共に作業が進行していく過程を見せたりした。今回の展示では、観客が作品を体験できる独立した空間を演出したが、暗い密室のように造り上げた空間の中に入ると、大きなスクリーンが見え、そこに人体のシルエットが巨大に映される。スクリーンに近付いていくと、腕と手の動きに注目できるが、このシルエットは、革に祈りを筆写する作家のものであると推測できる。もし意識できなくても、暗い空間に映された映像の光と静けさの中で、何処からか聞こえてくる風の音、何かを繰り返して書いている巨大な人影の前で、一人で立っている観客は、様々な感覚が敏感に反応し、その時間と空間の中で作品を余不足なく経験できるように導かれる。

今回の展示タイトルである「アナポラ(Anaphora)」は、「思い出すこと(ἀναφορά)」に由来し、修辞技法の中で首句反復を意味する。作家は引き続き祈りを筆写する行為を繰り返し、同時にその行為を通じて人間の本質に対する問題を思い出させたいという意図を含めている。そして上記で言及した映像インスタレーション作品は、「内的平安」という意味の「へシュキア(Hesychia)」という作品名で、俗世に足を掛け生きている人々に精神的な高揚を通じ、内的平安を経験できればという希望的な願いを込めている。

イ・ミンハは、線の濃淡効果を焼きごての温度と筆写する際の手の圧力で調整して出しているが、ひとつひとつ、焼きごてを当て痕跡を残していく作業方式は、水墨画の濃淡表現や一筆書きとの類似点が感じられる。このように伝統絵画の経験を活かしながら、革と焼きごて、映像インスタレーションなど、様々な媒体へと拡張していく彼女の作品の行方は今後どうなるだろう。古代人が燔祭壇を設け、生け贄を焼き、天に捧げる祭祀儀式を通じ、神との疎通を試みたように、作家は革に祈りを焼き刻むことを通じて世と疎通しながら、より高い次元との疎通を熱望しているかもしれない。このような熱望がこれからも表現の方式に拘泥されること無く、発現されてゆくことを期待する。

2014年5月、グロアーツベリーギャラリーでの個展リーフレットから抜粋

2014.5 개인전 평문 – 타는 목마름, 아로새겨진 인간됨의 흔적

이민하: 타는 목마름, 아로새겨진 인간됨의 흔적
박세연(미술이론)

이민하는 종이와 가죽에 기도문을 쓰는 작업을 해왔다. 이를 위해 작가는 다국어로 된 기도문을 수집하고 그것을 한 글자 한 글자 필사(筆寫)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친 화면에는 국가와 종파, 인종을 초월해서 모여진 다양한 언어의 기도문들이 교차하고 중첩되면서 만들어낸 다채로운 족적이 남겨진다.

이렇게 기도문이라는 텍스트를 가지고와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일견 기성 종교에 대해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사실 작가가 주목한 것은 ‘반복해서 어떤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태도나 마음가짐’에 있다. 작가 노트에 따르면 ‘기도’하는 행위는 ‘성(聖)과 속(俗)’이라는 인간성의 딜레마가 표출되는 접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와 함께 이타적이고 보다 높은 차원을 지향하고자하는 마음 또한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즉 작가는 기도의 목적이 세속적인 것을 지향하든 숭고한 것을 지향하든 무언가를 간구하고 소망하는 기도라는 행위 자체가 가지는 진실성에 주목하였고 ‘기도’를 인간의 본질, 인간다움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테마라고 상정하게 된 것이다.

기도문을 필사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화선지 위에 붓과 먹으로 반복해서 선을 그었던 작업을 볼 수 있다. 담묵을 중첩해서 반복하는 선 긋기 행위를 통해 작가는 무아지경에 가까운 몰입을 경험하고, 반복 행위의 수행적인 측면을 자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필사라는 것 역시 예부터 현재까지 행해지고 있는 종교적인 수련의 한 방법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선을 긋는 행위와 경전이나 기도문을 필사하는 행위 사이의 유사성에 착안하여 현재의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 종이에 연필로 필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작업은 그 재료가 가죽과 인두로 바뀌어 진행되어 왔다. 흥미롭게도 종이에서 가죽으로 재료를 변경하게 된 것은 광우병에 대한 뉴스를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인간을 위해 대량 살육되는 동물들을 보며 인간성이 상실되어가는 과정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또한 작가는 예부터 천대받고 하위 산업으로 여겨진 가죽 산업에 내포된 차별과 억압의 역사까지 떠올린다. 이와 같은 연상 작용은 작가가 이러한 문제를 비롯하여 전쟁과 종교 분쟁 등 인간다움과 그 상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고민해왔던 것이 바탕이 되었다.

무두질 처리가 된 소가죽이나 양가죽 위에 인두로 기도문을 새기는 작업. 가죽 위에 뜨겁게 달궈진 인두로 지지면 가죽 타는 냄새와 연기가 나게 되는데 작가는 이를 통해 전쟁과 기아, 학살 등의 문제를 떠올린다. 성스러운 기도문을 필사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살이 타는 것 같은 냄새가 나고, 이렇게 가죽을 지져서 태움으로써 글자가 각인되는 과정은 파괴적인 성격을 띤다. 이러한 모순적인 속성이 생겨나는 지점이 작가가 관심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환기시키면서 기도문의 필사 작업은 계속 이어져 간다.

작가는 작업과정을 통해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관객과 공유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왔다. 관객들 앞에서 공개제작을 해서 관객을 직접참여하게 하고, 작가를 대신해 필사하는 장치를 고안해서 설치되어 있는 완성작품과 함께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을 볼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관객이 작품을 체험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을 연출하였는데 어두운 밀실같이 조성된 공간 안에 들어서면 커다란 스크린이 보이고 거기에 인체의 실루엣이 거대하게 비춰져 보인다. 스크린에 다가갈수록 팔과 손의 움직임에 주목하게 되는데 이 실루엣은 가죽에 기도문을 필사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일 것이라 짐작 가능하다. 이를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어두운 공간에 비춰지는 영상의 빛과 고요함 가운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람 소리, 무언가를 반복해서 쓰고 있는 거대한 사람 그림자 앞에 혼자 서있는 관객은 여러 감각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작품을 오롯이 경험할 수 있도록 유도된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아나포라(Anaphora)’는 그리스어로 ‘기억해 내는 것’에서 유래했고, 수사학 기법 중에서 어두반복을 의미한다고 한다. 작가가 계속해서 기도문을 필사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동시에 그 행위를 통해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기억해내고자 하는 의도를 함의시켜 놓았다. 이와 함께 위에서 언급한 영상설치 작품은 ‘내적평안’이라는 뜻의 ‘헤쉬키아(Hesychia)’라고 함으로써 속세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신적인 고양을 통한 내적인 평안함을 경험했으면 하는 희망적인 바람도 담고 있다.

이민하는 가죽에 인두질을 하는 온도와 세기를 조정하면서 진하고 연한 효과를 낼 수 있고, 한 번의 인두질로 흔적을 남겨가는 작업방식에서 수묵화에서의 농담표현이나 일필휘지와의 유사함을 찾는다. 이렇게 전통회화에서 시작한 경험을 살리면서도 가죽과 인두, 영상 설치 등의 다양한 매체 확장으로 이어지고 있는 그의 작품의 다음 향방은 어떠할까. 고대에 번제단을 쌓고 동물을 태워 하늘에 바치는 제사 의식을 통해 신과의 소통을 꾀했듯이 작가는 가죽을 태워 기도문을 새기는 것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나아가 보다 높은 차원과의 소통을 열망하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열망이 앞으로도 표현의 방식에 구애됨 없이 발현되어 가기를 기대한다.

2014년 5월 구로아트밸리 갤러리 개인전 평문

2014.5 Solo Exhibition – Scorching Thirst, Vestiges of Engraved Humanness

Minha Lee: Scorching Thirst, Vestiges of Engraved Humanness
Seyeon Park (Art Theory)

Minha Lee has been engaged in the work of transcribing prayers on paper and leather by hand. Her work involves collecting prayers written in various languages and transcribing each letter by hand. The results are colorful vestiges of prayers in different languages, which intersect and overlap one another beyond the national, religious or ethnic barriers.

For their focus on prayers, the works of Minha Lee may be interpreted as expressions of established religions. Nonetheless, Lee’s artistic attention is focused on examining ‘the mind and behavior of those who devote themselves to repetitive actions’. In her notes, Lee claims that the very act of praying could be viewed as a point of contact for expressing ‘the Sacred and the Profane’, otherwise known as the dilemma of humanity. She argues that while it is a human instinct that we put our own safety and comfort above all else as a matter of foremost priority, we at the same time also have higher moral aspirations for altruism. In this respect, Lee is interested in the sincerity found in prayers of hope and entireties, whether or not their purpose is secular or sacred. According to Lee, a prayer is the most outstanding representation of humanness.

Lee’s earlier works, created prior to transcribing prayers, show repetition of drawing lines on JangJi(長紙), Korean traditional paper, using calligraphy brushes and ink. By repeatedly drawing lines in pale Indian ink, Lee must have been able to attain a spiritual state of perfect selflessness and experience the ascetic nature of such repetitive actions. Transcribing prayers has long been considered as a means of religious practice. Given this, there is a parallel between the act of drawing lines and transcribing prayers, and Lee has taken this similarity as her artistic motivation for her current work.

Initially she began transcribing in pencil on paper and then later proceeded to using other materials such as leather and a hand-held iron. Interestingly, Lee was inspired to switch from paper to leather after watching news about mad cow diseases. She witnessed a loss of humanity in the mass slaughter of animals for human benefit. Furthermore, Lee even reflects on the history of prejudice and persecutions imposed upon the leather industry that has been despised as a subordinate/untouchable industry. Such conscious associations are based on her deep-seated concern for the loss of humanity through conflicts such as wars and religious disputes.

The hot hand-iron transcribing work of prayers on tanned leathers of cow, pig or sheep produces a brunt smell and smoke, which then invoke the tragedy of war, hunger and massacre. The act of transcribing prayers by hand may look sacred but it gives off the smell of burning flesh. Therefore, the process of inscribing letters by burning leather is itself a destructive one. This paradoxical nature of the work reminds Lee of those issues she wishes to explore and pushes her to continue transcribing prayers.

Lee has made various attempts to share with her audiences what she felt and experienced during the creative process. She even held a public workshop where she invited spectators to participate in person. In addition, she installed a transcription device that allowed audiences to view both the completed work and transcription in progress at the same time. The current exhibition features an independent space for audiences to actively take part and interact with her works. Stepping into the dark, secluded room, audiences encounter a large silhouette of a human body projected onto a huge screen. As one approaches the screen, his or her attention is drawn toward the limbs. It is then assumed that the silhouette is an image of the artist transcribing prayers onto leather. Even those who fail to recognize this are led to respond to many sensory experiences, thus fully experiencing that very time and space as they stand in front of the silhouette of a large man amidst light and calm and hear the sound of the wind blowing from somewhere.

The title of the exhibition, ‘Anaphora’, is a word derived from Greek meaning ‘carrying back’. In rhetoric, an anaphora is a rhetorical device that denotes repetition at the beginning of clauses. It signifies the artist’s struggle to keep in mind the problems concerning human nature by transcribing prayers over and over again. In addition, by naming the aforementioned video installation work ‘Hesychia’ or ‘inner peace’, the artist hopes to let those living in the secular world experience inner peace through spiritual elevation.

Minha Lee is able to create light and strong effects by adjusting the temperature and pressure of her iron on leather. She finds similarities between this method of leaving an iron mark with a single stroke and the expressions of light and shade in ink-and-wash paintings as well as the process of writing with one stroke of a brush. What is next for this innovative artist, who has built upon her foundations in traditional art and expanded into various other mediums including leather, ironing, and video installations? Like the ancient ritual of presenting burnt offerings on altars in an attempt to communicate with gods, ,perhaps the artist yearns to achieve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r even some transcendental beings by burning leathers and inscribing prayers on them. In the future, I look forward to seeing her aspirations manifest themselves without the constraints of methods of expressions.

from the Solo Exhibition leaflet May.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