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이민하의 작품론: 지극한, 세계를 마주하는 (최윤정)

이민하의 작품론: 지극한, 세계를 마주하는

                최윤정 | 미술비평가 / 현 문화비축기지 전시담당주무관

  그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나는 나 스스로 가지고 있는 한계와 모순, 내재해 있을 폭력(가해/피해)과 방관자적 태도에 대해 짚어보는 상황에 직면했는데, 이는 이 비평에 임하는 나의 고된 과제였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세계와의 관계를 가늠하기 위해, 나에게 맞닿아 있는 사건 그리고 관계된 역사의 현상에 대해서 ‘나는 과연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이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하는 의문을 해결해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객관화하고자 애썼다. 그것은 지난한 노력이었으며, 결국 그의 작업이 내게 준 과제는 인간의/스스로의 고(苦)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내 안으로 좁혀오는 이 물음은 결국 어떤 상황 속에서 발생한 타인의 감정들을 ‘너는’ ‘기억하고’ 공감할 수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되묻는 기분이었다. 이는 그의 작업이 나에게 던져준 메시지다.

그나마 ‘명료해지는’ 것은 나에게 구체적으로 닿는 ‘감각’을 혹은 ‘기억감정’을 되새기는 일이었다. 문득 수년 전 작가가 자신의 개인전 명칭으로 사용했던 ‘Palimpsest’(복기지, 양피지 위에 쓰여진 글을 긁어내고 재활용한 고문서)를 떠올렸다. 지우되, 남은 옅은 흔적 위에 중첩하여 기술한 내용은 차별과 폭력의 역사, 인간을 바라보게 하는 거울이 되었다. 내게는 이민하의 전 작업의 맥락을 가늠하는 중요한 열쇳말이 되어준 용어다. 다시금 그것은 벌어진(은폐되고, 방관된 형식으로) 상황(역사, 사건)에 마주한 인간의 심리,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작가의 해석이자 형식이었고, 그의 실천을 이끌었다.

개인전 《팔림세스트(Palimpsest)》(2013)에서 작가는 여러 나라의 기도문이 새겨진 가죽을 씨실과 날실로 엮어 망토를 만들어 직접 입었다. <기도문을 입다>(2009)는 마치 작가의 연속될 작업에 대한 하나의 예고편으로 읽혀진다. 그 씨실과 날실이 풀어져 학살과 분쟁이 벌어지는 세계의 지도 <그을린 세계>(2018-2019)가 되기도 하고, 차별의 역사 속에서 고통받는 누군가의 증언 <아남네시스(Anamnesis)>(2017)와 <제물>(2017)이 되기도 한다. 기도의 행위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구원을 향한 인간의 외침은 연민의 감정과 절박함에 대한 상황을 상기하게 한다. 작가에게 종교적 관심 이상으로 ‘기도’의 행위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하나의 기제가 된다. 사적인 이익을 희망하거나 혹은 신념과 신앙 사이에서 경건하고 올곧은 외침으로 드러나거나, 기도란 인간의 나약함과 강건함, 속된 욕망과 고결함, 고통과 희망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인간의 중층적 측면들이 복합적으로 응축된 행위다. 손을 모으고 하늘을 향하고 고개를 숙이는 기도의 몸짓형상은 성스러우면서도 짐짓 약자일 수밖에 없는, 혹은 그저 비통하고 고통스러운 인간의 존재적 한계를 연상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습관/습성의 일부이자, 몸짓형상이 표출되는, 외부적 자극인, 어떠한 상황들과 관계하므로 인간적 본성에 천착하는 작가의 시선은 마땅히 그 상황을 좌시하지 않았다.

<아남네시스>(2017)에서 작가는 가죽을 덮어쓰고 있다. 그 가죽에 참가자인 이주여성들은 한국사회에서 겪은 차별의 경험에 대해 인두로 새긴다. 가죽 위에 인두로 ‘지진’ 글은 사라지지 않을 생채기를 내면서 동시에 그 상황을 이겨낼 내면적 힘을 구축하는 주문처럼 새겨진다. 그렇기에 가련하되 강건하다. 문제없이 흘러가는 듯한 주류사회에서 구체적인 개인들이 안고 있는 고통의 국면이 은폐를 벗어나 지워지지 않을 흔적으로 기록되고, 한 글자 한 글자 직접 써 내려가는 글은 비록 약자라도 상황을 직시하는 자로서 이미 강자의 폐부를 훑는 공격자가 되었음을 지지한다. 기록이 새겨지는 가죽을 덮고 작가는 눈을 감은 채 알몸으로 누워있다. 가죽 한 장의 두께 사이로 작가는 고스란히 그들 내부의 분노와 슬픔, 고통에 공감하는 몸을 표현한다. 번제의 의식을 빌어 그들의 감정과 생생한 증언을 경청하고 연대하는 몸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번제의 제물이 아니라 ‘증언을 증거하는 몸’이다.

주류사회의 폐부를 찌른다. 그가 여성 판소리꾼(권송희)의 제안으로 함께 협업한 <트리니티: 홍보가 다시쓰기>(2019)는 흥보가의 가사 일부를 현대적 언어로 바꾸어보고 그 향방이 ‘지금 여기’ 여성에 대한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주류사회의 시선과 다를 바 없음을 증명하는 작업이었다. 여성에 대한 발언과 행태, 비웃음과 조롱을 여전히 마주하지만, 그 곡을 다시금 판소리꾼이 정면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노래한다. 직시하고 분노하고 겁을 주는 표정으로 그 울림은 강력하다. (“물이고 가는 여자 귀 잡고 입 맞추고 다 큰애기 겁탈하고 수절과부 모함 잡고 길가에 허방놓고”_흥보가 / “길가는 여성한테 강제로 키스하고 여고생 강간하고 이혼녀에게 추근대고 구덩이를 파서…”_현대어 번역)

<인간보관용 콘크리트 박스>(2018)에서 작가는 한국의 산업화 시기 여공들의 숙소였던 가리봉 벌집(쪽방촌)을 무대로 현장에서 작업했던 내용을 토대로 하여, 장판지에 인두로 공간을 기록하고 연꽃을 새긴 설치작업을 보여주었다. 작가는 실제 비어 있는 가리봉벌집 쪽방 한 벽면에 지난 삶의 시간을 보여주듯 겹겹이 붙여진 벽지를 도려내면서 만다라 형상 <연꽃>(2017)을 새겼다. 연꽃은 고통 속에서 피워낸 인간의 삶을 어루만지며 그곳의 삶을 증언했다. 과거 여공들이 살았던 그 장소에, 현재는 노인들과 외국인 근로자들의 가난한 삶이 자리한다. 한국 주류사회의 내재화된 차별과 억압의 기제로 양산된 불안한 삶의 현실에 대해 작가는 관찰하면서 구조적으로 그 현상에 다가가고자 하였다. 때로는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가장 가까이에서, 때로는 객관화된 거리를 설정하여 모두가 바라보도록 조절하는/강제하는 시점을 택일하면서.

살이 탄다. 인두질로 타오르는 가죽의 냄새가 선연하다. 인간의 종교와 이데올로기로 얼룩진 갈등은 인간의 역사가 펼쳐진 이래 해결할 수 없는(혹은 해결하지 않을) 분쟁과 학살의 국면을 만들어왔다. 작가는 우연히 시리아 등지에서 분쟁지역의 사람을 만난 계기로 스스로 증폭된 관심을 확장하여, 세계 각지의 분쟁과 학살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설계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리서치를 구체화해왔다. 2018년 시작된 <그을린 세계>(2018)는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을 범위로 다루었고, 불도장을 통해 각 사건의 좌표마다 짧은 문구의 기도문을 쾅쾅 찍으며 내리 새겼다. 객관화된 시선으로 시점은 저 멀리 관찰자이거나, 전지적 단계에서 세계를 관망하는 사이를 이끈다. <그을린 세계>(2019)는 그 규모를 확대한다. 좌표는 미대륙은 물론 호주의 아파르트헤이트 문제까지 확장된 형태로 종교분쟁, 인종차별, 침략의 역사, 영토분쟁 등 인간 본성을 의심케 하는 극단적 갈등상황을 다루고 있다. 좌표가 설정된 플로터가 멈추는 자리마다 인두도장을 대신한 레이저 마커가 잔 불꽃과 함께 진한 연기를 내며 짧은 문구의 기도문을 새긴다. 이 장면은 확대된 화면으로 생중계되는데, 마치 포화의 장면으로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을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 항공 촬영으로 응시하는 것과 같은 충격을 만들어내었다. 글로 나열되어 기술된 분쟁과 전쟁에 대한 기록은 이민하의 작업에서 공감각적이고 입체적 실체로 시각화된다. 플로터에 새겨진 좌표는 작가의 시선이 출발하는 곳이자 집중하는 지점이고, 그곳에 상징적으로 새겨진 기도문은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의 절박함과 국가가 국가의 명분으로 자행하는 잔인한 폭력성을 잊지 않고자 하는 시선을 견지한다. 가죽으로 겹쳐진 세계지도 위를 가르며 새겨지는 기도문에 폭력의 역사와 상황들이 상기되는, 보면 볼수록 마음이 편치 않다. 그 곁에 <상흔>(2019)이 자리한다. 이 작업은 바로 내가 직시할 수 있는 근접한 거리에서 절박함과 비통함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인간의 껍데기를 형상화한다. (어쩌면 ‘기도’라고 표현했어도 좋았을 작업이다) 이 작업은 비애의 몸짓을 연구하면서 젖은 가죽으로 특정 신체의 마네킹을 활용해 캐스팅한 작업이다. 가죽의 껍데기가 마치 얼굴 없는 유령처럼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되 속은 비어있다. 그 공란에 기도를 읊조리는 소리, 고통을 한탄하는 듯한 웅얼거림이 머무는 듯하다. 형상의 주름들 속에서 그 소리는 삭혀져 분위기로 뿜어진다. 주변의 사람이 혹은 나의 모습이 가깝게 연상되는,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장면을 작가는 그렇게 펼쳐놓았다.

살이 타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마지막으로 나는 인두로 필사하는 작가의 작업과정 속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주목해본다. 차별, 갈등, 분쟁과 학살 등 인간의 가장 모자란 지점에서 나타나는 파멸의 행위들, 이를 증언하고 고통에 마주하는 강건한 힘, 동시에 나약한 순간 행해지는 인간의 기도. 일종의 제의적 작용으로 ‘피어오르는 연기’는 작가의 지향점을 모아내는 상징이자 장치가 된다. 상처를 각인하고 기억하기 위해 재기술해가며 고통을 발언하는 과정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란, 인간의 삶을 어루만지며 고통의 정서를 순화하고 공감과 연대에 대한 감각을 전염시키는, 가장 원시적이며 초연한 힘을 쥐고 있다. 죽은 가죽에 새살이 돋을 리 없지만 그렇기에 가죽에 새겨진 기록은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나약한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국면을 형성한다. 비록 인간의 본성이 진흙탕을 구른다고 해도 그럼에도 우리는 고결함을 지향점으로 삼아 희망을 품고 사는 존재가 아니던가. 문득 그의 탐구가 결국 ‘인간’에 대한 지극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느 시간 우리의 진한 대화 속에서 건진 놓을 수 없는 단초였다.

(인천아트플랫폼 2019 레지던시 결과보고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