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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7 공공(public)의 기억을 소환하는 기념비적인 내러티브 (마동은)

공공(public)의 기억을 소환하는 기념비적인 내러티브

마동은, 대구미술관 전시기획팀장

2021년 여름,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개최된 이민하의 개인전 《검은 씨앗》에서는 그동안 작가가 꾸준히 확장시켜왔던 가죽에 인두질을 하는 작업 외에 방법론적으로 처음 시도한 사운드 설치 작품 <습작>(2021)이 공개되었다. 칠흑 같은 어두운 방 안에 오롯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작가의 목소리에 온 감각을 집중시키게 하는 이번 작품은, 대전시 동구 낭월동에서 시작되어 베른부르크 안락사 센터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어진 일종의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작업이었다.

작가의 작은 독백으로 시작하여 실제 전시실내 설치된 사이렌을 통해 온 공간을 공습 소리로 에워싸며 절정에 이르게 하는 이 작업은 지극히 주관적인 작가의 해석을 기반으로 작품의 내러티브를 구축해 나간다. 그러나 실상 작품의 내용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작가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닌 공공의 성격을 띤 기념비적 기시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역사적 기억에 대해 재조립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과 ‘기념비’, 이번에 처음 시도한 작가의 사운드 설치 작업에 대해 필자가 내세운 주제어이다. 필자는 이번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층위의 이면을 떠올리며,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기억(memory), 기념적인(memorial), 기념비(monument), 기념비성(monumentality) 등의 개념이 그의 작업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 되짚어 보고자 한다.

기념비는 고대 라틴어의 어원처럼 ‘기억나게 하는 것’ 혹은 ‘기념하는 것’이라는 원초적인 기능을 함의했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며 기념비는 그 개념과 실제에 있어 급격한 변환을 맞이한다. 공통의 가치나 이상을 추구하고자 했던 기념비의 전통적 개념이 양차 대전을 겪으면서 근대라는 시기와 불가피하게 충돌하게 된 것이다. 이는 정치적 기억의 교차점이라는 기념비의 태생적 특성에 20세기의 미적 혹은 사회정치적 변환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던 결과이다. 시대의 변화로 인해 파편화되고 혼성적인 상태가 지속될수록 이 사회는 이질적인 경험과 개인의 기억에 공통적 가치를 부여하며 공통된 공간(물리적 혹은 비물리적 공간)에 통합될 것을 요구받는다. 이로써 이미 공유된 신념이나 공통 관심사의 부재 속에 공공적 이슈를 담은 작품은, 흩어져 있는 대중을 공통된 시공간으로 안내하는데, 여기에서 기념비는 공통의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관객에게 공동의 기억이라는 일루전을 선전한다. 이민하 작가가 홀로코스트라는 주제를 기저에 놓고 작업을 시작했을 그 순간부터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미 공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작가는 잔잔하고 낮은 목소리로 베른부르크 안락사 센터와 아우슈비츠에 대한 기념비적 독백을 이어간다. 그의 독백은 과거의 상황을 현재적 장소에 집중시키는 고도의 상징적 행위이다. 한 두 개의 단어와 짧은 문장 그리고 그 내용을 전하는 목소리만으로 관객은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념비’ 혹은 ‘기념비적인 무언가’가 가지는 또 다른 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그의 첫 사운드 설치 작품을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작업으로 소개한 것일까?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기억을 소환시키고자 한 것일까?

일반적으로 홀로코스트와 같은 기념비적 내용을 앞세울 때에는 그것의 동기가 명확하고, 그 기념비가 생산해내는 여러 기억의 종류들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거나 다양하다. 어떤 기념비는 기념하는 대상에 대해 대중으로 하여금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요구를 하기도 하고, 반면 어떤 기념비는 한 국가, 한 민족의 과거를 스스로 설명하라는 요구를 받기도 한다. 또 다른 기념비는 다음 세대를 교육하고 그들에게 공동의 경험과 깨달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기도 하며, 극히 일부이지만 심지어 어떤 기념비는 단순히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의도에서 탄생하기도 한다.

한 예로, 미국에서는 홀로코스트를 기념하고자 하는 동기가 미국을 구성하고 있는 다국적의 인구만큼 복합적인 것이어서, 고상하면서도 냉소적이고 실용적이면서도 미학적이다. 그러나 이민하의 기념비 – 필자는 그의 작품 <습작>을 일종의 기념비라고 칭하고 싶다 – 는 매우 명료하고 효율적이다. 그의 기념비는 흔히 상상할 수 있는 풍경 속에 자리하며 흡사 박제물과 같은 기념비가 아닌, 시공간을 초월해 신경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지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무형의 기념비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습작>의 독백에서, 오랜 시간 내전으로 황폐해진 시리아의 길거리에서도, 골목마다 기관총을 들고 서 있는 다마스쿠스의 군인들을 지나치면서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일종의 두려움을 대전 골령골에서 처음 경험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나의 민족, 나의 국가에 대한 역사라는 것이 그에게 더 남다른 현장감을 주었던 것일까? 자신의 옆에 누가 있는지조차 전혀 알 수 없는 어두운 방 안에서 작가의 목소리만을 귀 기울이며 집중한 사람이라면 이내 그가 느꼈던 두려움을 찰나의 순간 공감했을 것이다.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의 영문과 교수이면서 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 문화적 기억과 관련된 분야를 활발히 연구하고 있는 제임스 영(James E. Young)은 ‘불가능한 영속성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의 사회적 이해관계들을 포괄하면서 시간적으로도 확장 가능한 기념비가 필요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 특히 기념비의 제작 동기와 과정, 제작 이후 관람자의 반응 등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맥락을 밝히면서 기념비의 기능에 있어서 대중과 사회적 기능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기념비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의 삶과 공동체 정신 속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위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행위의 중심에는 대중(관객)이 있다. 작가의 작품이 온전히 완성되기 위해서는 이 기념비적 작품이 관객에게 진실되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실 기념비에 대한 시각은 매우 다양하다. 앞서 언급한 제임스 영이 기념비의 당위성을 염두해 두고 이론을 펼쳤다면, 미술사학자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근대 시기에 만들어진 기념비들이 순수한 지표로서 자신을 초월하는 그 어떤 것도 언급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추상적이고 자기 창조적인 기념비는 외부에 존재하는 사건을 기념할 수 없으며 그것은 단지 전위된(dislocated) 기호라고 본 것이다. 또 더 나아가 기념비가 공동체의 기억 작용을 밀어내고, 공공의 기억을 자신의 물질적 형태로 고정시킴으로써 그것을 보전하는 대신 완전히 대체한다는 주장도 있다. 피에르 노라(Pierre Nora)는 기억이 내부로부터 적게 경험될수록 그것은 외부의 비계와 외적 기호를 통해 존재하게 된다’라고 경고했고, 안드레아스 후이센(Andreas Huyssen)은 심지어 현대의 대량 기억 생산과 과거의 기념비화, 그 관조 및 연구 사이에는 반비례 관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들은 기념비적 형식을 일단 대중의 기억에 부여하고 나면 대중은 어느 정도 그 기억에 대한 의무를 벗어버릴 수 있다는 전제를 가정하고 있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미술계는 추상적 형태의 기념비가 이 사회가 품고 있는 공공의 문제와 이상적인 가치를 재현하는데 더 효과적이라는 의견으로 잠식되어 가고 있다. 이민하 작가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물성으로서의 작품의 외형을 탈피하고, 인간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청각과 상상력에 의지하여 형체가 없으며 빠르게 확산시킬 수 있는 사운드 매체를 이용해 이 기념비적 작품을 제작했다.

이번 출품작은 제목 그대로 습작이다. 앞으로 작가는 더 발전된 방식으로 사운드 설치 작업을 선보일 것이다. 그 작업의 주제가 여전히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공공의 기억을 건드리는 방향으로 이어진다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후에는 작가 스스로에 의해 반(反)기념비적인 작품이 또 하나 탄생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

(2021년 7월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진행한 개인전 <검은 씨앗> 도록에서 발췌)

2021. 6 이민하: 학살과 출산 사이 (양지윤)

이민하: 학살과 출산 사이

양지윤 (대안공간 루프 디렉터)

   글로벌화된 현대미술계에서, 대안적 세계사 또는 지역사를 담아내는 예술가의 시선은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아왔다. ‘세계사’라고 불리는 거대 서사에서 벗어난 예술가 개인들의 역사 해석과 기록은 예술가가 취할 수 있는 자유의 상징이자 예술의 사회적 역할의 일환이다. 대규모로 생산되고 유통되는 문화 산업 사회에서, 사투리의 질감과 뉘앙스가 갖는 특유의 아름다움처럼 예술은 기능하곤 했다.

   이민하의 <그을린 세계> (2018-2019)에는 대형 크기의 소가죽이 세계 지도로 잘려져 벽을 메우고 있다. 세계적인 대학살이 있었던 지역의 좌표 64곳를 찾아가 인두로 낙인을 하나씩 찍어 내린다. 아파르트헤이트가 있었던 남아프리카, 나치즘이 있었던 독일 등 인종 차별과 종교 분쟁, 인간의 잔혹함의 역사가 있었던 곳에 짧은 문구가 가죽을 태우며 새겨진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키리에 엘레이손 기도문이 곳곳에서 타들어간다.

   작가의 이전 작업에도 인두질한 가죽은 주요한 소재로 등장했다. 인두질한 가죽은 노예에게 낙인을 찍던 과거의 관습과 맞닿아 있다. 작가는 그 관습 자체가 ‘배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가죽에 대한 관심의 시작은 2008년 5월의 광우병 촛불집회였다. 작가는, 광우병의 원인이 가축 부산물들을 사료에 섞어서 먹이면서 발생한 유전자 변형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시장의 효율성만을 지향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들어낸 자연의 변이였던 것이다. 관객은 가죽이 타들어가는 냄새를 맡으며, 시스템에 의해 죽어갔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을 떠올린다.

   이는 ‘여성적 예술’의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작가만의 대응이 된다. 백인과 유색인, 인간과 비인간, 여성과 남성 같은 이분법적 구분이,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구체화한 현실임을 드러낸다. 차별에서 출발한 이데올로기는 결국 모두를 파국으로 치닫았다. 이민하는 분석적 시선으로 시스템을 조망하며, 거북한 역사적 진실들을 꿰어 맞춘다.

   신작 <Passages>는 이민하 작가가 임신 8개월이던 당시 촬영한 퍼포먼스 영상이다. 4명의 퍼포머는 가부장제 시스템 속 제 가족과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한다. 성소수자임을 숨겨야 엄마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레즈비언, 한국인 아내의 임신을 원하지 않았던 우크라이나 출신의 젊은 남성. 자신의 이야기를 먹으로 써 내려가고, 작가의 배에 패턴을 그린다. 그리고 작가는 글을 씻어 내린 물을 마신다. 고대의 출산 자세를 한 작가의 얼굴에 우유가 부어진다. 그리고 5명은 돼지 껍데기로 만든 얇은 가죽 속으로 웅크리고 들어가듯 기어들어가, 새로운 연대, 또다른 가족이 만들어진다.

   1983년 바버라 크루거는 나뭇잎으로 눈을 가린 젊은 여성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흑백 사진 위에 <우리는 당신의 문화에 대해 자연의 역할을 하지 않겠다 We won’t play nature to your culture>라고 적는다. 작가는 남성 대 여성의 대립, 자연 대 문화의 대립과 같은 문화적 형태들을 구조화하는 이항 대립을 전면화했다. 이는 근대 세계의 형성과 관계 맺고 있는 서유럽 세계관과 근대 과학의 형성 과정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2021년 이민하의 임신한 예술가의 몸을 주제로 하는 작업 <Passages>는 이러한 이항 대립 다음의 질문을 한다. 사실 출산은 페미니즘 연구에서 불편한 주제였다. 1970년대 이래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여성을 생물학적 성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새로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 무수히 많은 연구와 사회적 투쟁을 했다. 이때 출산은 여성의 생물학적 재생산을 근원적으로 상징하는 주제이기에,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 <Passages>는 출산을 둘러싼 인류학적 의식들을 연구하면서 제작되었다. 생물학적인 것으로만 여겨졌던 임신과 출산, 육아의 과정이, 가부장제 속 다양한 사회적 의식으로 여성을 가치 매김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미투운동으로 새로운 지평을 만난 한국의 페미니즘 예술은, 남성과 여성의 대립에 집중하던 과거를 넘어서 인간해방이라는 보편적 지평으로 담론이 확장되어가는 중이다. 페미니즘 예술이 자연 속의 인간이라는 관점까지 확대되어가는 흐름 안에서, 이민하의 작업은 새로운 질문들을 던진다. 한국 여성 예술가가 국제적인 학살 지역에 관한 예술 작업을 만들 때, 그의 관점은 어떤 특수성을 가질 수 있는가. 게이와 이주노동자와 함께 자신의 출산을 기록한 예술가의 퍼포먼스는 가부장제 시스템에 어떠한 대응을 만드는 예술 행위인가. 현재 진행형인 이 질문은, 현대 미술사의 순간들과 함께 또 하나의 특정한 기록으로 남는다.

(2021년 6월에 진행한 그룹전 ‘삼중점’ 도록에서 발췌)

2020. 10 전시리뷰: 순리를 지키는 공증 (이지민)

순리를 지키는 공증

이지민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1958년부터 1960년까지 3년간 중국인 3,000만 명이 아사한다. 북한 총인구수보다 많은 수치다. 이는 마오쩌둥이 쓰촨성 농촌을 시찰하던 중 곡식을 쪼아 먹는 참새를 보고 화를 내며 던진 한마디의 말 ‘저 새는 해로운 새다’의 파장이었다. 이후 구성된 ‘참새 섬멸 총지휘부’가 참새를 닥치는 대로 소탕하자 해충이 창궐하게 되어 생태계가 무너지게 되면서 농작물이 초토화되고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된 것이다. 독일 3 제국 최대 규모의 강제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에서는 유대인을 비롯한 동성애자, 장애인 등 나치즘에 반대하는 자들이 대량 학살된다.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자마다 논란이 지속 중이지만 수용소에서 학살당한 유대인 수만 350만여 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학살은 실로 다양한 방법으로 고안되며 창의성과 폭력성 그리고 야만성의 경계를 오갔다. 그중에서도 살인 주체인 군인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안으로 마련된 방책은 그들만의 목적으로 인본주의를 거스르며 정당성을 확보했다.

위 사건들은 이민하의 드로잉 시리즈 <수 없는 재난과 한 생명의 태어남>으로 실현된 이야기 중 일부다. 양 또는 염소 가죽을 인두로 지져 타들어 가는 흔적으로 그려낸 드로잉은 작가의 관심으로부터 출발한 다양한 화두를 시각화하며 1940년대 폴란드와 독일의 정치·사회적 사건으로부터 2011년 동일본 대지진까지 약 70년에 걸친 역사를 소환한다. 이 작업을 마주하기 전에는 높이가 4미터에 달하는 대형 설치 <선홍빛 장벽>을 거쳐 가게 된다. 전시장의 벽면을 유럽풍 무늬의 벽지로 뒤덮은 다음 세 명의 여성이 파고 긁어내며 특정 문양을 형성한 입체 작업이다. 그 문양은 불교에서 우주의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도형화한 원형의 불화인 만다라(Mandala)를 닮았다. <수 없는 재난과 한 생명의 태어남>과 <선홍빛 장벽>은 지지고 긁어내는 행위를 통해 발현된 결과물로 매우 정교한 정성과 다소 긴 작업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작가는 작업 과정을 오체투지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하며, 기존의 작업 행보도 ‘제의적 형식’이라는 프리즘으로 읽혀 왔다.

<선홍빛 장벽>전을 관람하고 나서 이번에는 작가의 행위, 주제, 메시지를 특정 방법론으로 명제화 하기보다, 작가가 선택한 물질과 도출된 시각 이미지가 서로 공존하는 영역에 집중해보기로 한다. 동물의 가죽에는 돌이킬 수 없는 그을림을 내고, 깨끗하게 벽을 포장한 벽지는 칼로 찢어 흠집을 내면서 작가는 상처를 박제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그를 위로하는 정신을 팽팽하게 공존시킨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자신의 실천을 뒀다. 늘 쉽게 잊혀 버렸거나 왜곡되고 감춰져 온 신호들을 드러내기에 힘 써온 작가는 결과 양산보다는 그 지표에 직접 부대끼는 몸부림을 선행해 왔다. 수시로 차오르는 문제의식을 외면할 수 없어 자신의 몸으로 예술이 실현할 수 있는 국면을 전개해온 것이다.

이민하의 작품에서 다뤄지는 모든 사건이 한 곳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아채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작가의 본능적 순리는 멀끔한 공공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작품의 배경이 되는 일련의 사건들로부터 알 수 있듯이 기형적인 퇴행의 신호들은 우리를 둘러싼 상식을 훼손하고 있다. 작가가 지키려는 순리에 가해지는 위협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리의 지평에서 작가는 작업의 결과가 또 다른 제도와 논리로 굳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경계해온 신호들과 표현의 극한은 획일화라는 범주로 묶이면서 같은 오류를 범하게 되기 때문에 더욱 실천의 과정이 중요해진다. 작가의 실천은 스스로를 관통하면서 작품 내에서 정직한 기준이 되어 일종의 공증으로 기능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점점 상처에 무감각해지고 있다. 예측 불가능한 자극의 지속 때문이다. 이민하의 상처내기/위로하기 중심의 영역에서 그의 공증 지표를 따라 각자의 행동력을 발휘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가로막는 덫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보자. 그러면 작가 그리고 우리가 지키려는 순리를 만나게 될 것이라 기대한다.

(2020년 10월 이민하 개인전 전시리뷰 – 동무비평 삼사 원고 발췌)

2019. 11 The Devotion to the World in LEE Minha’s Art (Choi Yoonjung)

The Devotion to the World in LEE Minha’s Art

 CHOI Yoonjung | Art critic, Chief Curator at Oil Tank Culture Park

  Exploration into LEE Minha’s works led me to face my own limitations and self-contradictions, along with any inherent violence (as both the offender and victim) and negligent attitude. This discovery was the biggest challenge in writing this criticism. I felt as though I had to answer the question of how I see the events around me and related phenomena throughout history, and what I am doing about it in order to gauge my relationship with the world I inhabit. Thus, I gave my best efforts to be as objective as possible, a task that proved most arduous. Ultimately, the artist works tasked me with answering the question on what attitude we must take on in looking at the labors of humanity and myself. As this question besieged my innermost thoughts, it was like asking myself if I were capable of remembering and empathizing with the feelings of others as they go through certain situations. Such was the message that her works delivered me.

At the very least, my endeavors to recollect specific senses and memory-emotions had a certain clarity to it. I suddenly remembered Palimpsest (named after the archaic lambskin manuscripts that had the original writing effaced to make room for later writings). The text overlaid atop the faint remnants of scraped off letters served as the mirror of the human history of discrimination and violence. The reference to this recycled parchment became a keyword for me to determine the context of the artist’s previous works. This was her interpretation and modus operandi for studying human psyche and nature when faced with exposed (albeit in concealed and neglected ways) situations (history and events), which in turn drove her to take actions on her own terms.

In her solo exhibition Palimpsest (2013), she wove together bits of leather inscribed with prayers written in different languages, and donned the resulting cape held together by weft and warp. Vested in Prayers (2009) is read like a preview of sorts on her following works. When the weft and warp come undone, the leather patches become an atlas of a world rife with massacres and conflict, as seen in The Scorched World (2018 – 2019), or the testimony of someone suffering through the history of discrimination as in Anamnesis (2017) and Immolation (2017). The act of prayer “Kyrie eleison,” this human cry for salvation reminds us of the emotions of compassion and the direness of the situation. For the artist, “prayer” goes beyond an element of religious behavior to serves as a mechanism for studying human nature. Whether it is derived from the desire to achieve personal gains or the reverent, righteous plight borne of conviction and faith, prayer is a concentration of many complex layers of humanness, incorporating both human weakness and strength, avarice and nobility, anguish and joy. The physical symbol of clasping hands together while bowing the head appears sacred yet vulnerable, evoking the tragically painful limitations of human existence. As a part of conventional human habits and behavior, prayer is related to certain situations wherein bodily movements are generated or respond to external stimulations. As a close observer of human nature, the artist does not remain a mere spectator to such situations.

In Anamnesis (2017), she is shroud in leather. Migratory women participate in the work by branding the leather covering her with their experiences of being discriminated against in Korean society. The act of branding the leather with indelible marks appears akin to inscribing runes with spells that would grant these women the internal fortitude to overcome their difficulties. Therefore, these women are frail yet strong. As the sufferings of individuals disregarded by mainstream society leave permanent marks, each letter transforms these weak victims into the attackers now, exposing the skeletons in the closets of the powerful. Under the leather being branded, the artist lies naked with her eyes closed. With merely a sheet of leather between her and the women, she expresses the rage, sadness, and suffering of the women through her body. The artist appropriates this ritual of making an offering to listen to the women’s emotions and vivid testimonies, sharing the experience with her body. In this work, the artist’s body does not simply serve as a sacrifice of atonement, but also becomes ‘a body as a living proof of the testimonies’ of the women.

Her works expose the ugly underbelly of the mainstream society. At the suggestion of the pansori artist Song Hui Kwon, the artist collaborated on Trinity: Rewriting the Heungboga (2019) to rewrite the lyrics of the pansori piece into modern Korean and prove how the world portrayed in the song is little different from today’s mainstream society rife with discriminatory and violent perspective on women. Although the work still addresses both verbal and physical patriarchal abuse of women as well as the ridicule involved therein, they are delivered by the pansori artists who sing directly into the camera. Their expressions of range and intimidation resound potently throughout the work, piercing directly into the hearts of the modern audience: “You grab the woman carrying well-water back home by her ear, kissing her. You rape a nearly grown-up girl, you frame widows and dig traps on the road” – original Heungboga; “You forcibly kiss women on the street, rape high school girls, hit on divorced women and dig up holes…” – modern translation.

In A Concrete Box for Human Storage (2018), the artist presented a new installation work featuring a lotus flower design. Based on the Garibong Honeycomb slums where Korean women factory workers lived in the early phases of the Korean industrialization, this work takes the form of floor matting branded with the blueprints of the slum housing. The artist preceded this work by carving up the wallpaper of an actual house in Garibong Honeycomb to create the mandala design in Lotus (2017). As if representing the lives of previous incarnations, the mandala lotus addresses the suffering of those who once lived in the neighborhood. In place of Korean women factory workers, the neighborhood is now inhabited by impoverished senior citizens and foreign laborers. By observing the realities of life generated by the mechanisms of discrimination and oppression inherent in mainstream Korean society, she sought to step structurally closer to the phenomenon. Sometimes that meant searching around her immediate vicinity, while at other times she had to choose a point of perspective that would adjust or enforce a certain distance to ensure objectivity.

Burning flesh. The stench of burning branded leather fills the air. Stained by religion and ideology, human conflict has led to unresolvable (both intentional and not) disputes and massacres throughout history. When the artist happened to meet someone from the Syria Conflict, she built upon her interest in human conflict to further engineer her perspective on conflicts and massacres around the world, conducting specific research to underpin this effort. The Scorched World (2018) initially covered Europe, Africa, and Asia in 2018. Each point of coordinates marking a conflict zone was branded with a short prayer. The work presents the audience an opportunity to act as a distant observer that monitors the world from an omniscient point of view. The following year, the artist expanded the scope of The Scorched World (2019). The coordinates include the Americas as well as Australia, to address the apartheid issues in the latter. The work addresses cases of extreme conflict such as religious disputes, racism, history of invasion, and territorial disputes that lead one to question human nature itself. Each time the plotter stops at the designated coordinates, a laser marker substitutes a branding iron to inscribe a short passage of prayer, creating little flames and thick smoke in the process. Broadcasted live on an enlarged screen, the scene is as shocking as observing an air strike in a conflict zone via an airborne infrared camera. The written records of conflict and war evoke various emotions and become visualized as three-dimensional constructs in her work. The coordinates marked by the plotter are where the artist begins her investigation, the locus of her focus. The prayers symbolically branded therein demonstrate the direness of the conditions thrusted upon the people in those locations, and highlight the awareness on the cruel violence conducted by the state in the name of the state. Observing how these prayers unfold the leathery atlas evoke images of violence in human history in an increasingly unsettling manner. Next to this work is Stigma (2019), providing at such close proximity the representation of the shell of humans who can barely carry themselves throughout their despair and anguish (perhaps “Prayer” could have been an appropriate title as well). A study on bodily movements associated with grief, this work casts wet leather into the form of a specific body’s mannequin. Although the leather shell is shaped like a person, it is faceless, like a phantom that merely mimics the human form. It feels as though the muttering of prayers and cries of anguish echo within the empty cavity of that shell. Such sounds of lamentation are muffled within the wrinkles in the leather, only to be expelled into the surrounding ambience. In this work, the artist unveils an unsettling picture that nobody really wants to witness due to such uncanny resemblance of themselves or their acquaintances.

Burning flesh and smoke. Lastly, I would like to focus on the “billowing smoke” as a result of transcribing with iron in her work. Amidst the destructive behavior stemming from humanity’s ugliest facets—discrimination, conflict, and massacre—prayer arises as both a testament to human resilience and admission of our own frailty. In such context, the “billowing smoke” in her works plays a sort of a ritualistic role to serve as a symbol and mechanism that captures the quintessence of her pursuits. Created throughout the process of sharing and recording our deepest scars in visual manifestation, the smoke holds a primitive yet transcendental power to heal and ameliorate our pain while infectiously spreading the desire to empathize and bond. While dead leather cannot heal with new flesh, that very finite character of leather provides a new form of manifesting the frail human nature alongside the billowing smoke. Although human nature is often found rolling around in a cesspool, humans are also creatures who strive towards their best and most noble selves in pursuit of hope. Perhaps the artist’s explorations are ultimately motivated from her extreme devotion to humanity. And this was a clue I dare not miss in my deep conversations with the artist.

(This article is extracted from <IAP Residency Annual Report 2019>)

2018.11 Science of fire, embodied language, and “ unforgettable things” (Namsoo Kim)

Lee Minha: Science of fire, embodied language, and “ unforgettable things”

Namsoo Kim, Choreography critic

 

#1. “Light plays upon and laughs over the surface of things, but only heat penetrates.” (Gaston Bachelard, Psychoanalysis of Fire)

#2. “If the nature of such life or moment required that it be unforgettable, that predict would imply not a falsehood but merely a claim unfulfilled by men, and probably also a reference to a realm in which it is fulfilled: God’s remembrance” (Walter Benjamin, The Task of the Translator)

By presenting a form of intentional anachronism Lee Minha’s work reminds me of the artwork of the ancients, who have been banished into the future (the present). The work is archaic in style, as if it were scooped out of the historical tides of time, and brings forth a sacred language, not decorative, into the present, as “grand marks carved in the sky” and “the scribbles of the language of god”. What does it mean to recollect the sacredness of the past in this hyper-connected, mega-machined society? Which aspects of this contemporaneity in the artwork harnesses a form of sacredness, which is sometimes not unlike the ideology and business of religion? Lee’s work is a vivid example of a “secret treaty between the primitive and now”—a form of contemporaneity espoused by Giorgio Agamben. The work ties different eras together and make a tight knot, reminding us of a Gordian Knot that leads to a unified spirituality, not an insoluble mystery. A sudden appearance of an enigma, so to speak.
Tanning of sheepskin and inscribing text with a heated iron on the smooth surface is considered as a vernacular practice, and it is now treated as an ancient tradition before the modern era, from which it takes place. Not unlike shepherds who lived in caves and nomads of the nomadic era, something once visible disappears into an invisible realm. In this respect Lee Minha is a very special visionary who shows what has disappeared. According to Collin Wilson, a “visionary” starts from a point where anyone can understand, and jumps to a higher realm where the ordinary cannot reach”. She opens the hidden dimension as a visionary in the dark, by writing the life of the other side through a science of fire. The opening and closing of the hidden dimension is most prevalent in deserted sites. This is why the wilderness holds a special space in Lee’s work.

What Lee Minha is performing in her work is not a simple scorching nor branding of text onto leather. Here is an artist who desires (if this can be named) to willingly sacrifice herself in exchange for visualizing Gnosis, or knowledge of spiritual mysteries. Lee takes risks when engraining the existential condition in her work because it requires not only skillful hands or technical gestures, but the artist as an empirical self who endlessly throws herself into a kiln. A recognition, that a life of a scapegoat and that of a human are not just marked as equal, but are considered equal, makes this self-immolation possible. It is impossible to bring the hidden dimension forward without a sacrifice.

An artwork that is technically seamless indicates nothing more than its being taken into the fold of the fabrication of the modern era. Meanwhile, Lee Minha struggles and gives herself up to the expression of text as marks from the hands of god to the realm of the mortals. The concept of exchange bridges a sublime infinity and the limited.

 

#3. “In order to satisfy the Arabs, the enclosed space must have (…) an open view..” (Edward Hall, The Hidden Dimension)

As a philosopher once said, “language is the house of being.” Lee Minha dwells in language. To be specific, it is the language of a larval-subject [sujet larvaires, Gilles Deleuze]. The ‘larval-letter’ crawls and roars — like Roaratorio by John Cage — and its calligraphy wiggles and squirms. The strokes of the letter, the tracks and the traces are signs of its vitality (also its angle and direction). The larval-letter shouts out into the direction of a fork — this way!— as if to engrave the eternal trace of the way. Some letters that once belonged to god cannot be pronounced.

Therefore, ‘the house’ is a place to return to. When one is born ‘the presence’ is blessed and anointed, but we all forget their faceless beings — pristine, unrefined yet chaotic, without characteristic eyes, noses, and mouths. The house is a place for seeds where all the beings gather to recover their original existence, prior to language or the texture of things. Lee Minha writes stories and a history of people in a simple and clear language, with the power of fire and iron, so that the scorching sound and smell sends them back to ‘the house’. This is what ‘the house’ is for.

The above is one possible thought for the reason why artist Lee Minha attempts to reveal gnosis, or spiritual knowledge, by scorching sheepskin with an iron like a tanner. However, the method, ironing as a fruit of the science of fire (though modern science cannot answer to what fire really is) is another aspect of the work that deserves attention. The artist imprints text on sheepskin with an iron heated by the fire of god—instruments from an ancient era. Yet, unlike palimpsest, her inscription is conducted once and for all. Written without corrections, the work is a book written with the language or science of fire. Consequently, all living beings have a place to return, ‘the house’ that will last, and the history of a visionary that reveals this hidden dimension continues. Hence, Lee’s work requires us to see it with a dimension of myth and adventure. It is inevitable, in regards to the spiritual aspect of the work.

Ironing, in the work of Lee Minha, is not of light but of heat that penetrates. This heat recalls a scorching sound on skin, the burning smell and pain from a collective unconscious passed down from the ancient age and the medieval age. On the surface of textured sheepskin, the chronicling of a collective memory is revealed. It forms a tableau the artist works on that carries archetypal memories accumulated under the skin. The surface bears traces of life, its hardship, and the ethical imperative of remembering. This is only possible within ‘god’s remembrance’ (Walter Benjamin). In this regard Lee’s work is accompanied by a religious aspect. Those who bear every corner of life—some would dare call it empathy—, from its unfolding, its severe depth, and its ups and downs, come closer to a Leibnizian concept of god. Therefore, it is god who is confessing—some confessions are divine.

 

#4. “Looking for one’s own nothingness in a fire that speaks of human greatness.” (Empedocles)

The topology of Lee Minha’s work contains the following: Even a divine being needs a specific context, foreshadowing, and allegory in order to present itself in front of today’s human spirit — in layers and plys, immediacy and presence, olfactory minds, and things highly Gnostic. Things that become gradually outdated and discarded within the waves of New Media art. In a time of New Media that replaces older forms of media the artist suddenly and conspicuously summons the primitive sign of the medium. She does so as if she argues that all lives are immortal, and thus should not be forgotten. It is as though she testifies that what lasts in memory is a sign that teaches us immortality. “It is a life that without monument, without memory, perhaps without witness, must remain unforgotten. It cannot be forgotten. (Walter Benjamin, An Aesthetic of Redemption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4), 44). An absolute positivity lies deep inside the marks made through the science of fire, and appears as a transcended negativity – like that of a phoenix.

 

“ I blinked my eyes in a sandstorm and I was at Incheon.”

“A heartless act is only selfish and self-satisfactory”

“In fact I long for people deep in my heart”

“My marriage demanded me to live in a different way”

“Discriminations surged my life like rustling paper”

 

Lee Minha’s work is tinged with a religious promise, like the story of a human who jumps into the flame and is revived like a phoenix with the signs and marks of eternity. There is a tacit implication that an unforgettable essence works as a measure of intensity. In the project Anamnesis (2017) the artist lies down like a tableau in which the ironing is symbolically performed, and in which diverse stories of those from different regions are incised like aphorisms in their own foreign languages. In that moment the body of the artist is the Tower of Babel, as ‘the house’ where heterogeneous language returns. Lee provides her own body as a room for dispersed languages to gather to become spiritual seed. The body is simultaneously the flesh of the scapegoat, a body in flames, and a pile of ash. In the next moment, it rises as another life form from its ashes. It is “a bird of fire” for Gaston Bachelard, and for Lee, it “recollection”. Why does she recollect? Perhaps it is because of Gnosis - the fact that one, like everyone else becomes a phoenix when one realizes it. Through the ritual of sacrifice and by the science of fire, language is embodied onto flesh, appearing as the phenomenon of ‘recollection’.

In some projects Lee Minha not only performs the imprinting of text but also intones the text, bringing it into the present. By her chanting, text becomes alive with flame—it is not canned and preserved. Then, the text resonates within the space of the shepherd’s expansive cave, or a medieval library with an expanded domed ceiling. By intoning while transcribing, the very basis of recollection, the artist creates an acoustic image, opening a dimension that is both visual and conceptual. The same happens in the movie, Diary of a Country Priest, by Robert Bresson—in the scene in which a young priest of declining health writes his diary in agony—, the sentence is written on the blank space of the scene as it is read with a voiceover. The subtitles of the movie visualize the sentence, written once again. Listening to what is verbalized with one’s own voice is the foundation of an unforgettable life, and a life that is revived from the echoing of space. This spatiality is revealed in the performance of the artist.

Every life is a voyage to an ocean of pain. It is not a surprise when one encounters heavy storms—becoming nearly shipwrecked. This agony gets caught up in a vicious circle of the neoliberal agenda. Despite all this, Lee Minha does not attempt to resists the social. Rather, she argues that we can replace our existing sets of mentality with a completely new Tabula Rasa, transcribing what has been forgotten in the deep oblivion. Furthermore, she argues that this needs to be recollected. Why? Because this cannot be forgotten in the first place. Though life may be a moment in time, it is not meaningless —the instant, anonymous, ephemeral moment, are themselves signals of eternity. The temporality of the moment are captured and materialized by the language of fire. It is embodied by becoming a part of oneself, rather than through others. Because in navigating an ocean of pain through Gnosis, one might fall into an aimless religious routine, Lee asks us to see the essence of life as physical sensation, self-sacrifice, recollection and revival. No, she sends shock waves.

I would like to pose this question once again. Why does Lee Minha pursue her own spiritual language, in her work, by scorching sheepskin like a tanner? Iron has the concentrated power of fire on its tip, not unlike St. Elmo’s fire. As if Magellan’s fleet encountered the phenomenon in which a lightning strike created a glowing ball on top of the mast when they turned the corner through the vast Patagonian valley—following their destiny without any promise or religious faith. Allegedly, the crew prayed calling out the holy names of saints. Lee’s work provokes the same urge. God watch over us! Through the darkness a “muffled and distant, voice of god is unintelligible but resonates beyond the doors”. This is what we need to listen to, and burn with iron until it resonates. Iron has its secrets. A divine power is hidden at its tip as a ‘science of fire’ and with its concentrated power, drives life to be remembered forever, wherein each surface collides. Thus a “life unforgettable” is sensory. It follows the sensory channels.

The is the moment when a relief made by flames, appears and can be sensed by a primitive instinct. As I continue to ponder the Korean word, natanada (to appear), I am wrapped by a sensation of divinity all around – that which expresses itself in a language of “fire,” “smoke” and “smell”, in Lee’s work. Surrounded by five senses, we inhale the heat of life, the burning smell, and it’s stimulant all at once. All this is inevitable, in work of Lee Minha.

(MMCA Residency Goyang)

2019. 11 이민하의 작품론: 지극한, 세계를 마주하는 (최윤정)

이민하의 작품론: 지극한, 세계를 마주하는

                최윤정 | 미술비평가 / 현 문화비축기지 전시담당주무관

  그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나는 나 스스로 가지고 있는 한계와 모순, 내재해 있을 폭력(가해/피해)과 방관자적 태도에 대해 짚어보는 상황에 직면했는데, 이는 이 비평에 임하는 나의 고된 과제였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세계와의 관계를 가늠하기 위해, 나에게 맞닿아 있는 사건 그리고 관계된 역사의 현상에 대해서 ‘나는 과연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이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하는 의문을 해결해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객관화하고자 애썼다. 그것은 지난한 노력이었으며, 결국 그의 작업이 내게 준 과제는 인간의/스스로의 고(苦)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내 안으로 좁혀오는 이 물음은 결국 어떤 상황 속에서 발생한 타인의 감정들을 ‘너는’ ‘기억하고’ 공감할 수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되묻는 기분이었다. 이는 그의 작업이 나에게 던져준 메시지다.

그나마 ‘명료해지는’ 것은 나에게 구체적으로 닿는 ‘감각’을 혹은 ‘기억감정’을 되새기는 일이었다. 문득 수년 전 작가가 자신의 개인전 명칭으로 사용했던 ‘Palimpsest’(복기지, 양피지 위에 쓰여진 글을 긁어내고 재활용한 고문서)를 떠올렸다. 지우되, 남은 옅은 흔적 위에 중첩하여 기술한 내용은 차별과 폭력의 역사, 인간을 바라보게 하는 거울이 되었다. 내게는 이민하의 전 작업의 맥락을 가늠하는 중요한 열쇳말이 되어준 용어다. 다시금 그것은 벌어진(은폐되고, 방관된 형식으로) 상황(역사, 사건)에 마주한 인간의 심리,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작가의 해석이자 형식이었고, 그의 실천을 이끌었다.

개인전 《팔림세스트(Palimpsest)》(2013)에서 작가는 여러 나라의 기도문이 새겨진 가죽을 씨실과 날실로 엮어 망토를 만들어 직접 입었다. <기도문을 입다>(2009)는 마치 작가의 연속될 작업에 대한 하나의 예고편으로 읽혀진다. 그 씨실과 날실이 풀어져 학살과 분쟁이 벌어지는 세계의 지도 <그을린 세계>(2018-2019)가 되기도 하고, 차별의 역사 속에서 고통받는 누군가의 증언 <아남네시스(Anamnesis)>(2017)와 <제물>(2017)이 되기도 한다. 기도의 행위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구원을 향한 인간의 외침은 연민의 감정과 절박함에 대한 상황을 상기하게 한다. 작가에게 종교적 관심 이상으로 ‘기도’의 행위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하나의 기제가 된다. 사적인 이익을 희망하거나 혹은 신념과 신앙 사이에서 경건하고 올곧은 외침으로 드러나거나, 기도란 인간의 나약함과 강건함, 속된 욕망과 고결함, 고통과 희망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인간의 중층적 측면들이 복합적으로 응축된 행위다. 손을 모으고 하늘을 향하고 고개를 숙이는 기도의 몸짓형상은 성스러우면서도 짐짓 약자일 수밖에 없는, 혹은 그저 비통하고 고통스러운 인간의 존재적 한계를 연상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습관/습성의 일부이자, 몸짓형상이 표출되는, 외부적 자극인, 어떠한 상황들과 관계하므로 인간적 본성에 천착하는 작가의 시선은 마땅히 그 상황을 좌시하지 않았다.

<아남네시스>(2017)에서 작가는 가죽을 덮어쓰고 있다. 그 가죽에 참가자인 이주여성들은 한국사회에서 겪은 차별의 경험에 대해 인두로 새긴다. 가죽 위에 인두로 ‘지진’ 글은 사라지지 않을 생채기를 내면서 동시에 그 상황을 이겨낼 내면적 힘을 구축하는 주문처럼 새겨진다. 그렇기에 가련하되 강건하다. 문제없이 흘러가는 듯한 주류사회에서 구체적인 개인들이 안고 있는 고통의 국면이 은폐를 벗어나 지워지지 않을 흔적으로 기록되고, 한 글자 한 글자 직접 써 내려가는 글은 비록 약자라도 상황을 직시하는 자로서 이미 강자의 폐부를 훑는 공격자가 되었음을 지지한다. 기록이 새겨지는 가죽을 덮고 작가는 눈을 감은 채 알몸으로 누워있다. 가죽 한 장의 두께 사이로 작가는 고스란히 그들 내부의 분노와 슬픔, 고통에 공감하는 몸을 표현한다. 번제의 의식을 빌어 그들의 감정과 생생한 증언을 경청하고 연대하는 몸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번제의 제물이 아니라 ‘증언을 증거하는 몸’이다.

주류사회의 폐부를 찌른다. 그가 여성 판소리꾼(권송희)의 제안으로 함께 협업한 <트리니티: 홍보가 다시쓰기>(2019)는 흥보가의 가사 일부를 현대적 언어로 바꾸어보고 그 향방이 ‘지금 여기’ 여성에 대한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주류사회의 시선과 다를 바 없음을 증명하는 작업이었다. 여성에 대한 발언과 행태, 비웃음과 조롱을 여전히 마주하지만, 그 곡을 다시금 판소리꾼이 정면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노래한다. 직시하고 분노하고 겁을 주는 표정으로 그 울림은 강력하다. (“물이고 가는 여자 귀 잡고 입 맞추고 다 큰애기 겁탈하고 수절과부 모함 잡고 길가에 허방놓고”_흥보가 / “길가는 여성한테 강제로 키스하고 여고생 강간하고 이혼녀에게 추근대고 구덩이를 파서…”_현대어 번역)

<인간보관용 콘크리트 박스>(2018)에서 작가는 한국의 산업화 시기 여공들의 숙소였던 가리봉 벌집(쪽방촌)을 무대로 현장에서 작업했던 내용을 토대로 하여, 장판지에 인두로 공간을 기록하고 연꽃을 새긴 설치작업을 보여주었다. 작가는 실제 비어 있는 가리봉벌집 쪽방 한 벽면에 지난 삶의 시간을 보여주듯 겹겹이 붙여진 벽지를 도려내면서 만다라 형상 <연꽃>(2017)을 새겼다. 연꽃은 고통 속에서 피워낸 인간의 삶을 어루만지며 그곳의 삶을 증언했다. 과거 여공들이 살았던 그 장소에, 현재는 노인들과 외국인 근로자들의 가난한 삶이 자리한다. 한국 주류사회의 내재화된 차별과 억압의 기제로 양산된 불안한 삶의 현실에 대해 작가는 관찰하면서 구조적으로 그 현상에 다가가고자 하였다. 때로는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가장 가까이에서, 때로는 객관화된 거리를 설정하여 모두가 바라보도록 조절하는/강제하는 시점을 택일하면서.

살이 탄다. 인두질로 타오르는 가죽의 냄새가 선연하다. 인간의 종교와 이데올로기로 얼룩진 갈등은 인간의 역사가 펼쳐진 이래 해결할 수 없는(혹은 해결하지 않을) 분쟁과 학살의 국면을 만들어왔다. 작가는 우연히 시리아 등지에서 분쟁지역의 사람을 만난 계기로 스스로 증폭된 관심을 확장하여, 세계 각지의 분쟁과 학살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설계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리서치를 구체화해왔다. 2018년 시작된 <그을린 세계>(2018)는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을 범위로 다루었고, 불도장을 통해 각 사건의 좌표마다 짧은 문구의 기도문을 쾅쾅 찍으며 내리 새겼다. 객관화된 시선으로 시점은 저 멀리 관찰자이거나, 전지적 단계에서 세계를 관망하는 사이를 이끈다. <그을린 세계>(2019)는 그 규모를 확대한다. 좌표는 미대륙은 물론 호주의 아파르트헤이트 문제까지 확장된 형태로 종교분쟁, 인종차별, 침략의 역사, 영토분쟁 등 인간 본성을 의심케 하는 극단적 갈등상황을 다루고 있다. 좌표가 설정된 플로터가 멈추는 자리마다 인두도장을 대신한 레이저 마커가 잔 불꽃과 함께 진한 연기를 내며 짧은 문구의 기도문을 새긴다. 이 장면은 확대된 화면으로 생중계되는데, 마치 포화의 장면으로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을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 항공 촬영으로 응시하는 것과 같은 충격을 만들어내었다. 글로 나열되어 기술된 분쟁과 전쟁에 대한 기록은 이민하의 작업에서 공감각적이고 입체적 실체로 시각화된다. 플로터에 새겨진 좌표는 작가의 시선이 출발하는 곳이자 집중하는 지점이고, 그곳에 상징적으로 새겨진 기도문은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의 절박함과 국가가 국가의 명분으로 자행하는 잔인한 폭력성을 잊지 않고자 하는 시선을 견지한다. 가죽으로 겹쳐진 세계지도 위를 가르며 새겨지는 기도문에 폭력의 역사와 상황들이 상기되는, 보면 볼수록 마음이 편치 않다. 그 곁에 <상흔>(2019)이 자리한다. 이 작업은 바로 내가 직시할 수 있는 근접한 거리에서 절박함과 비통함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인간의 껍데기를 형상화한다. (어쩌면 ‘기도’라고 표현했어도 좋았을 작업이다) 이 작업은 비애의 몸짓을 연구하면서 젖은 가죽으로 특정 신체의 마네킹을 활용해 캐스팅한 작업이다. 가죽의 껍데기가 마치 얼굴 없는 유령처럼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되 속은 비어있다. 그 공란에 기도를 읊조리는 소리, 고통을 한탄하는 듯한 웅얼거림이 머무는 듯하다. 형상의 주름들 속에서 그 소리는 삭혀져 분위기로 뿜어진다. 주변의 사람이 혹은 나의 모습이 가깝게 연상되는,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장면을 작가는 그렇게 펼쳐놓았다.

살이 타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마지막으로 나는 인두로 필사하는 작가의 작업과정 속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주목해본다. 차별, 갈등, 분쟁과 학살 등 인간의 가장 모자란 지점에서 나타나는 파멸의 행위들, 이를 증언하고 고통에 마주하는 강건한 힘, 동시에 나약한 순간 행해지는 인간의 기도. 일종의 제의적 작용으로 ‘피어오르는 연기’는 작가의 지향점을 모아내는 상징이자 장치가 된다. 상처를 각인하고 기억하기 위해 재기술해가며 고통을 발언하는 과정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란, 인간의 삶을 어루만지며 고통의 정서를 순화하고 공감과 연대에 대한 감각을 전염시키는, 가장 원시적이며 초연한 힘을 쥐고 있다. 죽은 가죽에 새살이 돋을 리 없지만 그렇기에 가죽에 새겨진 기록은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나약한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국면을 형성한다. 비록 인간의 본성이 진흙탕을 구른다고 해도 그럼에도 우리는 고결함을 지향점으로 삼아 희망을 품고 사는 존재가 아니던가. 문득 그의 탐구가 결국 ‘인간’에 대한 지극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느 시간 우리의 진한 대화 속에서 건진 놓을 수 없는 단초였다.

(인천아트플랫폼 2019 레지던시 결과보고집에서 발췌)

 

2018. 11 불의 과학, 신체적 언어 그리고 “망각할 수 없는 것들” (김남수)

이민하 작가: 불의 과학, 신체적 언어 그리고 “망각할 수 없는 것들”

김남수(안무비평)

#1. “빛은 사물의 표면에서 놀고 웃지만, 열은 침투한다.” (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중에서)

#2. “만약 이 삶 혹은 이 순간이 본질상 망각되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이 술어는 오류가 아니라 어떤 요구, 인간들이 부응하지 못했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일 터(…) 이것은 이 요구에 부응했던 영역, 즉 ‘신의 기억’을 가리킨다.” (벤야민, 『번역자의 과제』 중에서)

이민하 작가의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저 아득한 태초의 시대로부터 고의적 시대착오를 범해 ‘오늘’이라는 미래로 귀양살이 나온 고대인의 예술 같다. 시간의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으로 잠수했다가 무엇인가를 건져 올린 듯한 그의 작업은 고대적이며 그의 작업이 마치 “하늘에 부조되는 장엄한 무늬”처럼 본래 장식이 아니라 “무늬는 신의 언어였다”라는 의미에서 신성한 언어를 현재화한다. 고대의 신성성을 이 초연결 메가머신 사회에서 호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종교의 주요 테마이자 심지어 장사수단이었던 신성성의 코드를 예술이 취했을 때 어떤 컨템포러리의 특질로 바라볼 수 있을까. 아감벤처럼 컨템포러리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민하 작가의 작업은 “고대와 현재 사이의 비밀조약” 같은 것의 살아있는 예가 아닌가. 그만큼 그의 작업은 시간적 매듭의 성향이 아주 강하며, 이 매듭이 재미있는 것은 하나의 풀 길 없는 금지의 매듭이 아니라 본래 하나의 통일된 스피리추얼로 되돌아가는 고르디아스의 매듭처럼 다가온다. 그 매듭의 엉뚱한 나타남이라고 할까.

양가죽 위에 무두질하고 그 매끄러운 표면 위에 인두질을 통해 불의 언어로 무엇인가를 적어 내려간다는 것은 굉장히 풍토적인 동시에 그 해당 풍토의 대지에서도 이제는 근대 이전의 전통으로 관리되는 고대적인 풍습이다. 동굴 속의 목자나 유목 시대의 노마드가 무엇인가 가시적인 것이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소멸하여가는 것, 그런 의미에서 아주 특별한 비저너리 – “‘비저너리’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에서 시작해 이내 일반이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곳으로 뛰어올라 버린다”(콜린 윌슨) – 라고 할 수 있다. 어둠의 공간에서 저편의 삶을 기록한다는 것, 그것도 불의 과학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비저너리로써 ‘숨겨진 차원’을 연다는 것이다. 이 ‘숨겨진 차원’의 여밈과 펼침이 가장 발달한 것은 사막이며, 이민하 작가의 작업에는 이 사막의 풍토성이 강하게 풍긴다.

단순한 인두 작업이 아니다. 화인으로 가죽 표면에 글자를 찍는 작업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영적인 지식, 일종의 그노시스를 나타나게 하려는 작가의 의지와 욕망 – 욕망 아닌 욕망 – 이 자기 투신의 형태로 개입하고 있다.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면서 자신의 실존적 상황 자체를 되먹임시키는 작업이다. 기술적으로 용인되고 향상되는 작업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경험적 주체가 무한루프로 되풀이 되풀이 부엌 아궁이 속에 넣어지는 작업이다. 이는 어린 양과 사람 목숨이 등가로 표기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사람 목숨이라는 등식으로 성립하는 인식론에서 비롯된다. ‘숨겨진 차원’이 나타난다는 것은 어린 양의 희생제 없이는 곤란하다.

무엇인가가 기술적으로 술술 잘 풀려나간다는 것은 근대적인 시스템 속에서 예술이 분화된 기술체계 내부로 포섭됐다는 의미밖에는 없다. 반면, 이민하 작가의 악전고투 같은 투신은 장엄한 무늬로서의 문자가 본래 신의 권능으로부터 인간의 영역으로 이전될 때 엄밀한 의미의 ‘관계 개념’으로서 한 개인의 삶을 희생하는 과정이다. 이 ‘관계 개념’은 제한된 어떤 조건이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무한과 직결되는 매개이다.

#3. “아랍인들을 만족시키려면 폐쇄된 공간은 (…) 탁 트인 전망이 있어야 한다.” (에드워드 윌슨, 『숨겨진 차원』 중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어느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이민하 작가의 머무름이자 거주함은 언어이다. 정확히는 문자로 달리는 애벌레 주체로서의 언어이다. 애벌레처럼 기어가는, 캘리그라피화되어 살아서 꿈틀대는, 그럼으로써 생명적인 으르릉거림 – 존 케이지의 <로라토리오(Roaratorio)>처럼 – 이 강렬한 언어이다. 아랍 문자, 한자, 가나 문자 등등 흐르는 문자들이 갖는 그 여정과 흔적이 그대로 생명성의 징후로 나타난다. 그때는 애벌레 문자가 나아가는 각도와 방향조차도 언어이다. 갈림길에서 이쪽이냐 저쪽이냐는 중대해진다. 그때 언어는 외친다고 할까. 이 길이다! 그 길 안에 이 삶의 영원한 무늬를 찍어 넣겠다며, 아니 넣겠다는 듯이. 어떤 문자는 발음할 수 없으며 본래 신이 쓰던 것이라고 한다.

그런 관점일 때, ‘집’이란 돌아가야 하는 곳이다. 이 세계에 나타날 때는 그 ‘나타남의 사건’이 축복받고 기름 부음 받지만, 우리는 본래의 그 무면목(無面目) – 창조된 원류 그대로 혼돈의 “이목구비 없는 얼굴” -을 잃어버리고 망각한다. ‘집’은 모든 존재자가 모여들어 그동안 그러모은 사물의 언어와 질감 대신에 존재라는 그 첫 번째의 의미를 회복하는 씨앗의 방이다. 이민하 작가의 인두 작업은 사람들의 내력과 사연이 간명하게 불의 권능으로 쓰여져서 소리와 냄새로 음미 되는 과정에서 ‘집’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거기에는 ‘집’의 전망이 있다.

이민하 작가는 왜 무두장이처럼 양가죽 위에 인두로 지지는 작업으로 자신의 영적인 지식, 그노시스를 표현하려고 할까, 라고 질문한다면, 위와 같은 대답도 가설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쓰는 인두라는 도구이자 머신이 하나의 불의 과학 – 현대과학은 이 “‘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아직도 묵묵부답이다 – 의 소산이란 사실을 살펴봐야 한다. 이 인스트루먼트가 고대적인 연원을 갖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민하 작가의 사용 방식은 양가죽 위에 겹쳐 쓰기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불로 그대로 텍스트를 초벌 찍기 하는 것이다. 불의 언어, 불의 과학으로 오류 없이 쓰이는 책인 것. 그러므로 모든 생명이 돌아갈 비전과 함께 ‘집’의 전망이 있고, 그런 ‘숨겨진 차원’을 가시화하는 ‘비저너리(visionary)’의 내력이 가능하다. 다만 그러므로 이민하 작가의 작업은 더 모험적이고 신화적인 수사의 세계에서 조망할 필요가 있다. 그 작업은 종교적 성향과도 잇대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요청은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이다.

이민하 작가의 인두는 빛의 작업이 아니라 열의 작업이다. 그 열은 “침투하는 열(熱)”이다. 그 열기는 사람의 피부에 치직거리는 음향과 살타는 누린내 그리고 고통의 상상력이 환기되는 고대와 중세로부터 전해진 집단 무의식의 기억이 있다. 이 기억의 연대기를 펼치는 것이 이리저리 굴곡진 양가죽 표면이다. 이는 피하지방 아래 무의식화된 원형질적 기억들이 오래된 여행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어떤 타블로 판 같은 것이다. 이민하 작가가 불의 열기로 작업하는 공간은 이 판이다. 판은 사람들의 삶의 얼룩과 신산 그리고 망각되어서는 안된다는 윤리적 요청들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의 기억’(벤야민)으로만 가능하다. 이민하 작가의 작업이 동행하는 종교성은 이러한 측면에서 추론된다. 모든 것은 펼쳐내고 그 펼쳐낸 삶의 가혹한 깊이, 사연 많고 하염 많은 삶의 기록, 감히 공감이라고 말하기 버거운 차원에서 그 모두를 감당해내는 것이 라이프니츠적인 의미에서 ‘신’이다. 그에 따르면, 고백하는 것은 ‘신’이며, 어떤 고백은 ‘신적’이다.

#4. “불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무(無)를 찾는 것, 이것은 인간의 위대함을 말해준다.”(엠페도클레스)

이민하 작가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위상학은 이런 것이다. 신 스스로 ‘오늘’이라는 정신의 한 인간이 거처하는 곳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이런 특별한 작업의 행간과 복선 그리고 알레고리가 필요한 것이라고. 겹과 켜, 직접성과 현전성, 후각적 정신과 고도의 그노시스 같은 것들. 지금에 와서는 미디어 아트의 맥락에서 떠내려가듯 점차 폐기되어버렸다고, 뉴 미디어가 올드 미디어를 구축하는 것처럼 괄호 쳐졌다고 믿는 시대에 이민하 작가는 돌연히, 돌올하게 그 미디움(medium)의 시원적인 기호를 다시 호출해버린다. 그것도 모든 삶은 불멸이며, 불멸의 삶은 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망각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불멸을 알게 해주는 기호라고 증언하는 것처럼. “기념비도 추억도 심지어 증인조차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망각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삶”(벤야민)이 있다. 이 탁월한 긍정성이 인두와 그 불의 과학이 남기는 낙인의 흔적으로서의 문자 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으며, 마치 피닉스처럼 부정성이 변환된 긍정성으로 출현한다.

“모래바람에 눈을 감았다 뜨니 인천이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행동은 이기적인 자기만족.”

“마음속에서는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결혼과 함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구받았다.”

“얇은 종이처럼 팔랑거리는 차별들이 내 삶에 팽배했다.”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인간처럼, 그럼으로써 피닉스와도 같이 되살아나는 삶, 거기에 영원성의 지표이자 무늬가 찍혀진다는 듯이 이 종교적 언약 비슷한 느낌이 이민하 작가의 작업에는 있다. 거기에는 망각할 수 없는 것의 본질이 어떤 강렬도의 척도로부터 작동한다는 무언의 암시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남네시스(Anamnesis)>(2017)에서 이민하 작가는 상징적으로 인두질이 일어나는 타블로 판처럼 누워 있으며, 다른 이방의 사람들이 가진 각자의 사연들이 제각각의 다른 문자 체계의 잠언적인 언어로 화인된다. 그때 이민하 작가의 신체는 문자와 언어는 다르지만, 다시 헤쳐모이는 ‘집’으로서 일종의 바벨탑과도 같다. 흩어졌던 언어들이 영적인 씨앗의 방으로 모음 되는 곳, 거기에는 이민하 작가의 신체가 제공된다. 이 신체는 어린 양의 신체인 동시에 불길로 휩싸인 신체이며 동시에 잿더미이다. 그다음 순간, 재 속에서 다시 살아 오르는 다른 생명체의 신체이다. 바슐라르는 이를 ‘불의 새’라고 봤으며, 이민하 작가는 ‘상기(想起)’라고 봤다. 무엇을 상기하는가. 자신이, 또한 그 누구나 알아차리면 ‘불의 새’라는 엄연한 사실, 그노시스를 상기하는 것이다. 불의 과학으로 쓰이는 신체적 언어는 이처럼 희생제를 통한 ‘상기’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어떤 작업에서 이민하 작가는 인두로 문자를 찍고 그 화인 작업을 현재화하는 동시에 그 문자를 읊기도 한다. 통조림 된 문자가 아니라 불로 살아있는 문자가 퍼포먼스가 되는 것이다. 이때는 거대한 동굴이나 궁륭공간이 높은 중세도서관 같은 공간성으로 공명하기 시작한다. 쓰면서 읽는 것, 청각적 이미지를 통한 시각적이며 개념적인 차원의 개방은 ‘상기’의 가장 기본적인 루프이다. 가령,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에서 건강이 좋지 못한 젊은 사제는 고뇌하면서 일기를 적는데, 일기는 빈 여백에 쓰이면서 동시에 보이스오버로 읽힌다. 그리고 번역되는 자막은 다시 이 일기 내용을 가시화한다. 자신의 성독(聲讀)으로 울려진 텍스트를 다시 자신의 귀로 듣는다는 것은 공명하는 공간 자체가 부활하는 삶, 망각될 수 없는 삶의 기초라는 것이다. 그 공간성을 이민하 작가는 자신의 퍼포먼스에서 드러낸다.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바다 위에서 폭풍우를 만나 난파 직전까지 몰리는 것이 일반적이며,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악마의 맷돌이 돌아가는 사회에서 가속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민하 작가는 그러한 사회에 대한 응전의 형식이 아니라 그러한 사회로 초기 세팅된 정신적 형식을 완전히 새로운 서판으로 바꿔치기하여 깊은 망각 속에 있는 것들을 기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니 ‘상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망각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덧없는 삶은 덧없지 않다는 것, 이때의 ‘덧’이라는 찰나지간, 익명성, 겨를 없음은 그대로 영원성의 표지이다. 그 자체로 ‘덧’의 시간성은 불의 언어로 고정되고 가시화된다. 아니 신체화되어 타인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이 된다. 그노시스의 알아차림을 통해 이 삶의 고해를 항해하자는 것이 자칫하면 종교적 관념의 틀 속에서 헐벗은 반복이 될 수도 있지만, 이민하 작가는 그 인두질의 신체적 감각, 희생제적 자기 투신, ‘상기’와 부활의 본질로서 삶을 다시 바라보기를 요청한다. 아니 충격파를 던진다.

다시 한 번 더 묻는다. 왜 이민하 작가는 무두장이처럼 양가죽 위에 인두로 지지는 작업으로 자신의 영적인 언어를 추구하게 되었을까. 여기서 인두는 그 금속의 첨점 끝에 마치 ‘성 엘모의 불’처럼 응결된 불의 권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끝이 없는 거대한 파타고니아 협곡 사이를 아무런 안전보장이나 믿음 없이 그대로 던져진 운명의 무늬처럼 항해해갔던 마젤란 함대가 어느 모퉁이에서 번갯불이 돛대 끝에 둥글게 맺히는 현상을 만난 것처럼 말이다. 그때 선원들은 성스러운 여성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했다고 하는데, 이민하 작가의 작업은 바로 그러한 충동을 자연스럽게 촉발한다. 신이시여! 우리를 굽어살피소서. 암(闇), “울울하고 암암할 신의 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문밖까지 울려 나온다.” 우리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 소리가 울려 나올 때까지 인두로 지져야 한다. 인두는 비밀스럽다. 인두의 그 끝에 도사린 어떤 신적인 권능이 ‘불의 과학’으로 잠재해 있으며, 그것의 응축된 힘이 어떤 표면과 만나 화인될 때는 삶을 망각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망각할 수 없는 삶”이란 감각적이다. 감각의 경로를 따른다.

불길의 부조, 그 나타남의 사건은 마치 저 아득한 태초의 감각으로 일어난다. 우리말 “나타나다”는 음미할수록 어떤 신성한 현현의 느낌을 안으로 감싸고 있는데, 이민하 작가에게는 “나타나다”라는 동사는 그대로 ‘불’과 ‘연기’ 그리고 ‘냄새’의 언어로 표출된다. 오감으로 뒤덮인 채, 우리는 삶의 뜨거움과 누린내와 각성제를 한꺼번에 들이킨다. 이민하 작가의 작업 속에서 이는 불가피하다.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비평모음집에서 발췌

2018. 11 이민하: 불로 쓴 말 (김도희)

이 민 하 : 불로 쓴 말

김도희 (작가)

1.  간곡한 바람은 언제나 반복적이다. 기도문 필사는 손을 움직임과 동시에 목청 아래로 지속적으로 발음을 내려 보내 몸속에 그 말이 깃들기 바라는 행위이다. 이민하의 불로 쓰는 말, 인두 필사는 추상적 개념의 메시지, 그리고 육신을 연상시키는 가죽, 언 듯 보아 이 같은 반대의 요소 사이를 오간다. 겉과 속, 바꾸어 말하면 외부와 내부, 또 다르게 말하면 그림자와 이데아계 사이에 통로를 내고 넓혀 선명하게 한다. 새겨지는 것이 표면 속으로 침투하고 겹쳐지고 파고 들면 스며든다고 바꿔 말한다. 종이가 기름을 만나면 투명해지고 열이 가죽을 만나면 그을음이 눌어 앉는다. 이민하의 작업은 이러한 상반된 요소 사이를 기도하듯 오가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겹쳐진 몸을 표현하는 것 같다.

 2.  손에는 열이 흐르는 인두가 쥐어져 있고 그 아래에 가죽이 펼쳐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인 인두가 가죽 표면 위에 글씨를 남긴다. 펜은 종이 위 마찰을 일으키며 잉크를 남기지만, 인두는 피시식 치직 연기를 피워 올리며 가죽을 태우고 흔적을 남긴다. 성경에서 십계명이 새겨지는 순간, ‘온 백성이 천둥소리와 번개와 나팔소리를 듣고 산의 연기를 보았다.’ (출애굽기 20:18-20). 십계명이 구전이 아니라 반드시 ‘번개와 연기를 동반하여 비석에 새겨졌다’며 성경에 새겨져야(필사) 했던 이유는 그제야 비로소 말씀의 힘이 강한 실재감을 일으켜 믿음을 고취시키기 때문이다. ‘있으라.’ 말씀 한마디로 현상계를 창조한 신의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산이 되고, 사람이 되니 ‘속’을 빚는 힘이다. 그런데 이 ‘말’이 현상계인 ‘속’이 되면서 한계와 모순은 시작된다. 이민하의 작업에서는 이런 모순된 두 가지 축이 엿보인다. 육신을 초월한 것에 닿고자 하는 마음이 한 축, 그리고 그러한 마음의 양상이 물질(육체에 기반 한 인간 실존)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파괴적 상황이 다른 한 축이다. ‘번제’는 그런 모순의 일례이다. 육신을 정화하고 신에게 닿기 위해 죄를 범한 자기를 죽이는 대신 죄 없는 짐승을 제물로 삼는다. 죽이고 피를 보고, 태워서 하늘로 상승하는 연기와 그 타는 냄새를 감상하며 그 염원이 하늘에 닿는 것처럼 느낀다. ‘아버지 제 몸이 타고 있어요!’ 소원은 고통이다. 갖지 못한 것에 관한 고통이 번제물을 통해 표현된다. 그렇게 따지면 번제는 하늘의 통각을 자극하려는 일이거나 나의 결핍에 따른 고통의 대리물을 찾는 행위이다. 번제물이 깨끗하고 순수할수록 그 고통이 강조된다.

그녀는 커다란 가죽을 입은 듯, 덮은 듯, 죽은 듯 누워있다. 고통 받는 여자들이 둘러 앉아 그 위에 인두로 상처 입은 마음을 말로 새긴다. 작가는 고통의 대리인이 되기 위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나사렛 예수처럼 가죽 아래에 누워있다. 예수가 당한 육체적 고통에 관한 묘사가 치밀하고 극적일수록 신의 사랑이 강조되는 아이러니. 필사를 하는 사람들의 고통, 가죽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강조될수록 그 아래 누운 예술가의 몸은 ‘번제물’로서의 순결한 매체가 된다. 메시지가 가죽의 타는 냄새와 소리로 치환되니 이것은 ‘번제’다. 현상계로 침투하는 주술적 힘을 상상한다. 참가자들의 주문과도 같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은 이교도의 주문처럼 들린다. 남겨진 가죽은 예수가 무덤 속에 남겨 두었다는 피 묻은 헝겊과 같이 실재 고통의 증거 ‘아나포라 Anaphora-기억해 내기’이자 번제의 대리물이다. 아마 그들의 체증을 조금은 완화 ‘헤시키아 Hesychia-내적평안’되었을 것이다.

3. 나는 감정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믿는다. 감정은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에너지로 현상계와 맞물린다. 작게는 몸이고 크게는 우주. 번제물과 희생양은 이러한 에너지를 해소하거나 전이시키는 매체이다. 많은 경우 인간은 자기 행동이 용납되는 조건 하에서는 무슨 일이든 하게 된다. 논리와 이성은 여기서 억압된 인간 감정에너지 표출의 수단을 찾아 대령하거나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살육의 명분을 제공한다. 인간의 역사는 ‘종교’와 ‘이데올로기’ 즉, 유일신과 집단적 광기의 임계점이 낮은 곳에 유동 창궐하여 살육의 원인을 미화해 온 것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민하의 불도장은 대량학살이 일어난 곳, 분쟁지역, 자연재해가 있는 곳, 광기의 희생양이 대거 발생한 곳의 좌표에 기계적으로 도착해 ‘쿵!’, ‘쿵!’ 내리찍는다. 비극이 이미 벌어졌거나 벌어지는 중이므로, 이 도장 찍기는 양피지 위의 ‘기록’이자 ‘징표’로도 보인다. 이전의 필사가 그러하듯 가죽 위 연기와 그을음을 통해 참상과 고통을 상기할 수 있겠지만 나는 여기서 어떤 파멸의 징조와 좌절을 담은 저주(파괴적 소망)의 이미지 역시 떠올린다. 도장이 연기를 피우고 지나간 자리에는 정 반대의 말, ‘신의 가호를…’같은 기도 구절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염원은 다시 저주처럼 자기를 파괴하는 중이다. 좌표축 도장 찍기의 기계성은 욕망의 기계가 된 인간이 그 욕망에 냉정히 파괴되는 귀결이자 순리이다. 원인에 따른 자연한 귀결을 우리는 ‘신의 뜻’이라 부른다.

4. 쪽방촌과 바우하우스, 공감의 좌표뜨기

이민하는 바우하우스 판상형 주택의 아이디어가 한국에서 경제적 효율만 남아 쪽방이 되어버린 사연을 추적했다. 그리고 바우하우스의 높은 창, 빛을 투과하며 열린 형태로 이 방의 사연을 펼쳤다. 콩댐을 한 장판지로 만든 이 구조물은 입방체의 집을 단순히 펼친 모양이기도 하지만 창의 후광을 입은 십자가와 닮았다. 상자를 펼치면 그 펼쳐진 내부공간은 드러난 마음처럼 읽힌다. 살이 타는 감각적 자극이 사라진 곳에서 나는 함께 침묵을 유지한다. 쪽방의 장판지를 칼로 도려낸 연꽃 만다라는 ‘고통’을 확산 전이하지 않는다. 그러니 도려냈다기 보다는 피워냈다고 해야 옳다. 여기서 타인의 경험은 일방적 말씀으로 판별되는 ‘선’과 ‘악’으로 증폭되지 않았다. 대신 인간 삶, 보편의 고통으로 와 닿는다. 원인에 관한 분노와 원망이라는 누적된 감정이 없기에 징벌과 저주, 그리고 이에 따른 희생양과 번제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평화로움은 ‘안심’, 즉 나에게로 돌아오는 파괴력이 없는 중에서 그 업의 연쇄가 소거되는 상태이다. 조금 과장하면 가시관을 쓰고 피가 낭자한 고통받는 메시아가 사라진 말레비치의 십자가에 비유할 것이다. 감정의 대리물을 소급해 죄를 짊어지고 기꺼이 죽었던 예수가 ‘너희 죄를 사하였다’ 함은 본인 이후로 욕망과 감정의 ‘번제물’을 삼지 말라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민하가 예술을 통해 세상에 끼치고자 한다던 그 정신적 함양이란 이런 부분이 아니었을까.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협업프로젝트

2017. 9 성과 속을 매개하기, 희생양 되기 (고충환)

성과 속을 매개하기, 희생양 되기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이민하는 종이와 가죽에 텍스트를 쓰는 작업을 한다. 처음엔 기름을 먹인 종이에, 그리고 이후 점차 무두질된 양가죽, 소가죽, 돼지가죽, 그리고 사슴가죽에다 쓴다. 예나 지금이나 가죽을 무두질하는 것은 천한 일에 속한다. 작가가 가죽에다 텍스트를 쓰는 것은 이런 사회적 계급의식과, 사회적 약자로서의 자의식과 무관하지가 않다. 작가는 사회 문제며 사회 환경에 관심이 많다. 예컨대 전작(2017, 천 개의 문제풀이와 좌절)에서 작가는 가리봉동 쪽방촌의 한 방을 온통 텍스트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다. 기름을 먹인 종이로 도배를 한 후, 그 위에다 연필로 빼곡하게 텍스트를 기록했는데, 공무원시험, 토익시험, 부동산중개사자격증시험을 위한 기출문제들이다. 이런저런 시험에 내몰린 내일이 없는 청춘들의 암울한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2011년에는 가죽에 텍스트를 쓰고 그 과정을 전시하는 작업으로 동일본 대지진 참사의 희생자를 기리기도 했다(지난한 일).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 가죽에 텍스트를 새기는 행위는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하는 제의적 성격을 갖는다. 청춘과 희생자들 같은 사회적 약자의 상처를 보듬어 새살이 돋게 하는(재생) 것이다.

텍스트로는 세계의 모든 언어로 된 모든 종교의 기도문을 필사했다. 작가가 직접 필사하기도 하고, 참가자를 매개로 필사하기도 하고(관객참여), 때론 플로터를 통해서 필사를 하기도 한다. 왜 기도문인가. 작가의 작업에서 기도문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종이에, 가죽에 기도문을 필사하는 작가의 행위며 작업은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가지고 있는가. 사람들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이타적인 대의나 존재론적인 경우와 같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를 위해서도 기도한다. 이처럼 기도는 양가적이다. 성에도 속하고 속에도 속한다. 성과 속을 매개시켜준다. 속에 속한 것을 정화시켜 성의 차원으로 승화시켜준다. 정화와 승화를 매개로 성속을 연결시킨다(성속의 변증법?). 연결시킨다기보다는 원래 연결된 상태, 원초적 상태, 처음상태를 상기(아남네시스)시킨다. 처음상태(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원형)를 복원하고 회복시킨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존재의 처음상태는 성과 속이, 삶과 죽음이 하나로 연결돼 있었다고(연속성) 본다. 그리고 여기에 자본주의와 경제제일주의원칙이 매개되면서 생산적인 것(세속적인 삶)과 비생산적인 것(죽음과 성에 속한 것)이 분리되었다고(불연속성) 진단한다. 그러므로 불연속성을 넘어 원래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이 존재의 과제로서 주어진다.

작가는 그렇게 성과 속의 상관성에, 성과 속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여기서 성에 줄이 닿아있는 종교는 속을 정화하는 것, 속으로 하여금 성의 차원으로 승화시켜주는 것과 관련이 깊다. 그 방법이 여럿 있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가 경(기도문)을 외우는 것(독경)이고, 받아쓰는 것(필사)이다. 그렇게 받아쓰다보면 내가 지워지고 쓰는 행위만 남는다. 내가 지워진다? 번뇌가 지워지고, 욕망이 지워지고, 상처가 지워진다. 그렇게 지워진 내가 비로소 투명해지고 오롯해진다. 역설이다. 지움으로써 오롯해지는, 아를 지워 진아(진정한 나, 처음상태 그대로의 나)를 얻는 역설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종이에, 가죽에 기도문을 필사하는 행위는, 그리고 참가자로 하여금 필사에 참여시키는 행위는 이처럼 나를 지우는, 번뇌가 사라지고 욕망을 잠재우고 상처를 치유하는, 그럼으로써 진정한 나를 얻는, 진정한 나와 대면하는, 자기반성적인 행위와 관련이 깊다. 수신과 수행의 상징적 의미와 관련이 깊다.

그렇다면 작가는 가죽에다 어떤 텍스트를 어떻게 쓰는가. 어떤 텍스트로 치자면 주로 기도문을, 그리고 참가자가 있는 경우에 저마다의 내면독백(고백? 상처?)을 쓴다. 어떻게 쓰는가를 보면 인두로 필사를 한다. 그렇게 가죽에다 인두로 필사를 하다보면 가죽 타는 냄새가 나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참가자 저마다의 속말을 글로 뱉어내는 행위와 과정을 통해서 내면에 응축된 상처가 타고(정화?), 연기와 함께 해소(승화?)되는 것이다. 신자들이 지성소를 찾아 저마다의 죄(상처)를 고백하고 죄 사함(상처가 해소되는)을 받는 종교 예식을, 그 예식의 상징적 의미를 생각하면 되겠다. 실제로 작가는 전작에서 한 마을의 가장 높고 편평한 곳(아마도 성스러운 땅이면서 거룩한 곳, 땅에 있으면서 정작 그 주권이 하늘에 속한 곳, 그러므로 교회)에 지성소를 차리고, 마을주민들로부터 기원문을 적은 엽서를 전달받는다. 여기서 기원문은 기도하기, 죄를 고백하기, 고민을 털어놓기, 그리고 어쩌면 무슨 수건돌리기처럼 상처를 전이시키기와 통한다. 그리고 기원문을 적은 엽서를 전달받는 작가의 행위는 고민을 들어주고 상처를 덮어쓰는, 그럼으로써 마을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상처가 치유되는 상징적이고 주술적인 의미와 관련이 깊다. 저마다 내면의 상처를 털어놓아 상처가 해소되는 과정으로 보면 되겠고, 여기서 작가는 그 계기며 매개역할을 한다. 매개자다. 무당이다(요셉 보이스는 예술가를 무당이라고 했다).

작가는 참가자 저마다의 내면독백(상처)을 텍스트로 쓰게 한다고 했다. 여기에 작가가 누워있다. 편안해 보이기도 하고, 무방비 상태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무두질된 사슴 가죽을 의복처럼 이불처럼 덮어쓰고 있다. 그리고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5명의 외국인 참가자들(우즈베키스탄 2명, 중국, 터키, 이탈리아)이 겪은 차별받은 이야기를 저마다 가죽표면에다 인두로 쓴다. 차별받은 이야기는 작가가 참가자들에게 주문한 것인데, 작가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를테면 이주노동자 문제)이 반영된 것이고, 단순한 차별을 넘어서 저마다 내면에 응축된 존재론적인 상처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참가자들이 가죽표면에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쓰면 가죽이 타고 냄새가 나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상처가 전이되면서 해소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가죽이 타고 냄새가 나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은 중요하다. 바로 상처가 참가자로부터 작가에게로 전이되는 과정이 하나하나 기록되고 등록되는 상징적 지점이고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서 전해지는 상징적 제스처들이며 종교적 의례들의 원형으로 보면 되겠다.

이를 통해 상처가 참가자로부터 작가에게로 전이된다고 했다. 비록 가죽을 덮어쓰고 있다고는 하나, 여기서 가죽은 사실은 작가의 몸을 대리한다. 그러므로 가죽에 이야기를 쓰는 것은 곧 작가의 몸에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징적인 의미로는 작가의 몸에 이야기가 아로새겨지고, 작가의 몸이 타고, 작가의 몸에서 냄새가 나고, 작가의 몸이 연기가 돼 피어오른다. 번제다. 우리 죄를 대신할 희생양을 지목하고, 그 희생양을 바쳐 신의 분노를 잠재우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르네 지라르는 이런 희생양 만들기를 종교적 제의의 차원을 넘어 제도적 장치(제도기계)라고 본다. 사람들의 폭력욕망(욕망기계)을 투사하고 전이시키고 해소시켜줄 희생양 지목하기, 희생양 만들기, 희생양 내어주기에 모든 건전하고 건강한 제도의 성패가 달려있다. 그렇게 종교는 사회의 균형추 역할을 한다. 그 과정에서 폭력과 관련되고, 그런 만큼 제도는 희생양이 흘린 피 위에 축조된다. 그렇게 아마도 추후 작가의 행보는 폭력이 있는 곳, 세계 도처의 분쟁지역을 찾아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희생양을 자처하고 무당을 자처하는 행보가 될 것이다. 무당은 성과 속을 매개하고, 삶과 죽음을 넘나든다. 가죽은 죽은 짐승들의 몸이고, 죽음의 표상(주검)이다. 그 주검을 덧입어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재생이다. 참가자의 입장에서 보면 희생양(무당)의 죽음을 매개로 폭력(폭력욕망)이 해소되고 상처가 치유되는 재생이다. 작가는 그런 죽음의 표상(상처가 아로새겨진 가죽 그러므로 어쩌면 살과 피가 타는 몸)을 옷처럼 덧입기도 하고 이불처럼 덮어쓰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 세계의 상처와 폭력과 분쟁이 투사되는 스크린을 대신한다.

아나포라(Anaphora), 그리스어로 기억을 의미한다. 아남네시스(Anamnesis), 상기를 뜻한다. 기억보다 더 깊은 기억, 원형적 기억, 존재의 처음상태에 대한 기억이다. 그리고 헤쉬키아(Hesychia), 내적평안을 의미한다.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들이며, 작업을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에 해당한다. 이로써 유추해볼 때 작가의 작업은 존재의 원형을 상기시키고, 존재의 처음상태를 회복하고 복원하는 것과 관련이 깊다. 진정한 자기와 대면하는 자기반성적인 과정을 전제로 하는 이 과정(어쩌면 죽음너머로 재생되는, 그러므로 거듭나기와 정화의식)이 있은 연후에라야 존재는 비로소 내적평안을 되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이다. 가죽에 이야기를 쓰는 작가의 행위는 책을 쓰는 행위에 비유할 수 있다. 성과 속, 상처와 치유, 폭력과 희생양(르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이라고 했다), 놀이와 종교의식이 날실과 씨실로 직조된 고백의 문화학으로 집필된 책일 수 있다.

(2017년 개인전 ‘아남네시스’ 도록에서 발췌)

2017.4 <낮고 높고 좁은 방> 전시서문 (이민하)

<낮고높고좁은 방> 전시서문    

이민하 (작가, 전시기획)

간체자가 점령한 화려한 간판들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고층빌딩과 아파트숲의 풍경에 익숙한 나에게 중국의 어느 소도시를 방문한 듯한 인상을 주었다. 2014년 초가을, 서울에서 나고 자라 서울토박이였던 나는 구로구 주민들과 함께한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지역 리서치를 위해 참가한 구로공단 역사 투어를 통해 가리봉을 접하게 되었다.

70년대의 가리봉은 구로공단이라는 거대한 엔진이 시골에서 갓 상경한 젊은이들의 청춘과 꿈을 연소하면서 성장하던 시기였다. 공장의 기숙사에 미처 다 수용되지 못한 지친 노동자들을 위해 벌집들이 생겨났다. 가리봉의 벌집은 좁은 방 한칸과낮은부엌,길고좁은다락이맞물린특징적인구조의방들이수십채가연결된공동주택이다.

어린 여공들이 미싱을 타고 야학을 다니면서 꿈을 키우던 가리봉 벌집은 90년대에 들어서 구로공단이 쇠퇴하면서 2000년대에 들어서는 값싼 주거지를 찾아 유입된 중국동포들과 외국인 노동자, 노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구로구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도 낯설게 느껴지는 곳이다. 산업화의 아픔을 간직한 가리봉의 역사를 기억하고, 이 곳의 의미와 가치를 예술적인 접근으로 풀어내려는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전시 ‘낮고 높고 좁은 방’은 구로공단과 한국 근대화를 상징하는 가리봉 벌집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고시원 등의 오늘날 청년 세대가 겪는 불안정 주거공간이 이어지는 고리를 탐색한다. 이번 전시의 참여작가 8명은 전시주제의 문제의식에 동감하며, 구로공단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가리봉 지역을 답사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방’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전시공간의 입구에는 하꼬방1과 루핑집2으로 시작되는 불안정 주거공간의 다양한 명칭과 연표가 배치된다. 구로공단의 성장과 함께 생겨난 벌집방은 80년대에 등장한 고시원과 구조적인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연표는 고시원이 쪽방화 되는 과정과 IMF 이후 직장인들의 이용 증가로 인해 고급화되는 시점을 간략히 보여준다. 전시장의 초입은 현실적인 가리봉의 모습을 담은 방들로 시작하는데, 안으로 이동하면서 점차 사적이고 내밀한 방이 등장하는 순서로 배치되었다.

정희우는 도시의 공간에서 발견되는 작은 기호들을 탁본으로 어루만져 시각화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가리봉의 실제 벌집방을 탁본해서 방의 규모와 창문 및 3개의 문의 위치를 통해 관람객으로 하여금 벌집방의 특수한 구조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 사용감이 역력한 발이 엉성하게 묶여있는 왼편의 문은 대문으로 나갈 수 있는 주 출입구이다. 고개를 많이 숙여야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정면 왼쪽의 낮은 문은 방보다 낮게 만들어진 수도가 있는 다용도실로 연결된다. 정면 오른쪽의 약간 높은 문은 관 정도 크기의 좁고 긴 쪽다락방으로 연결된다.

전시제목인 ‘낮고 높고 좁은 방’은 정희우가 탁본한 방의 실제 구조적 특성을 보여주는 표현이자, 사회학자인 정민우가 그의 저서 ‘자기만의 방(2011, 이매진북스)’에서 언급한 청년세대의 주거 문제를 드러내기 위한 표현과도 연결된다. 정민우는 낮고(반지하방) 높고(옥탑방) 좁은(고시원)이라는 형용사들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도심 속 불안정 주거 공간을 지칭한다. 리빙텔, 미니텔 등 명칭의 변화는 있어왔으나 이러한 공간들은 집으로 인정받지도 못해왔고 정부의 시선 밖에 머물러 있었다. 하나로 명명하기 어려운 이런 공간들은 계속 탄생되고 방치되어 왔다.

김정은은 자신이 걸어다닌 길의 흔적을 활용해서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지도 만들기를 해오고 있다. 가리봉동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우연히 조우한 여객기를 통해 가리봉으로 향하는 여정을 표현하고자 한 작품 ‘self mapping 가리봉 벌집 비행’은 2~30분에 한 대씩 등장하는 여객기와 마주친 곳의 풍경, 위치 등을 기록한 것으로, 주관적이면서 개인적인 시선으로 기록된 가리봉의 현재이다.

김미라는 공산품과 복제 이미지, 영상을 매체로 ‘개인’이라는 단위로써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의 의문을 시각 예술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가리봉동에서 경험한 총천연색 간판들과 함께 자리한 커다란 분양 풍선은 한국사회가 지닌 주거공간에 대한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서울의 역사적 지층이 어느 한 순간에 멈춰있는 듯한 가리봉의 풍경들은 여러가지 사물과 간접 이미지로 분절되어 낯설게 다른 사물들과 결합한다.

이마로는 결벽증과 편집증적인 성향을 지닌 작가로 웹서핑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지금의 청년세대의 특성을 대변한다. 일반적인 소통은 어렵지만 그 자신이 하나의 세계를 오롯이 구축하고 있으며, 신체의 연장으로서의 ‘방’ 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구로탐방’은 웹서핑을 통해 수집한 이미지들이 30미터에 이르는 롤지에 걸쳐 제작된 드로잉 연작이다. 강박적이지만 과감한 선질은 그림을 통해 세계와 만나는 그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민하는 ‘성聖과 속俗’을 주제로 인간다움에 대한 탐구를 시각화하는 동시에, 주민참여형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각 지역에서 전개하고 있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시멘트로 덮여있는 슬레이트 지붕은 철거촌의 풍경이자 개발의 현장이기도 하다. 헌법35조 3항의 문구를 차용하여 행정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았던 불안정 주거공간에 대해 환기시킨다. 안쪽에 위치한 방은 콩댐이 된 장판지의 꿉꿉한 냄새와 빼곡히 필사된 기출문제들로 사각의 방 안에 갇힌 청년들의 현실을 드러낸다.

유한이는 작은 블록들을 조립하여 만들어진 건축적 구조물을 통해 변화와 상실을 거듭하는 삶의 모습을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시가 매입한 가리봉 벌집 두 채는 층계참이 붙어있는 독특한 계단이 존재한다. 작가는 이 마주보는 계단에서 파편화된 삶의 흔적을 채취하고 그려낸다. ‘각각의 방’ 시리즈는 각기 다른 문의 크기와 구조를 가진 벌집방의 특수성을 부각시키면서, 꿈과 희망이 있었을 그때의 삶을 무지개색으로 표현한다.

김보경은 기억과 재현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과 사건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설치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품 ‘The dim landscape of Sune’의 주인공은 기술을 배우고 짝을 이뤄서 도시에 정착하고자 하는 바램을 품고 시골에서 상경했다. 작가의 노동적 행위로 생겨난 작품 표면의 깊고 불규칙한 주름들은 주인공이 감내했어야 했던 삶의 고단함과 치열함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모양의 캔버스들은 Sune의 깊은 사색과 마주한 풍경의 시간들이며, 어둡게 드리워진 설치작품은 그 풍경을 뒤로 하고 떠나온 잔재들을 담담히 드러낸다.

김덕희는 주로 열과 빛을 소재로 설치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가는 한국 근대화의 상징인 구로 공단의 쪽방촌을 한국이라는 모태의 자궁이라 해석한다. 압축 성장 과정에서 겪은 급속한 근대화. 작가는 불안정 주거공간인 쪽방촌과 급속한 근대화의 그늘에서 태어난 2014년 여객선 참사를 자궁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하여 두 공간에서 존재했던 이들이 보았을 꿈들을 오브제와 그림자로 드러낸다. 관객은 가장 안쪽 방에 마련된 암실에 들어가서 그들의 꿈을 엿보거나 태내로 회귀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각각의 방은 참여 작가들의 기존 작업의 매체가 적극적으로 발현되고, 각자가 경험하고 생각해 온 사회문제에 대한 의식들을 자연스럽게 작품을 통해 드러내도록 유도한 구조적인 장치이다. 한국사회의 압축성장의 혜택을 본 30대 후반~40대 중반의 작가들이 지금의 청년 세대의 주거 문제와 ‘방’에 대한 생각들을 가리봉이라는 필터를 통해 바라보면서 작품을 통해 녹여냈다. 아직도 이름을 얻지 못한 많은 ‘방’들을 통해 우리가 봉착한 사회문제와 마주하면서, 모두가 함께 상상해 보기 위한 이러한 시도가 앞으로도 지속되기를 바란다.

(2017년 <낮고 높고 좁은 방> 전시도록에서 발췌)

2017.9 Mediating the Sacred and the Profane, Becoming a Sacrifice (Kho Chung Hwan)

Mediating the Sacred and the Profane, Becoming a Sacrifice
Kho Chung-Hwan (Art Critic)

The work of Lee Minha involves writing texts onto paper and leather. Lee began with oiled paper, and then gradually moved on to tanned sheepskin, cowhide, hog leather and deerskin. The job of tanning animal hides has long been considered menial. Therefore, the artist’s decision to transcribe texts on leather is not unrelated to her self-awareness of social vulnerability, not to mention the problems of social class distinctions. Lee is very much concerned with social issues and communal environments. For her recent project titled One Thousand Questions and Despair (2017), the walls of a tiny room in the Garibong-dong shantytown were almost entirely covered with texts. Firstly, Lee plastered the walls with oiled paper, and then filled up the surface with sample questions for civil service exams, the TOEIC test, and the real estate licensing exam. On the whole, the project can be described as a satire on the grim realities faced by today’s youth who have been driven to desperation with little hope for the future. In addition, Lee’s 2011 project Very Difficult Labor, which exhibited the entire process of inscribing texts on leather, was a way of honouring the victims of the Great East Japan Earthquake. The act of incising texts onto leather thus acquired a ritualistic undertone. By embracing the anguish of such socially disadvantaged groups as the younger generation and disaster victims, the artist heals their wounds and allows new flesh to grow (i.e. regeneration).

As for textual sources, Lee Minha has transcribed a variety of prayers written in many different languages. Sometimes the artist herself takes on the task of transcribing texts. Sometimes it is left to participants (as a form of audience participation), and sometimes a plotter is used for transcription. Why does she turn to prayers? What significance do prayers have in her work? What profound meanings can we find in the artistic transcription of prayers on paper and leather? Indeed, people pray for personal gain, and yet at the same time they are prompted by more fundamental concerns including altruistic and ontological values. Prayers are therefore ambivalent in nature, belonging to both sacred and profane realms. As a result, prayers mediate the sacred and the profane. By purifying what belongs to the profane world, prayers sublimate it to the sacred level. The sacred-profane connected is created through purification and sublimation (the sacred-profane dialectic?). Or, rather than newly uniting the two, Lee Minha reminds us (which then results in anamnesis) of the initial, connected state, the most primitive state, or the state at the beginning. The initial state (and therefore the archetype of existence) is then reconstructed and restored. Georges Bataille argues that in the initial form of existence, the sacred and the profane as well as life and death are all connected as one (continuity). According to him, mediation by capitalism and economy-first principles has led to a divide (discontinuity) between what is productive (secular life) and what is unproductive (the sacred realm of death). Given this, our task is to overcome the consequent discontinuity and restore the original continuity.

Lee Minha explores the correlation between the sacred and the profane, not to mention the restoration of continuity between the two realms. In this respect, religion is closely associated with the practice of purifying secular things and subliming them to the sacred level. One of the most effective ways to achieve this is to recite and transcribe prayers. If you continue transcribing prayers, you will eventually find that ‘self’ has been erased and that you’re only left with the act of transcribing. What does it mean to have one’s ‘self’ obliterated? It wipes out all your agony, desires and wounds. Having thus been erased, one then finally becomes transparent and complete. Here lies a paradox; paradoxically, deletion brings about completeness and ‘true self’ (true ego in the original state) arises only when ‘self’ is gone. In short, the act of transcribing prayers on paper and leather and inviting audience to participate in the effort is closely connected to the process of introspection that wipes out all anguish and desires, and then heals wounds by erasing ‘self’ and confronting ‘true self.’

What kind of texts does Lee Minha write on leather and how? As for textual materials, she mainly uses prayers, and sometimes participants are asked to each come up with an internal monologue (in doing so, they offer confessions and reveal their wounds). In terms of methodology, the artist uses irons to transcribe her chosen texts. When texts are transcribed onto leather with irons, participants soon smell the burning leather and see smoke. As they each give words to their internal thoughts, their wounds buried deep within are burned (purification) and then go up in smoke (sublimation). This is reminiscent of religious rites whereby believers visit holy places to confess their sins (wounds) and find forgiveness (alleviate wounds). We must also consider its symbolic significance. In fact, in one of her previous projects, Lee Minha built a sanctum in the highest and most even place (possibly a holy and divine place, a place that is found here on earth but is ruled by the heaven above – in other words, a church) and received postcards from local residents carrying their invocations. Such invocations are closely related to the act of praying, confessing sins and worries, and then transferring wounds perhaps very much in the same manner as the drop the handkerchief game. Furthermore, the act of receiving the villagers’ postcards with their invocations written on them has a symbolic and shamanistic meaning. This way, the artist lends an ear to their worries and embraces their wounds, thereby healing them as far as the villagers are concerned. Since participants resolve their inner wounds by revealing them, the artist serves as an impetus and mediator. She becomes a shaman (Joseph Beuys asserts that all artists are shamans).

As mentioned above, the artist invites each participant to share his or her internal monologue (wounds) in the form of written texts. Here lies the artist. She looks relaxed and at the same time somewhat defenceless. She covers herself with tanned deerskin as if it were clothing or a blanket. A group of five immigrants (two from Uzbekistan and one each from China, Turkey and Italy) currently living in Korea write down their stories of discrimination on leather using irons. The artist has asked them share such stories, which not only reflect her own interest in social issues (such as the situations of immigrant workers) but also encompass ontological wounds condensed deep within, going far beyond the simple problem of discrimination. When the participants incise their stories onto the surface of leather, the leather burns and smoke arises. Their wounds are resolved through metastasis, and within that process it is important to observe the leather burning and smoke arising. This is because it marks a symbolic phenomenon that records each step in the metastasis of the participants’ wounds onto the artist. It can be viewed as an archetype of the existing symbolic gestures and religious rites.

As I mentioned above, the participants’ wounds are transferred onto the artist through this process. Even though she is wrapped in leather, here the leather in fact replaces her body. Therefore, writing on the leather equates to writing on the artist’s body. In symbolic terms, the stories are etched on her body before it burns, gives off a smell and then goes up in smoke. Lee Minha becomes a burnt sacrifice. We single someone out as a scapegoat for our sins and offer that sacrifice to appease God’s wrath. Interestingly, René Girard regards this sacrificial process as part of our institutional frame (institutional mechanism) that transcends religious rites. The success of any sound and healthy system depends on how well we recognise scapegoats, who could reflect, transfer and alleviate people’s violent nature and desires (desire mechanism), turn people into scapegoats and offer sacrifice. This way, religion serves as a counterweight in the society steeped in violence, where the core system is built upon sacrificial blood.

In the future, Lee Minha is most likely to visit areas of conflict across the world where violence prevails. She will profess herself to be a shaman and sacrifice. A shaman mediates the sacred and the profane, and crosses the boundaries between life and death. Leather is taken from dead animals and therefore embodies death (corpses). Writing on corpses and overcoming death result in regeneration. From participants’ point of view, the death of the scapegoat (shaman) heals wounds and generates new life by reducing violence (violence and desires). The artist sometimes puts on such an emblem of death (leather inscribed with wounds and therefore a body of burning flesh and blood) as if it were clothing, and sometimes uses it as a blanket to cover herself. Sometimes it even works like a screen onto which the world’s agony, violence and disputes are projected.

In Greek, anaphora means remembrance and anamnesis means recollection – a memory deeper than remembrance, an archetypal memory, a memory of existence in its original state. In addition, hesychia refers to inner tranquillity. These three words are central to the work of Lee Minha and provide contextual insights based in humanities. It can be inferred that Lee aims to remind us of the archetypal existence while restoring and reconstructing the original state of existence. Only after we’ve experienced a process of self-reflection that forces us confront ‘true self’ (all of which perhaps leads to regeneration beyond death, and therefore can be seen as reform as well as cleansing rituals), can we regain inner tranquillity. Art is a narrative technique. The act of writing stories on leather can be compared to the act of writing a book. The book can be completed through the culturology of confessions that delicately weaves together the sacred and the profane, wounds and cures, violence and sacrifice (or Violence and the Sacred according to René Girard) as well as amusement and religious rites.

from the Solo Exhibition Catalog September. 2017

2014.5 이민하: 타는 목마름, 아로새겨진 인간됨의 흔적 (박세연)

이민하: 타는 목마름, 아로새겨진 인간됨의 흔적
박세연(미술이론)

이민하는 종이와 가죽에 기도문을 쓰는 작업을 해왔다. 이를 위해 작가는 다국어로 된 기도문을 수집하고 그것을 한 글자 한 글자 필사(筆寫)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친 화면에는 국가와 종파, 인종을 초월해서 모여진 다양한 언어의 기도문들이 교차하고 중첩되면서 만들어낸 다채로운 족적이 남겨진다.

이렇게 기도문이라는 텍스트를 가지고와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일견 기성 종교에 대해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사실 작가가 주목한 것은 ‘반복해서 어떤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태도나 마음가짐’에 있다. 작가 노트에 따르면 ‘기도’하는 행위는 ‘성(聖)과 속(俗)’이라는 인간성의 딜레마가 표출되는 접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와 함께 이타적이고 보다 높은 차원을 지향하고자하는 마음 또한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즉 작가는 기도의 목적이 세속적인 것을 지향하든 숭고한 것을 지향하든 무언가를 간구하고 소망하는 기도라는 행위 자체가 가지는 진실성에 주목하였고 ‘기도’를 인간의 본질, 인간다움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테마라고 상정하게 된 것이다.

기도문을 필사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화선지 위에 붓과 먹으로 반복해서 선을 그었던 작업을 볼 수 있다. 담묵을 중첩해서 반복하는 선 긋기 행위를 통해 작가는 무아지경에 가까운 몰입을 경험하고, 반복 행위의 수행적인 측면을 자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필사라는 것 역시 예부터 현재까지 행해지고 있는 종교적인 수련의 한 방법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선을 긋는 행위와 경전이나 기도문을 필사하는 행위 사이의 유사성에 착안하여 현재의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 종이에 연필로 필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작업은 그 재료가 가죽과 인두로 바뀌어 진행되어 왔다. 흥미롭게도 종이에서 가죽으로 재료를 변경하게 된 것은 광우병에 대한 뉴스를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인간을 위해 대량 살육되는 동물들을 보며 인간성이 상실되어가는 과정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또한 작가는 예부터 천대받고 하위 산업으로 여겨진 가죽 산업에 내포된 차별과 억압의 역사까지 떠올린다. 이와 같은 연상 작용은 작가가 이러한 문제를 비롯하여 전쟁과 종교 분쟁 등 인간다움과 그 상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고민해왔던 것이 바탕이 되었다.

무두질 처리가 된 소가죽이나 양가죽 위에 인두로 기도문을 새기는 작업. 가죽 위에 뜨겁게 달궈진 인두로 지지면 가죽 타는 냄새와 연기가 나게 되는데 작가는 이를 통해 전쟁과 기아, 학살 등의 문제를 떠올린다. 성스러운 기도문을 필사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살이 타는 것 같은 냄새가 나고, 이렇게 가죽을 지져서 태움으로써 글자가 각인되는 과정은 파괴적인 성격을 띤다. 이러한 모순적인 속성이 생겨나는 지점이 작가가 관심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환기시키면서 기도문의 필사 작업은 계속 이어져 간다.

작가는 작업과정을 통해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관객과 공유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왔다. 관객들 앞에서 공개제작을 해서 관객을 직접참여하게 하고, 작가를 대신해 필사하는 장치를 고안해서 설치되어 있는 완성작품과 함께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을 볼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관객이 작품을 체험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을 연출하였는데 어두운 밀실같이 조성된 공간 안에 들어서면 커다란 스크린이 보이고 거기에 인체의 실루엣이 거대하게 비춰져 보인다. 스크린에 다가갈수록 팔과 손의 움직임에 주목하게 되는데 이 실루엣은 가죽에 기도문을 필사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일 것이라 짐작 가능하다. 이를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어두운 공간에 비춰지는 영상의 빛과 고요함 가운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람 소리, 무언가를 반복해서 쓰고 있는 거대한 사람 그림자 앞에 혼자 서있는 관객은 여러 감각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작품을 오롯이 경험할 수 있도록 유도된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아나포라(Anaphora)’는 그리스어로 ‘기억해 내는 것’에서 유래했고, 수사학 기법 중에서 어두반복을 의미한다고 한다. 작가가 계속해서 기도문을 필사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동시에 그 행위를 통해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기억해내고자 하는 의도를 함의시켜 놓았다. 이와 함께 위에서 언급한 영상설치 작품은 ‘내적평안’이라는 뜻의 ‘헤쉬키아(Hesychia)’라고 함으로써 속세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신적인 고양을 통한 내적인 평안함을 경험했으면 하는 희망적인 바람도 담고 있다.

이민하는 가죽에 인두질을 하는 온도와 세기를 조정하면서 진하고 연한 효과를 낼 수 있고, 한 번의 인두질로 흔적을 남겨가는 작업방식에서 수묵화에서의 농담표현이나 일필휘지와의 유사함을 찾는다. 이렇게 전통회화에서 시작한 경험을 살리면서도 가죽과 인두, 영상 설치 등의 다양한 매체 확장으로 이어지고 있는 그의 작품의 다음 향방은 어떠할까. 고대에 번제단을 쌓고 동물을 태워 하늘에 바치는 제사 의식을 통해 신과의 소통을 꾀했듯이 작가는 가죽을 태워 기도문을 새기는 것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나아가 보다 높은 차원과의 소통을 열망하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열망이 앞으로도 표현의 방식에 구애됨 없이 발현되어 가기를 기대한다.

2014년 5월 구로아트밸리 갤러리 개인전 평문

2014.5 Scorching Thirst, Vestiges of Engraved Humanness (Seyeon Park)

Minha Lee: Scorching Thirst, Vestiges of Engraved Humanness
Seyeon Park (Art Theory)

Minha Lee has been engaged in the work of transcribing prayers on paper and leather by hand. Her work involves collecting prayers written in various languages and transcribing each letter by hand. The results are colorful vestiges of prayers in different languages, which intersect and overlap one another beyond the national, religious or ethnic barriers.

For their focus on prayers, the works of Minha Lee may be interpreted as expressions of established religions. Nonetheless, Lee’s artistic attention is focused on examining ‘the mind and behavior of those who devote themselves to repetitive actions’. In her notes, Lee claims that the very act of praying could be viewed as a point of contact for expressing ‘the Sacred and the Profane’, otherwise known as the dilemma of humanity. She argues that while it is a human instinct that we put our own safety and comfort above all else as a matter of foremost priority, we at the same time also have higher moral aspirations for altruism. In this respect, Lee is interested in the sincerity found in prayers of hope and entireties, whether or not their purpose is secular or sacred. According to Lee, a prayer is the most outstanding representation of humanness.

Lee’s earlier works, created prior to transcribing prayers, show repetition of drawing lines on JangJi(長紙), Korean traditional paper, using calligraphy brushes and ink. By repeatedly drawing lines in pale Indian ink, Lee must have been able to attain a spiritual state of perfect selflessness and experience the ascetic nature of such repetitive actions. Transcribing prayers has long been considered as a means of religious practice. Given this, there is a parallel between the act of drawing lines and transcribing prayers, and Lee has taken this similarity as her artistic motivation for her current work.

Initially she began transcribing in pencil on paper and then later proceeded to using other materials such as leather and a hand-held iron. Interestingly, Lee was inspired to switch from paper to leather after watching news about mad cow diseases. She witnessed a loss of humanity in the mass slaughter of animals for human benefit. Furthermore, Lee even reflects on the history of prejudice and persecutions imposed upon the leather industry that has been despised as a subordinate/untouchable industry. Such conscious associations are based on her deep-seated concern for the loss of humanity through conflicts such as wars and religious disputes.

The hot hand-iron transcribing work of prayers on tanned leathers of cow, pig or sheep produces a brunt smell and smoke, which then invoke the tragedy of war, hunger and massacre. The act of transcribing prayers by hand may look sacred but it gives off the smell of burning flesh. Therefore, the process of inscribing letters by burning leather is itself a destructive one. This paradoxical nature of the work reminds Lee of those issues she wishes to explore and pushes her to continue transcribing prayers.

Lee has made various attempts to share with her audiences what she felt and experienced during the creative process. She even held a public workshop where she invited spectators to participate in person. In addition, she installed a transcription device that allowed audiences to view both the completed work and transcription in progress at the same time. The current exhibition features an independent space for audiences to actively take part and interact with her works. Stepping into the dark, secluded room, audiences encounter a large silhouette of a human body projected onto a huge screen. As one approaches the screen, his or her attention is drawn toward the limbs. It is then assumed that the silhouette is an image of the artist transcribing prayers onto leather. Even those who fail to recognize this are led to respond to many sensory experiences, thus fully experiencing that very time and space as they stand in front of the silhouette of a large man amidst light and calm and hear the sound of the wind blowing from somewhere.

The title of the exhibition, ‘Anaphora’, is a word derived from Greek meaning ‘carrying back’. In rhetoric, an anaphora is a rhetorical device that denotes repetition at the beginning of clauses. It signifies the artist’s struggle to keep in mind the problems concerning human nature by transcribing prayers over and over again. In addition, by naming the aforementioned video installation work ‘Hesychia’ or ‘inner peace’, the artist hopes to let those living in the secular world experience inner peace through spiritual elevation.

Minha Lee is able to create light and strong effects by adjusting the temperature and pressure of her iron on leather. She finds similarities between this method of leaving an iron mark with a single stroke and the expressions of light and shade in ink-and-wash paintings as well as the process of writing with one stroke of a brush. What is next for this innovative artist, who has built upon her foundations in traditional art and expanded into various other mediums including leather, ironing, and video installations? Like the ancient ritual of presenting burnt offerings on altars in an attempt to communicate with gods, ,perhaps the artist yearns to achieve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r even some transcendental beings by burning leathers and inscribing prayers on them. In the future, I look forward to seeing her aspirations manifest themselves without the constraints of methods of expressions.

from the Solo Exhibition leaflet May. 2014

2012.2 아트인컬처 – 김화현 이민하展 리뷰 (박현정)

김화현 이민하展 리뷰
2011.11.18~2012.1.13 샘표 스페이스

보기만 해도 죄가 되는 일이 있다. 본다는 것은 때론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며, 관음증은 인류가 앓고 있는 흔한 병이다. 보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미소년을 그려온 김화현과 영원을 향한 인간의 의지를 종이와 가죽에 기도문으로 새겨 온 이민하는 2008년 일본의 작은 술집 나나에서 ‘성(聖)과 속(俗)’이라는 주제로 만났다. 일본 주택가라면 하나쯤 있기 마련이지만, 여성 종업원이 접대하는 스낵바는 정숙한 숙녀, 신사라면 기웃거리는 것조차 꺼려졌을 지도 모를 낮은 곳. 이 공간 속으로 초대하기 위해 두 작가가 선택한 방법은 성과 속의 혼재였다. 우선 술집 입구에 달린 작은 세면대에 꽃을 담고 성스러운 의식을 제공한다. 손을 씻고 거울을 보라는 문구를 벽에 써 두었지만, 실제로 손을 씻을 물도, 거울도 없다. 세속의 언어가 통용되지 않는 순간 두 작가의 주술이 힘을 발휘하면서 관객들은 입구에서 열린 다른 통로를 향해 발을 들여 놓는다.
1층 바, 여성 종업원은 간데 없고 미소년 넷이 액자 속에서 손님을 기다린다. 김화현이 이제껏 그려온 대담한 노출과는 달리 상반신만 드러낸 소년들은 얌전하다. 황금빛 광배와 매란국죽의 지물로 성스러움까지 더했음에도 여전히 잘 다듬어진 근육과 촉촉하게 부푼 입술은 여성 관객의 관음증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소년은 성스러움으로 치장하여 자신 뿐만 아니라 술집 내부에 대한 호기심과 관음증이라는 세속의 욕망을 긍정하도록 도우며, 그 죄책감을 사해준다.
김화현이 속의 공간을 성으로 중화시켰다면, 이민하는 여성 종업원이 쉬던 2층 방을 성으로 정화하기 시작한다. 가장 사적인 그 방은 어느 곳보다 관객의 관음증을 유발하지만, 층계를 올라 만나는 건 검고 거대한 기둥. 작은 방 곳곳에 솟아난 기둥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며 세속적인 공간을 영원을 향한 숭고한 공간으로 바꾼다. 그 위에 100개가 넘은 언어로 쓴 깨알 같은 기도문은 하늘을 향한 공덕이 되어 구제를 암시한다.
2011년 샘표공장으로 자리를 옮긴 나나에서 두 작가는 또 다른 변화를 시도한다. 술집의 2층만을 조립한 방을 세우고 속의 공간을 재현했지만, 성스러움을 입힌 남성들은 이제 술집 밖으로 나와 있다. 김화현은 속된 공간을 성화(聖化)시키고자 기둥이 있던 자리에 구멍 난 그물을 걸고, 이민하는 술집 밖에 기둥을 세웠다. 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나선의 기도문은 여전히 구제의 가능성을 시사하며 술집을 바라본다. 2008년 성과 속의 혼재를 보여 주던 작가들은 검은 기둥과 술집, 성과 속을 마주보게 함으로써 그 사이에 존재해 온 무수하고 애매한 경계에 대해 새롭게 질문을 던진다.

글 : 박현정 미술사
월간 아트 인 컬쳐, 2012년 2월호 p.173

2007.4 퍼블릭 아트 – 수평적 현실과 수직적 비상에의 꿈 (서정임)

수평적 현실과 수직적 비상에의 꿈
이민하 전 2007.3.7~3.13 갤러리 토포하우스

이민하의 작품을 보며 처음 떠오른 것은 이상의 ‘날개’라는 소설의 한 구절이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구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구나.” 날개가 돋기 위해 겨드랑이가 자주 가렵다던 한 패배주의자의 죽음에 이르기 직전의 순간. 그러나 그것이 죽음이 아닌 저자의 이름답게 ‘이상’을 향해서 다가가는 발걸음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날개는 신의 영역이 되기도 하고 ‘비상’을 꿈꾸며 이상을 찾아갈 수 있게끔 해주는 매개체라 여긴다. 작가의 작품에서 역시 거대하게 퍼져가는 날개는 소설에서의 주인공처럼 죽음과 이상 사이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가늘고 얽힌 필선, 손의 노동이 집약된 화면이 공간 속에서 부유하며 2차원의 평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3차원의 공간으로 튀어나와 몸에 들어붙어 비상할 수 있게 해줄 것 같다. 그리고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움직이며, 120도밖에 보지 못하는 시야를 넘어서는 존재는 위압감과 공포감까지 불러일으킨다. 작품을 다시 들여다보기에 앞서 검은 거대함은 우리의 눈을 속이고 경건하게, 숭고하게 만드는 장치로서 작용한 것이다. 또한 엉킨 검은 실타래는 빛을 흡수하는 블랙홀처럼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때문에 그의 내부를 들여다보기 어렵다.
그러나 꼼꼼히 짚어보면 날개 안에 펼쳐진 선의 겹침은 산맥과도 같고, 물의 형상으로도 보인다. 하여 <자연으로의 귀의에 의한 쾌>라는 작품에서 날개 속에 송대 화가 범관의 <계산 행려도>를 모사함으로써 이를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작가노트에 의하면 옛 선배들이 그림 속에서 ‘휴’를 얻었듯 자연을 가까이 두고자 하는 마음을 날개에 빗대어 표현하고 그 안에서 평안을 찾는다고 한다. 이러한 사고는 그가 설치회화라고 말하는 부분과 맞닿아 있다. 거대한 화면이 보여주는 공간의 적극적 개입은 자연 속에 관자의 정신이 흡수되었던 것이 아닌, 아예 화면 자체가 밖으로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거기서 우리는 저 멀리 숨어있는 감정의 꼬투리를 잡게 된다.

서정임 기자, 월간 퍼블릭 아트 2007년 4월호 리뷰

2007.3 이민하: 감정을 만나는 거울 (박영택)

이민하 – 감정을 만나는 거울
박영택(미술평론, 경기대 교수)

커다란 장지(長紙)에 먹과 청묵(靑墨), 분채(粉彩), 색연필 등으로 무수한 선을 그어 날개와 같은 덩어리를 그려 보이고 있다. 날개 한 쪽만이 화면에 매달려 있는 형국인데 그것은 특정한 새의 날개라기보다는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우리들 의식 속에 떠오르는 그런 날개 이미지를 닮았다. 날개는 새뿐만 아니라 천사나 신선들도 달고 다녔고 다 빈치(Da Vinci)보다 훨씬 앞서 다이달루스(Daidalos)같은 이는 아예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달고 다녔던 것 등을 보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옛사람들은 날개에 대한 강렬한 동경이 있었던 것 같다. 고구려들은 사람이 죽으면 관에 새의 커다란 날개를 부장(副葬)해 주었는가 하면 새의 깃털을 관모(冠帽)라 해서 꽂기도 하고 이후 한복의 옷 선이나 한옥의 처마 등이 모두 그 날개에 대한 동경과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중력의 법칙에 저당 잡힌 인간들이 이 현실계로부터의 비상이나 탈출을 꿈꿀 때면 흔히 새의 날개를 떠올렸던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다소 상투적이지만 자유의지나 기존 사회의 틀과 관습, 가치에 대한 도전 등을 표현하기 위해 흔히 날개 이미지가 차용되곤 한다. 날개는 비상이나 초월, 탈중력과 관계있기도 하지만 이민하의 경우 이 날개는 특정한 날개 이미지나 앞서 언급한 의미망에서 조금 벗어나 보인다. 여기서 날개 이미지는 순수 조형적 측면에서 차용되고 있는 듯하며 날개 형상이 선의 증식과 어디론가의 지향성, 유동적인 운동감과 생명성의 충일 등을 가시화하는데 적절한 형태로 다가오고 아울러 추상적인 선의 표현보다 다소의 구체성을 지닌, 그래서 망막에 대한 호소와 집중에 효과적인 편이라 차용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렇다고 실존적인 내용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날개 형상의 내부는 촘촘한 선들이 머리카락처럼, 나무뿌리나 호흡처럼 들러붙고 치밀하게 결구(結構)되어 마냥 증식되어 나가는 형국, 그 기간과 시간성을 보여준다. 결국 이 작가는 선을 가시화하고 선의 쓰임과 용례, 선의 표현과 동양화의 전통적인 선의 의미에 대한 ‘스터디’의 차원에서 날개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아울러 이 말개 형상을 한 검은 덩어리는 매우 커다란 크기를 보여준다. 사람의 신체성을 넘어서는 크기는 막막함과 숭고함, 두려움과 압도감을 준다. 장지를 몇 장씩 잇대어 붙여놓고 그 가운데로 연기처럼, 구름처럼 풀려나가는 검은 선들의 궤적과 집저근 마치 종이(화면, 날개)가 공간 속으로 미끄러지고 잠입하듯이 지나가며 무한히 팽창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횡적인 팽창과 종적인 팽창을 교대로 보여주는 화면은 각각 시선을 가로막는 무한함과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깊이감을 안겨준다. 이 거대함은 우선 작가에게는 수고스러운 노동과 수련을 안겨준다. 그것은 자기 치유적이기도 하고 극기, 초월에 좀 더 가까운 행위이다.

또한 광활한 화면에 무수한 긋기라는 신체성의 행위를 통해 무언가를 행해 나가는 이 작업은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순간순간 자신으로 몰입하는 그 시간성을 중요하게 알려준다. 종이의 단면은 막연한 공간이며 벽이고 그림 그리는 순간마다 불가피하게 맞닥뜨리는 공포를 안겨주는 실존적 장아리면 그 공간에 그리면서 만드는 행위를 온전히 올려놓고 있다는 인상이다. 어쨌든 이 큰 크기는 작가 자신의 노동의 흔적을 좀 더 확연하게 보여주기 위한 공간으로 선택되었다. 동시에 그 밑자락에는 숭고함과 종교성의 자취도 어른거린다. 숭고함과 정신주의에 대한 이미지의 증좌(證左)!

작가는 자잘한 선들을 채워 넣어 검은 덩어리를 만들었다. 여기서 선들은 무엇인가를 재현하려는 목적성을 지운 채 그것 자체로 의미 있는 생애를 살려고 한다. 선이 지시성과 명시성, 재현의 덫에서 풀려나 스스로의 존재를 형성해 나가는 그런 그림이다. 대부분 먹으로 그려나간 선들은 검은 색채 덩어리나 실타래, 검정 깃털로 이루어진 날개를 그려 보인다. 작가는 이 검은 색채로만 이루어진 단색의 화면에 어둡고 두려운 미지의 영역이란 의미를 얹어 놓았다. 그런가 하면 이 검은색은 타자를 억누르고 싶어 하는 욕망과도 관련이 있단다. 동시에 검정(어둠)은 모든 만물의 근원이자 싹을 틔우는 자궁의 역할과 관련되기도 하고 현(玄)이라 해서 모든 색을 가능하게 하는 긍정의 의미도 지녔다. 특히 이 검은색은 작가에게 무한한 깊이와 경이로움을 주기에 선택되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관자에게 이 그림을 통해 외경, 공포, 숭고, 찬탄과 같은 감정을 만나는 거울로 자기라길 원한다. 구체적인 대상이 지워진 단색의 화면을 통해 관자들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거울이기를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그림은 기존의 그림/작품과는 거리를 둔 채,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재현하기 보다는 그림을 화두 삼아 직관적으로 깨닫고 느끼게 하는 일종의 선화(禪畵)적 요소가 강하게 감지된다. 이는 시욕과 볼거리가 흘러넘치는 동시대의 미술에 역설적으로 침묵과 빈궁한 이미지를 제공하면서 관조와 직관의 힘을 환기시키는 편에 가깝다. 우리는 작가가 그려놓은 검고 어두우며 커다한 새의 날개 이미지 앞에 직립해 있으면 순수한 선의 생명력과 충일, 동시에 무한함과 숭고함을 주는 비의(秘儀)적 체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그림은 설치적 회화이며 공간과 관자의 신체에 관여하는 수묵화, 수묵 드로잉이기도 하며 나아가 새삼 정신적 활력을 자극하는 직관적, 관조적 그림의 한 측면을 드러낸다.

2007년 3월 토포하우스 개인전 평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