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고높고좁은 방> 전시서문
이민하 (작가, 전시기획)
간체자가 점령한 화려한 간판들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고층빌딩과 아파트숲의 풍경에 익숙한 나에게 중국의 어느 소도시를 방문한 듯한 인상을 주었다. 2014년 초가을, 서울에서 나고 자라 서울토박이였던 나는 구로구 주민들과 함께한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지역 리서치를 위해 참가한 구로공단 역사 투어를 통해 가리봉을 접하게 되었다.
70년대의 가리봉은 구로공단이라는 거대한 엔진이 시골에서 갓 상경한 젊은이들의 청춘과 꿈을 연소하면서 성장하던 시기였다. 공장의 기숙사에 미처 다 수용되지 못한 지친 노동자들을 위해 벌집들이 생겨났다. 가리봉의 벌집은 좁은 방 한칸과낮은부엌,길고좁은다락이맞물린특징적인구조의방들이수십채가연결된공동주택이다.
어린 여공들이 미싱을 타고 야학을 다니면서 꿈을 키우던 가리봉 벌집은 90년대에 들어서 구로공단이 쇠퇴하면서 2000년대에 들어서는 값싼 주거지를 찾아 유입된 중국동포들과 외국인 노동자, 노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구로구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도 낯설게 느껴지는 곳이다. 산업화의 아픔을 간직한 가리봉의 역사를 기억하고, 이 곳의 의미와 가치를 예술적인 접근으로 풀어내려는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전시 ‘낮고 높고 좁은 방’은 구로공단과 한국 근대화를 상징하는 가리봉 벌집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고시원 등의 오늘날 청년 세대가 겪는 불안정 주거공간이 이어지는 고리를 탐색한다. 이번 전시의 참여작가 8명은 전시주제의 문제의식에 동감하며, 구로공단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가리봉 지역을 답사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방’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전시공간의 입구에는 하꼬방1과 루핑집2으로 시작되는 불안정 주거공간의 다양한 명칭과 연표가 배치된다. 구로공단의 성장과 함께 생겨난 벌집방은 80년대에 등장한 고시원과 구조적인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연표는 고시원이 쪽방화 되는 과정과 IMF 이후 직장인들의 이용 증가로 인해 고급화되는 시점을 간략히 보여준다. 전시장의 초입은 현실적인 가리봉의 모습을 담은 방들로 시작하는데, 안으로 이동하면서 점차 사적이고 내밀한 방이 등장하는 순서로 배치되었다.
정희우는 도시의 공간에서 발견되는 작은 기호들을 탁본으로 어루만져 시각화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가리봉의 실제 벌집방을 탁본해서 방의 규모와 창문 및 3개의 문의 위치를 통해 관람객으로 하여금 벌집방의 특수한 구조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 사용감이 역력한 발이 엉성하게 묶여있는 왼편의 문은 대문으로 나갈 수 있는 주 출입구이다. 고개를 많이 숙여야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정면 왼쪽의 낮은 문은 방보다 낮게 만들어진 수도가 있는 다용도실로 연결된다. 정면 오른쪽의 약간 높은 문은 관 정도 크기의 좁고 긴 쪽다락방으로 연결된다.
전시제목인 ‘낮고 높고 좁은 방’은 정희우가 탁본한 방의 실제 구조적 특성을 보여주는 표현이자, 사회학자인 정민우가 그의 저서 ‘자기만의 방(2011, 이매진북스)’에서 언급한 청년세대의 주거 문제를 드러내기 위한 표현과도 연결된다. 정민우는 낮고(반지하방) 높고(옥탑방) 좁은(고시원)이라는 형용사들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도심 속 불안정 주거 공간을 지칭한다. 리빙텔, 미니텔 등 명칭의 변화는 있어왔으나 이러한 공간들은 집으로 인정받지도 못해왔고 정부의 시선 밖에 머물러 있었다. 하나로 명명하기 어려운 이런 공간들은 계속 탄생되고 방치되어 왔다.
김정은은 자신이 걸어다닌 길의 흔적을 활용해서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지도 만들기를 해오고 있다. 가리봉동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우연히 조우한 여객기를 통해 가리봉으로 향하는 여정을 표현하고자 한 작품 ‘self mapping 가리봉 벌집 비행’은 2~30분에 한 대씩 등장하는 여객기와 마주친 곳의 풍경, 위치 등을 기록한 것으로, 주관적이면서 개인적인 시선으로 기록된 가리봉의 현재이다.
김미라는 공산품과 복제 이미지, 영상을 매체로 ‘개인’이라는 단위로써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의 의문을 시각 예술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가리봉동에서 경험한 총천연색 간판들과 함께 자리한 커다란 분양 풍선은 한국사회가 지닌 주거공간에 대한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서울의 역사적 지층이 어느 한 순간에 멈춰있는 듯한 가리봉의 풍경들은 여러가지 사물과 간접 이미지로 분절되어 낯설게 다른 사물들과 결합한다.
이마로는 결벽증과 편집증적인 성향을 지닌 작가로 웹서핑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지금의 청년세대의 특성을 대변한다. 일반적인 소통은 어렵지만 그 자신이 하나의 세계를 오롯이 구축하고 있으며, 신체의 연장으로서의 ‘방’ 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구로탐방’은 웹서핑을 통해 수집한 이미지들이 30미터에 이르는 롤지에 걸쳐 제작된 드로잉 연작이다. 강박적이지만 과감한 선질은 그림을 통해 세계와 만나는 그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민하는 ‘성聖과 속俗’을 주제로 인간다움에 대한 탐구를 시각화하는 동시에, 주민참여형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각 지역에서 전개하고 있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시멘트로 덮여있는 슬레이트 지붕은 철거촌의 풍경이자 개발의 현장이기도 하다. 헌법35조 3항의 문구를 차용하여 행정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았던 불안정 주거공간에 대해 환기시킨다. 안쪽에 위치한 방은 콩댐이 된 장판지의 꿉꿉한 냄새와 빼곡히 필사된 기출문제들로 사각의 방 안에 갇힌 청년들의 현실을 드러낸다.
유한이는 작은 블록들을 조립하여 만들어진 건축적 구조물을 통해 변화와 상실을 거듭하는 삶의 모습을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시가 매입한 가리봉 벌집 두 채는 층계참이 붙어있는 독특한 계단이 존재한다. 작가는 이 마주보는 계단에서 파편화된 삶의 흔적을 채취하고 그려낸다. ‘각각의 방’ 시리즈는 각기 다른 문의 크기와 구조를 가진 벌집방의 특수성을 부각시키면서, 꿈과 희망이 있었을 그때의 삶을 무지개색으로 표현한다.
김보경은 기억과 재현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과 사건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설치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품 ‘The dim landscape of Sune’의 주인공은 기술을 배우고 짝을 이뤄서 도시에 정착하고자 하는 바램을 품고 시골에서 상경했다. 작가의 노동적 행위로 생겨난 작품 표면의 깊고 불규칙한 주름들은 주인공이 감내했어야 했던 삶의 고단함과 치열함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모양의 캔버스들은 Sune의 깊은 사색과 마주한 풍경의 시간들이며, 어둡게 드리워진 설치작품은 그 풍경을 뒤로 하고 떠나온 잔재들을 담담히 드러낸다.
김덕희는 주로 열과 빛을 소재로 설치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가는 한국 근대화의 상징인 구로 공단의 쪽방촌을 한국이라는 모태의 자궁이라 해석한다. 압축 성장 과정에서 겪은 급속한 근대화. 작가는 불안정 주거공간인 쪽방촌과 급속한 근대화의 그늘에서 태어난 2014년 여객선 참사를 자궁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하여 두 공간에서 존재했던 이들이 보았을 꿈들을 오브제와 그림자로 드러낸다. 관객은 가장 안쪽 방에 마련된 암실에 들어가서 그들의 꿈을 엿보거나 태내로 회귀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각각의 방은 참여 작가들의 기존 작업의 매체가 적극적으로 발현되고, 각자가 경험하고 생각해 온 사회문제에 대한 의식들을 자연스럽게 작품을 통해 드러내도록 유도한 구조적인 장치이다. 한국사회의 압축성장의 혜택을 본 30대 후반~40대 중반의 작가들이 지금의 청년 세대의 주거 문제와 ‘방’에 대한 생각들을 가리봉이라는 필터를 통해 바라보면서 작품을 통해 녹여냈다. 아직도 이름을 얻지 못한 많은 ‘방’들을 통해 우리가 봉착한 사회문제와 마주하면서, 모두가 함께 상상해 보기 위한 이러한 시도가 앞으로도 지속되기를 바란다.
(2017년 <낮고 높고 좁은 방> 전시도록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