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에 2017년작 “아남네시스”가 한국구애전 : 포스트 내러티브에 선정되어 상영됩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상영스케줄 : 2019년 8월 18일(일) 14:40 롯데시네마 홍대입구 1관
2019년 8월 19일(월) 12:20 롯데시네마 홍대입구 2관
이민하 작가: 불의 과학, 신체적 언어 그리고 “망각할 수 없는 것들”
김남수(안무비평)
#1. “빛은 사물의 표면에서 놀고 웃지만, 열은 침투한다.” (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중에서)
#2. “만약 이 삶 혹은 이 순간이 본질상 망각되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이 술어는 오류가 아니라 어떤 요구, 인간들이 부응하지 못했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일 터(…) 이것은 이 요구에 부응했던 영역, 즉 ‘신의 기억’을 가리킨다.” (벤야민, 『번역자의 과제』 중에서)
이민하 작가의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저 아득한 태초의 시대로부터 고의적 시대착오를 범해 ‘오늘’이라는 미래로 귀양살이 나온 고대인의 예술 같다. 시간의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으로 잠수했다가 무엇인가를 건져 올린 듯한 그의 작업은 고대적이며 그의 작업이 마치 “하늘에 부조되는 장엄한 무늬”처럼 본래 장식이 아니라 “무늬는 신의 언어였다”라는 의미에서 신성한 언어를 현재화한다. 고대의 신성성을 이 초연결 메가머신 사회에서 호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종교의 주요 테마이자 심지어 장사수단이었던 신성성의 코드를 예술이 취했을 때 어떤 컨템포러리의 특질로 바라볼 수 있을까. 아감벤처럼 컨템포러리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민하 작가의 작업은 “고대와 현재 사이의 비밀조약” 같은 것의 살아있는 예가 아닌가. 그만큼 그의 작업은 시간적 매듭의 성향이 아주 강하며, 이 매듭이 재미있는 것은 하나의 풀 길 없는 금지의 매듭이 아니라 본래 하나의 통일된 스피리추얼로 되돌아가는 고르디아스의 매듭처럼 다가온다. 그 매듭의 엉뚱한 나타남이라고 할까.
양가죽 위에 무두질하고 그 매끄러운 표면 위에 인두질을 통해 불의 언어로 무엇인가를 적어 내려간다는 것은 굉장히 풍토적인 동시에 그 해당 풍토의 대지에서도 이제는 근대 이전의 전통으로 관리되는 고대적인 풍습이다. 동굴 속의 목자나 유목 시대의 노마드가 무엇인가 가시적인 것이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소멸하여가는 것, 그런 의미에서 아주 특별한 비저너리 – “‘비저너리’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에서 시작해 이내 일반이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곳으로 뛰어올라 버린다”(콜린 윌슨) – 라고 할 수 있다. 어둠의 공간에서 저편의 삶을 기록한다는 것, 그것도 불의 과학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비저너리로써 ‘숨겨진 차원’을 연다는 것이다. 이 ‘숨겨진 차원’의 여밈과 펼침이 가장 발달한 것은 사막이며, 이민하 작가의 작업에는 이 사막의 풍토성이 강하게 풍긴다.
단순한 인두 작업이 아니다. 화인으로 가죽 표면에 글자를 찍는 작업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영적인 지식, 일종의 그노시스를 나타나게 하려는 작가의 의지와 욕망 – 욕망 아닌 욕망 – 이 자기 투신의 형태로 개입하고 있다.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면서 자신의 실존적 상황 자체를 되먹임시키는 작업이다. 기술적으로 용인되고 향상되는 작업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경험적 주체가 무한루프로 되풀이 되풀이 부엌 아궁이 속에 넣어지는 작업이다. 이는 어린 양과 사람 목숨이 등가로 표기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사람 목숨이라는 등식으로 성립하는 인식론에서 비롯된다. ‘숨겨진 차원’이 나타난다는 것은 어린 양의 희생제 없이는 곤란하다.
무엇인가가 기술적으로 술술 잘 풀려나간다는 것은 근대적인 시스템 속에서 예술이 분화된 기술체계 내부로 포섭됐다는 의미밖에는 없다. 반면, 이민하 작가의 악전고투 같은 투신은 장엄한 무늬로서의 문자가 본래 신의 권능으로부터 인간의 영역으로 이전될 때 엄밀한 의미의 ‘관계 개념’으로서 한 개인의 삶을 희생하는 과정이다. 이 ‘관계 개념’은 제한된 어떤 조건이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무한과 직결되는 매개이다.
#3. “아랍인들을 만족시키려면 폐쇄된 공간은 (…) 탁 트인 전망이 있어야 한다.” (에드워드 윌슨, 『숨겨진 차원』 중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어느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이민하 작가의 머무름이자 거주함은 언어이다. 정확히는 문자로 달리는 애벌레 주체로서의 언어이다. 애벌레처럼 기어가는, 캘리그라피화되어 살아서 꿈틀대는, 그럼으로써 생명적인 으르릉거림 – 존 케이지의 <로라토리오(Roaratorio)>처럼 – 이 강렬한 언어이다. 아랍 문자, 한자, 가나 문자 등등 흐르는 문자들이 갖는 그 여정과 흔적이 그대로 생명성의 징후로 나타난다. 그때는 애벌레 문자가 나아가는 각도와 방향조차도 언어이다. 갈림길에서 이쪽이냐 저쪽이냐는 중대해진다. 그때 언어는 외친다고 할까. 이 길이다! 그 길 안에 이 삶의 영원한 무늬를 찍어 넣겠다며, 아니 넣겠다는 듯이. 어떤 문자는 발음할 수 없으며 본래 신이 쓰던 것이라고 한다.
그런 관점일 때, ‘집’이란 돌아가야 하는 곳이다. 이 세계에 나타날 때는 그 ‘나타남의 사건’이 축복받고 기름 부음 받지만, 우리는 본래의 그 무면목(無面目) – 창조된 원류 그대로 혼돈의 “이목구비 없는 얼굴” -을 잃어버리고 망각한다. ‘집’은 모든 존재자가 모여들어 그동안 그러모은 사물의 언어와 질감 대신에 존재라는 그 첫 번째의 의미를 회복하는 씨앗의 방이다. 이민하 작가의 인두 작업은 사람들의 내력과 사연이 간명하게 불의 권능으로 쓰여져서 소리와 냄새로 음미 되는 과정에서 ‘집’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거기에는 ‘집’의 전망이 있다.
이민하 작가는 왜 무두장이처럼 양가죽 위에 인두로 지지는 작업으로 자신의 영적인 지식, 그노시스를 표현하려고 할까, 라고 질문한다면, 위와 같은 대답도 가설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쓰는 인두라는 도구이자 머신이 하나의 불의 과학 – 현대과학은 이 “‘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아직도 묵묵부답이다 – 의 소산이란 사실을 살펴봐야 한다. 이 인스트루먼트가 고대적인 연원을 갖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민하 작가의 사용 방식은 양가죽 위에 겹쳐 쓰기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불로 그대로 텍스트를 초벌 찍기 하는 것이다. 불의 언어, 불의 과학으로 오류 없이 쓰이는 책인 것. 그러므로 모든 생명이 돌아갈 비전과 함께 ‘집’의 전망이 있고, 그런 ‘숨겨진 차원’을 가시화하는 ‘비저너리(visionary)’의 내력이 가능하다. 다만 그러므로 이민하 작가의 작업은 더 모험적이고 신화적인 수사의 세계에서 조망할 필요가 있다. 그 작업은 종교적 성향과도 잇대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요청은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이다.
이민하 작가의 인두는 빛의 작업이 아니라 열의 작업이다. 그 열은 “침투하는 열(熱)”이다. 그 열기는 사람의 피부에 치직거리는 음향과 살타는 누린내 그리고 고통의 상상력이 환기되는 고대와 중세로부터 전해진 집단 무의식의 기억이 있다. 이 기억의 연대기를 펼치는 것이 이리저리 굴곡진 양가죽 표면이다. 이는 피하지방 아래 무의식화된 원형질적 기억들이 오래된 여행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어떤 타블로 판 같은 것이다. 이민하 작가가 불의 열기로 작업하는 공간은 이 판이다. 판은 사람들의 삶의 얼룩과 신산 그리고 망각되어서는 안된다는 윤리적 요청들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의 기억’(벤야민)으로만 가능하다. 이민하 작가의 작업이 동행하는 종교성은 이러한 측면에서 추론된다. 모든 것은 펼쳐내고 그 펼쳐낸 삶의 가혹한 깊이, 사연 많고 하염 많은 삶의 기록, 감히 공감이라고 말하기 버거운 차원에서 그 모두를 감당해내는 것이 라이프니츠적인 의미에서 ‘신’이다. 그에 따르면, 고백하는 것은 ‘신’이며, 어떤 고백은 ‘신적’이다.
#4. “불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무(無)를 찾는 것, 이것은 인간의 위대함을 말해준다.”(엠페도클레스)
이민하 작가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위상학은 이런 것이다. 신 스스로 ‘오늘’이라는 정신의 한 인간이 거처하는 곳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이런 특별한 작업의 행간과 복선 그리고 알레고리가 필요한 것이라고. 겹과 켜, 직접성과 현전성, 후각적 정신과 고도의 그노시스 같은 것들. 지금에 와서는 미디어 아트의 맥락에서 떠내려가듯 점차 폐기되어버렸다고, 뉴 미디어가 올드 미디어를 구축하는 것처럼 괄호 쳐졌다고 믿는 시대에 이민하 작가는 돌연히, 돌올하게 그 미디움(medium)의 시원적인 기호를 다시 호출해버린다. 그것도 모든 삶은 불멸이며, 불멸의 삶은 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망각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불멸을 알게 해주는 기호라고 증언하는 것처럼. “기념비도 추억도 심지어 증인조차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망각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삶”(벤야민)이 있다. 이 탁월한 긍정성이 인두와 그 불의 과학이 남기는 낙인의 흔적으로서의 문자 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으며, 마치 피닉스처럼 부정성이 변환된 긍정성으로 출현한다.
“모래바람에 눈을 감았다 뜨니 인천이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행동은 이기적인 자기만족.”
“마음속에서는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결혼과 함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구받았다.”
“얇은 종이처럼 팔랑거리는 차별들이 내 삶에 팽배했다.”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인간처럼, 그럼으로써 피닉스와도 같이 되살아나는 삶, 거기에 영원성의 지표이자 무늬가 찍혀진다는 듯이 이 종교적 언약 비슷한 느낌이 이민하 작가의 작업에는 있다. 거기에는 망각할 수 없는 것의 본질이 어떤 강렬도의 척도로부터 작동한다는 무언의 암시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남네시스(Anamnesis)>(2017)에서 이민하 작가는 상징적으로 인두질이 일어나는 타블로 판처럼 누워 있으며, 다른 이방의 사람들이 가진 각자의 사연들이 제각각의 다른 문자 체계의 잠언적인 언어로 화인된다. 그때 이민하 작가의 신체는 문자와 언어는 다르지만, 다시 헤쳐모이는 ‘집’으로서 일종의 바벨탑과도 같다. 흩어졌던 언어들이 영적인 씨앗의 방으로 모음 되는 곳, 거기에는 이민하 작가의 신체가 제공된다. 이 신체는 어린 양의 신체인 동시에 불길로 휩싸인 신체이며 동시에 잿더미이다. 그다음 순간, 재 속에서 다시 살아 오르는 다른 생명체의 신체이다. 바슐라르는 이를 ‘불의 새’라고 봤으며, 이민하 작가는 ‘상기(想起)’라고 봤다. 무엇을 상기하는가. 자신이, 또한 그 누구나 알아차리면 ‘불의 새’라는 엄연한 사실, 그노시스를 상기하는 것이다. 불의 과학으로 쓰이는 신체적 언어는 이처럼 희생제를 통한 ‘상기’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어떤 작업에서 이민하 작가는 인두로 문자를 찍고 그 화인 작업을 현재화하는 동시에 그 문자를 읊기도 한다. 통조림 된 문자가 아니라 불로 살아있는 문자가 퍼포먼스가 되는 것이다. 이때는 거대한 동굴이나 궁륭공간이 높은 중세도서관 같은 공간성으로 공명하기 시작한다. 쓰면서 읽는 것, 청각적 이미지를 통한 시각적이며 개념적인 차원의 개방은 ‘상기’의 가장 기본적인 루프이다. 가령,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에서 건강이 좋지 못한 젊은 사제는 고뇌하면서 일기를 적는데, 일기는 빈 여백에 쓰이면서 동시에 보이스오버로 읽힌다. 그리고 번역되는 자막은 다시 이 일기 내용을 가시화한다. 자신의 성독(聲讀)으로 울려진 텍스트를 다시 자신의 귀로 듣는다는 것은 공명하는 공간 자체가 부활하는 삶, 망각될 수 없는 삶의 기초라는 것이다. 그 공간성을 이민하 작가는 자신의 퍼포먼스에서 드러낸다.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바다 위에서 폭풍우를 만나 난파 직전까지 몰리는 것이 일반적이며,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악마의 맷돌이 돌아가는 사회에서 가속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민하 작가는 그러한 사회에 대한 응전의 형식이 아니라 그러한 사회로 초기 세팅된 정신적 형식을 완전히 새로운 서판으로 바꿔치기하여 깊은 망각 속에 있는 것들을 기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니 ‘상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망각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덧없는 삶은 덧없지 않다는 것, 이때의 ‘덧’이라는 찰나지간, 익명성, 겨를 없음은 그대로 영원성의 표지이다. 그 자체로 ‘덧’의 시간성은 불의 언어로 고정되고 가시화된다. 아니 신체화되어 타인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이 된다. 그노시스의 알아차림을 통해 이 삶의 고해를 항해하자는 것이 자칫하면 종교적 관념의 틀 속에서 헐벗은 반복이 될 수도 있지만, 이민하 작가는 그 인두질의 신체적 감각, 희생제적 자기 투신, ‘상기’와 부활의 본질로서 삶을 다시 바라보기를 요청한다. 아니 충격파를 던진다.
다시 한 번 더 묻는다. 왜 이민하 작가는 무두장이처럼 양가죽 위에 인두로 지지는 작업으로 자신의 영적인 언어를 추구하게 되었을까. 여기서 인두는 그 금속의 첨점 끝에 마치 ‘성 엘모의 불’처럼 응결된 불의 권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끝이 없는 거대한 파타고니아 협곡 사이를 아무런 안전보장이나 믿음 없이 그대로 던져진 운명의 무늬처럼 항해해갔던 마젤란 함대가 어느 모퉁이에서 번갯불이 돛대 끝에 둥글게 맺히는 현상을 만난 것처럼 말이다. 그때 선원들은 성스러운 여성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했다고 하는데, 이민하 작가의 작업은 바로 그러한 충동을 자연스럽게 촉발한다. 신이시여! 우리를 굽어살피소서. 암(闇), “울울하고 암암할 신의 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문밖까지 울려 나온다.” 우리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 소리가 울려 나올 때까지 인두로 지져야 한다. 인두는 비밀스럽다. 인두의 그 끝에 도사린 어떤 신적인 권능이 ‘불의 과학’으로 잠재해 있으며, 그것의 응축된 힘이 어떤 표면과 만나 화인될 때는 삶을 망각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망각할 수 없는 삶”이란 감각적이다. 감각의 경로를 따른다.
불길의 부조, 그 나타남의 사건은 마치 저 아득한 태초의 감각으로 일어난다. 우리말 “나타나다”는 음미할수록 어떤 신성한 현현의 느낌을 안으로 감싸고 있는데, 이민하 작가에게는 “나타나다”라는 동사는 그대로 ‘불’과 ‘연기’ 그리고 ‘냄새’의 언어로 표출된다. 오감으로 뒤덮인 채, 우리는 삶의 뜨거움과 누린내와 각성제를 한꺼번에 들이킨다. 이민하 작가의 작업 속에서 이는 불가피하다.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비평모음집에서 발췌
Mediating the Sacred and the Profane, Becoming a Sacrifice
Kho Chung-Hwan (Art Critic)
The work of Lee Minha involves writing texts onto paper and leather. Lee began with oiled paper, and then gradually moved on to tanned sheepskin, cowhide, hog leather and deerskin. The job of tanning animal hides has long been considered menial. Therefore, the artist’s decision to transcribe texts on leather is not unrelated to her self-awareness of social vulnerability, not to mention the problems of social class distinctions. Lee is very much concerned with social issues and communal environments. For her recent project titled One Thousand Questions and Despair (2017), the walls of a tiny room in the Garibong-dong shantytown were almost entirely covered with texts. Firstly, Lee plastered the walls with oiled paper, and then filled up the surface with sample questions for civil service exams, the TOEIC test, and the real estate licensing exam. On the whole, the project can be described as a satire on the grim realities faced by today’s youth who have been driven to desperation with little hope for the future. In addition, Lee’s 2011 project Very Difficult Labor, which exhibited the entire process of inscribing texts on leather, was a way of honouring the victims of the Great East Japan Earthquake. The act of incising texts onto leather thus acquired a ritualistic undertone. By embracing the anguish of such socially disadvantaged groups as the younger generation and disaster victims, the artist heals their wounds and allows new flesh to grow (i.e. regeneration).
As for textual sources, Lee Minha has transcribed a variety of prayers written in many different languages. Sometimes the artist herself takes on the task of transcribing texts. Sometimes it is left to participants (as a form of audience participation), and sometimes a plotter is used for transcription. Why does she turn to prayers? What significance do prayers have in her work? What profound meanings can we find in the artistic transcription of prayers on paper and leather? Indeed, people pray for personal gain, and yet at the same time they are prompted by more fundamental concerns including altruistic and ontological values. Prayers are therefore ambivalent in nature, belonging to both sacred and profane realms. As a result, prayers mediate the sacred and the profane. By purifying what belongs to the profane world, prayers sublimate it to the sacred level. The sacred-profane connected is created through purification and sublimation (the sacred-profane dialectic?). Or, rather than newly uniting the two, Lee Minha reminds us (which then results in anamnesis) of the initial, connected state, the most primitive state, or the state at the beginning. The initial state (and therefore the archetype of existence) is then reconstructed and restored. Georges Bataille argues that in the initial form of existence, the sacred and the profane as well as life and death are all connected as one (continuity). According to him, mediation by capitalism and economy-first principles has led to a divide (discontinuity) between what is productive (secular life) and what is unproductive (the sacred realm of death). Given this, our task is to overcome the consequent discontinuity and restore the original continuity.
Lee Minha explores the correlation between the sacred and the profane, not to mention the restoration of continuity between the two realms. In this respect, religion is closely associated with the practice of purifying secular things and subliming them to the sacred level. One of the most effective ways to achieve this is to recite and transcribe prayers. If you continue transcribing prayers, you will eventually find that ‘self’ has been erased and that you’re only left with the act of transcribing. What does it mean to have one’s ‘self’ obliterated? It wipes out all your agony, desires and wounds. Having thus been erased, one then finally becomes transparent and complete. Here lies a paradox; paradoxically, deletion brings about completeness and ‘true self’ (true ego in the original state) arises only when ‘self’ is gone. In short, the act of transcribing prayers on paper and leather and inviting audience to participate in the effort is closely connected to the process of introspection that wipes out all anguish and desires, and then heals wounds by erasing ‘self’ and confronting ‘true self.’
What kind of texts does Lee Minha write on leather and how? As for textual materials, she mainly uses prayers, and sometimes participants are asked to each come up with an internal monologue (in doing so, they offer confessions and reveal their wounds). In terms of methodology, the artist uses irons to transcribe her chosen texts. When texts are transcribed onto leather with irons, participants soon smell the burning leather and see smoke. As they each give words to their internal thoughts, their wounds buried deep within are burned (purification) and then go up in smoke (sublimation). This is reminiscent of religious rites whereby believers visit holy places to confess their sins (wounds) and find forgiveness (alleviate wounds). We must also consider its symbolic significance. In fact, in one of her previous projects, Lee Minha built a sanctum in the highest and most even place (possibly a holy and divine place, a place that is found here on earth but is ruled by the heaven above – in other words, a church) and received postcards from local residents carrying their invocations. Such invocations are closely related to the act of praying, confessing sins and worries, and then transferring wounds perhaps very much in the same manner as the drop the handkerchief game. Furthermore, the act of receiving the villagers’ postcards with their invocations written on them has a symbolic and shamanistic meaning. This way, the artist lends an ear to their worries and embraces their wounds, thereby healing them as far as the villagers are concerned. Since participants resolve their inner wounds by revealing them, the artist serves as an impetus and mediator. She becomes a shaman (Joseph Beuys asserts that all artists are shamans).
As mentioned above, the artist invites each participant to share his or her internal monologue (wounds) in the form of written texts. Here lies the artist. She looks relaxed and at the same time somewhat defenceless. She covers herself with tanned deerskin as if it were clothing or a blanket. A group of five immigrants (two from Uzbekistan and one each from China, Turkey and Italy) currently living in Korea write down their stories of discrimination on leather using irons. The artist has asked them share such stories, which not only reflect her own interest in social issues (such as the situations of immigrant workers) but also encompass ontological wounds condensed deep within, going far beyond the simple problem of discrimination. When the participants incise their stories onto the surface of leather, the leather burns and smoke arises. Their wounds are resolved through metastasis, and within that process it is important to observe the leather burning and smoke arising. This is because it marks a symbolic phenomenon that records each step in the metastasis of the participants’ wounds onto the artist. It can be viewed as an archetype of the existing symbolic gestures and religious rites.
As I mentioned above, the participants’ wounds are transferred onto the artist through this process. Even though she is wrapped in leather, here the leather in fact replaces her body. Therefore, writing on the leather equates to writing on the artist’s body. In symbolic terms, the stories are etched on her body before it burns, gives off a smell and then goes up in smoke. Lee Minha becomes a burnt sacrifice. We single someone out as a scapegoat for our sins and offer that sacrifice to appease God’s wrath. Interestingly, René Girard regards this sacrificial process as part of our institutional frame (institutional mechanism) that transcends religious rites. The success of any sound and healthy system depends on how well we recognise scapegoats, who could reflect, transfer and alleviate people’s violent nature and desires (desire mechanism), turn people into scapegoats and offer sacrifice. This way, religion serves as a counterweight in the society steeped in violence, where the core system is built upon sacrificial blood.
In the future, Lee Minha is most likely to visit areas of conflict across the world where violence prevails. She will profess herself to be a shaman and sacrifice. A shaman mediates the sacred and the profane, and crosses the boundaries between life and death. Leather is taken from dead animals and therefore embodies death (corpses). Writing on corpses and overcoming death result in regeneration. From participants’ point of view, the death of the scapegoat (shaman) heals wounds and generates new life by reducing violence (violence and desires). The artist sometimes puts on such an emblem of death (leather inscribed with wounds and therefore a body of burning flesh and blood) as if it were clothing, and sometimes uses it as a blanket to cover herself. Sometimes it even works like a screen onto which the world’s agony, violence and disputes are projected.
In Greek, anaphora means remembrance and anamnesis means recollection – a memory deeper than remembrance, an archetypal memory, a memory of existence in its original state. In addition, hesychia refers to inner tranquillity. These three words are central to the work of Lee Minha and provide contextual insights based in humanities. It can be inferred that Lee aims to remind us of the archetypal existence while restoring and reconstructing the original state of existence. Only after we’ve experienced a process of self-reflection that forces us confront ‘true self’ (all of which perhaps leads to regeneration beyond death, and therefore can be seen as reform as well as cleansing rituals), can we regain inner tranquillity. Art is a narrative technique. The act of writing stories on leather can be compared to the act of writing a book. The book can be completed through the culturology of confessions that delicately weaves together the sacred and the profane, wounds and cures, violence and sacrifice (or Violence and the Sacred according to René Girard) as well as amusement and religious rites.
from the Solo Exhibition Catalog September.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