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3 개인전 평문 – 감정을 만나는 거울

이민하 – 감정을 만나는 거울
박영택(미술평론, 경기대 교수)

커다란 장지(長紙)에 먹과 청묵(靑墨), 분채(粉彩), 색연필 등으로 무수한 선을 그어 날개와 같은 덩어리를 그려 보이고 있다. 날개 한 쪽만이 화면에 매달려 있는 형국인데 그것은 특정한 새의 날개라기보다는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우리들 의식 속에 떠오르는 그런 날개 이미지를 닮았다. 날개는 새뿐만 아니라 천사나 신선들도 달고 다녔고 다 빈치(Da Vinci)보다 훨씬 앞서 다이달루스(Daidalos)같은 이는 아예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달고 다녔던 것 등을 보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옛사람들은 날개에 대한 강렬한 동경이 있었던 것 같다. 고구려들은 사람이 죽으면 관에 새의 커다란 날개를 부장(副葬)해 주었는가 하면 새의 깃털을 관모(冠帽)라 해서 꽂기도 하고 이후 한복의 옷 선이나 한옥의 처마 등이 모두 그 날개에 대한 동경과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중력의 법칙에 저당 잡힌 인간들이 이 현실계로부터의 비상이나 탈출을 꿈꿀 때면 흔히 새의 날개를 떠올렸던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다소 상투적이지만 자유의지나 기존 사회의 틀과 관습, 가치에 대한 도전 등을 표현하기 위해 흔히 날개 이미지가 차용되곤 한다. 날개는 비상이나 초월, 탈중력과 관계있기도 하지만 이민하의 경우 이 날개는 특정한 날개 이미지나 앞서 언급한 의미망에서 조금 벗어나 보인다. 여기서 날개 이미지는 순수 조형적 측면에서 차용되고 있는 듯하며 날개 형상이 선의 증식과 어디론가의 지향성, 유동적인 운동감과 생명성의 충일 등을 가시화하는데 적절한 형태로 다가오고 아울러 추상적인 선의 표현보다 다소의 구체성을 지닌, 그래서 망막에 대한 호소와 집중에 효과적인 편이라 차용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렇다고 실존적인 내용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날개 형상의 내부는 촘촘한 선들이 머리카락처럼, 나무뿌리나 호흡처럼 들러붙고 치밀하게 결구(結構)되어 마냥 증식되어 나가는 형국, 그 기간과 시간성을 보여준다. 결국 이 작가는 선을 가시화하고 선의 쓰임과 용례, 선의 표현과 동양화의 전통적인 선의 의미에 대한 ‘스터디’의 차원에서 날개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아울러 이 말개 형상을 한 검은 덩어리는 매우 커다란 크기를 보여준다. 사람의 신체성을 넘어서는 크기는 막막함과 숭고함, 두려움과 압도감을 준다. 장지를 몇 장씩 잇대어 붙여놓고 그 가운데로 연기처럼, 구름처럼 풀려나가는 검은 선들의 궤적과 집저근 마치 종이(화면, 날개)가 공간 속으로 미끄러지고 잠입하듯이 지나가며 무한히 팽창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횡적인 팽창과 종적인 팽창을 교대로 보여주는 화면은 각각 시선을 가로막는 무한함과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깊이감을 안겨준다. 이 거대함은 우선 작가에게는 수고스러운 노동과 수련을 안겨준다. 그것은 자기 치유적이기도 하고 극기, 초월에 좀 더 가까운 행위이다.

또한 광활한 화면에 무수한 긋기라는 신체성의 행위를 통해 무언가를 행해 나가는 이 작업은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순간순간 자신으로 몰입하는 그 시간성을 중요하게 알려준다. 종이의 단면은 막연한 공간이며 벽이고 그림 그리는 순간마다 불가피하게 맞닥뜨리는 공포를 안겨주는 실존적 장아리면 그 공간에 그리면서 만드는 행위를 온전히 올려놓고 있다는 인상이다. 어쨌든 이 큰 크기는 작가 자신의 노동의 흔적을 좀 더 확연하게 보여주기 위한 공간으로 선택되었다. 동시에 그 밑자락에는 숭고함과 종교성의 자취도 어른거린다. 숭고함과 정신주의에 대한 이미지의 증좌(證左)!

작가는 자잘한 선들을 채워 넣어 검은 덩어리를 만들었다. 여기서 선들은 무엇인가를 재현하려는 목적성을 지운 채 그것 자체로 의미 있는 생애를 살려고 한다. 선이 지시성과 명시성, 재현의 덫에서 풀려나 스스로의 존재를 형성해 나가는 그런 그림이다. 대부분 먹으로 그려나간 선들은 검은 색채 덩어리나 실타래, 검정 깃털로 이루어진 날개를 그려 보인다. 작가는 이 검은 색채로만 이루어진 단색의 화면에 어둡고 두려운 미지의 영역이란 의미를 얹어 놓았다. 그런가 하면 이 검은색은 타자를 억누르고 싶어 하는 욕망과도 관련이 있단다. 동시에 검정(어둠)은 모든 만물의 근원이자 싹을 틔우는 자궁의 역할과 관련되기도 하고 현(玄)이라 해서 모든 색을 가능하게 하는 긍정의 의미도 지녔다. 특히 이 검은색은 작가에게 무한한 깊이와 경이로움을 주기에 선택되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관자에게 이 그림을 통해 외경, 공포, 숭고, 찬탄과 같은 감정을 만나는 거울로 자기라길 원한다. 구체적인 대상이 지워진 단색의 화면을 통해 관자들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거울이기를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그림은 기존의 그림/작품과는 거리를 둔 채,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재현하기 보다는 그림을 화두 삼아 직관적으로 깨닫고 느끼게 하는 일종의 선화(禪畵)적 요소가 강하게 감지된다. 이는 시욕과 볼거리가 흘러넘치는 동시대의 미술에 역설적으로 침묵과 빈궁한 이미지를 제공하면서 관조와 직관의 힘을 환기시키는 편에 가깝다. 우리는 작가가 그려놓은 검고 어두우며 커다한 새의 날개 이미지 앞에 직립해 있으면 순수한 선의 생명력과 충일, 동시에 무한함과 숭고함을 주는 비의(秘儀)적 체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그림은 설치적 회화이며 공간과 관자의 신체에 관여하는 수묵화, 수묵 드로잉이기도 하며 나아가 새삼 정신적 활력을 자극하는 직관적, 관조적 그림의 한 측면을 드러낸다.

2007년 3월 토포하우스 개인전 평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