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위로 사이: 이민하 작가의 향락적 관점에 대하여
전진성 (부산교대 교수, 역사학자)
“나는 상해를 입은 중에도 영혼의 깊이를 지니고 소소한 체험에도 나락으로 떨어질 자를 애호한다. 그런 자라야 기꺼이 다리를 건널 터이니.” 프리드리히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
미와 추는 구태의연한 고전 미학적 대립 구도이다. 순수한 아름다움이 더 이상 미술의 존재근거일 수 없듯이 추함 그 자체도 더는 관람자의 이목을 끌지 못한다. 이민하 작가의 오브제들은 미추의 범주로는 담을 수 없는 생소한 체험, 어딘가 야릇하면서도 편치 않은 느낌을 자극한다. 2023년 인천 소재 아트플러그연수에 전시되었던 〈삶의 뒤집힌 안쪽〉은 제목 그대로 일견 번듯해 보이는 일상적 삶의 안쪽 모습, 그 적나라한 진상을 드러냄으로써 관람자를 난처하게 만든다. 차마 동의할 수도, 그렇다고 쉽사리 부인할 수도 없는 실존적 삶의 환유(換喩)는 감동적이지도, 역겹지도 않다. 그것은 우리에게 진한 상념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이 전시는 이민하 작가의 장기적 프로젝트인 <출산과 학살 사이>의 일환이라 하는데, 개인과 인류의 보편적인 출발점인 출산을 통상적인 의미화 방식과는 전혀 달리 작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문제화했다. 여기서 출산은 탄생의 축복과 기쁨이 아니라 비극적 사건으로 다루어진다. 괴물같이 생긴 낯선 존재의 등장은 아이의 울음이 웅변하듯이 주변환경과 불편한 첫 대면을 갖는다. 이 전시의 가장 핵심적인 모티프인 갓난아기는 사랑스럽기는커녕 기괴해 보인다. 신생아가 웅크리고 기지개하는 동작을 3D 프린팅으로 뽑아낸 플라스틱 조형물 위에 수십 번 옻칠하여 사포로 갈고 닦기를 반복한 결과 지나치게 반들반들하여 친근하기보다는 오히려 꺼림직해 보이는 오브제가 등장했다. 천장에서 줄을 내려 설치한 둥그런 판 위에 웅크리고 있는 아기들은 심지어 북(鼓)의 형태를 띤 등짝을 내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실은 무두질한 돼지가죽이다. 악기로 둔갑한 아기의 등은 삶의 흥취가 아니라 잔혹함을 – 실제로 많은 악기가 동물 가죽으로 만들어진다 – 암시한다. 옆의 다른 판 위에는 옻칠을 한 귀와 코 조각들이 놓여있어 섬뜩한 느낌을 주며, 또 다른 한 편에서 올려보는 자세로 서 있는 아기의 형상도 마치 안아달라는 듯 양팔을 펼치며 웃고는 있지만 그 번들번들한 표면의 질감과 색상으로 인해 마치 고분에서 출토된 색바랜 유물처럼 낯설어 보인다. 그것은 결코 사랑스러운 내 아기의 모습이 아니다.
인간의 몸과 동물 가죽이 가히 포스트휴먼적으로 착종된 이민하의 작품들은 출산과 결부된 모든 상징적 의미를 ‘괄호치고’ 실존의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한다. 여성의 출산이란 실로 낯설고 충격적인 체험이다. 그것은 사실상 모체의 일시적인 죽음을 동반한다. 동물의 탄생과는 달리 인간의 탄생이 근본적으로 비극적인 것은 그것이 생물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폭력적 살인에 가깝다. 원초적 죽음충동(thanatos)이라기보다는 – 섹스의 경우가 그렇다 – 자신이 태어나기 위해 어미를 죽이는 사악한 몸부림이다. 아기의 첫울음에는 성취의 탄성과 출발의 두려움이 뒤섞여있다. 그것은 자연으로부터의 탈출 – 실낙원 – 이라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삶이 죽음이요, 죽음이 곧 삶이라는 불교적 교의는 지나치게 자연주의적이다. 인간의 출생과 임종은 그러한 생물학적 순환론에서 벗어난 전혀 다른 시간대에 존재한다. 그것은 흔히 ‘역사’라고 불린다. 역사는 생로병사의 순환이 아니라 끔찍한 돌연변이가 출현하는 사건이며, 정의와 영광보다는 폭력과 죄악의 흔적이고 노스탤지어보다는 트라우마에 가깝다.
이민하는 2009년의 전시 〈The Monument〉 이래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을 우리 삶의 기억을 근본적으로 되짚어보는 일종의 발견도구로 활용해왔다. 2021년의 사운드 설치 작품인 〈습작〉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녀가 환기시키고자 하는 역사적 기억은 종래의 기념비적 기억 방식 –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말했던 “기념비적 역사”! – 을 반성하고 회고하는 이른바 ‘반기념비(countermonument)’의 면모를 뚜렷이 보여준다. 그녀는 무엇보다 폭력의 체험과 기억을 단지 단발적인 도덕적 참회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을 지배하는 원초적 트라우마로서 탐색하고 재현한다. 그것은 멀리 있는 남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숨겨둔 이야기다.
이민하의 작품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동물 가죽의 모티프는 원초적 삶이 지녔던 가학성을 암시한다. 〈삶의 뒤집힌 안쪽〉 전시의 일부로 야외에 설치된 〈Ravages〉는 무두질한 소가죽을 집었다 올렸다 하면서 찢는 기계 팔의 동작을 보여주는데, 갈퀴로 유린당하는 생명을 연상시키는 이 잔혹한 움직임은 통상적인 예술작품들처럼 비판적 거리두기는커녕 오히려 가학적이며 다분히 탐닉적이다. 이 야외 설치물과 연관해서 보면, 출산에 대한 그녀의 시각도 단지 비판적으로 – 페미니스트적 –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녀는 폭력을 주제화하며 자신 내면의 증상을 고백하고 즐기며 번민한다. 서울 종로구 소재 수림큐브에서의 2023/2024년도 전시 〈폭격의 자장가〉도 전쟁과 평화의 이미지를 도덕적으로 대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가죽 타는 냄새와 진동을 느끼며 온몸으로, 공감각적으로 체험해보도록 유도한다. 어쩌면 전쟁과 평화, 고통과 쾌락, 체험과 성찰, 가해자와 피해자,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은 그저 동일자의 다른 이름들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민하의 작품을 그저 사도마조히즘적인 탐닉으로 규정한다면 그건 애석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결코 폭력을 미화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로부터 위로하는 역할을 작가적 정체성의 기반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아트플러그연수와 수림큐브 전시에서 모두 등장하는 17분 길이의 대형 영상작품인 〈허물, 체액, 범람〉은 ‘정상적’이지 못한 임신과 출산, 양육의 과정을 겪으며 상처입고 소외된 존재들에 바치는 아름다운 위로의 제의다. 국적과 인종, 연령이 모두 다른 4명의 여인들이 알아듣기 힘들게 읊조리는 자기 고백과 퍼포먼스, 그리고 마치 이를 품어 안을 듯 제사장의 옷을 걸친 작가의 퍼포먼스, 그리고 뜨거운 물로 곧 녹아내리는 각설탕 만다라는 새 생명의 탄생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고통과 파괴,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의 종교적-예술적 승화를 보여준다. 물론 작가의 태도는 정신적이기보다는 물질적이다. 인간의 몸과 동물 가죽이 뒤섞이고 성스럽게 묘사되어야 할 모성은 “허물, 체액, 범람”의 차원으로 신체화/물질화된다. 결국 위로받아야 할 것은 특정한 고통이 아니라 그야말로 나와 타자의 삶 전체인 것이다.
과연 폭력의 적나라한 재현과 상처받은 이들의 위로는 양립 가능한가? 만약 도덕적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위선일 것이다. 그렇지만 고통의 체험에 세심하게 접근하는 일은 예술가 본연의 책무다. 그 고통이 단지 개개의 죄악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인간 실존에 뿌리 깊게 내재한 것이라면 그 고통을 온전히 감내할 필요가 있다. 폭력의 변호와 위로의 선행 사이에서 실재하는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면하여 그 자체로 향유하는 태도는 한마디로 ‘향락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 정신분석학자 라깡(Jacques Lacan)의 ‘주이상스(jouissance)’ 개념과 굳이 연결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민하의 접근법은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반전시키는 특유의 종교-예술적 관점, 좀 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인간학적’ 관점을 선보인다.
이민하의 작품들은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출생(natality)’ 개념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 인간은 단순히 번식을 통해 종을 보존하거나 아니면 과거의 유산을 미래로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출생을 통해 매번 새롭게 출발한다. 내가 내 자식에게 내 모든 것을 전수해주려고 하더라도 나는 결국 죽어버리고 내 자식은 나와는 결코 같아질 수 없다. 기껏 닮아보려 해봤자 자식은 부모의 아류가 될 뿐이다. 이는 실로 비극적이지만 인간만의 ‘역사’를 이루는 근간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역사의 탯줄을 끊고 늘 새롭게 시작해야 하며 우발적인 현재를 통해 과거와 미래는 늘 새롭게 조합된다. – 따라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따위란 있을 수 없다! – 갓난아기가 이름을 얻음으로써 부모도 삶의 의미를 새로이 발견한다. 이러한 시간의 궤적은 철학자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가 말했던 “여성적 시간(le temps des femmes)”과 유사하다. 임신과 출산이 부과하는 여성만의 시간은 늘 그래왔지만 아직도 완료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래완료’의 시간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미래에는 희망이 아니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출생과 죽음은 늘 존재해왔던, 앞으로도 존재할 가능성이다. 우리가 죽어도, 아니 우리를 죽임으로써 역사는 지속된다.
이민하 작가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희극적이다. 우리 인간에게,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인류의 역사에 주어진 비극적 숙명을 거의 니체식으로 긍정하며 특유의 ‘향락’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란 모름지기 솔직해야 한다. 지식인의 가식을 던져버린 채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타자화하여 모성의 가치를 문제시하고 폭력의 실존적 내재성을 화두로 꺼내는 태도, 고통을 대상화하여 즐기는 내면적 여유, 화학 재료를 사용하는 대신 옛 방식의 무두질을 고집하는 끈기는 작가주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가 자신의 증상을 직시하는 태도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 젊은 예술가가 앞으로도 계속 향락적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