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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3 폭력 안에서 다르게 – 다른 쪽으로 (양효실)

폭력 안에서 다르게 – 다른 쪽으로

양효실 (미학자, 미술비평)

카프카의 단편 「유형지에서(1919)」는 그의 전작(全作) 중 “잔혹함과 끔찍함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한 폭력의 판타지가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나는”(장혜순, 34) 단편이다. 죄수의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갈 때까지 몸 위에 바늘로 글을 새기는 처형 방식이 단편의 전경을 차지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두 달 뒤에 집필한 작품으로 맥락화한다면 현실-정치-폭력의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연인 펠리체 바우어와 약혼하고 파혼하는 과정의 심리적 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읽는다면 카프카 개인의 사적-정신적 붕괴의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고문기계인 침대에 누워 고문 바늘인 써레가 “네 상관을 공경하라”를 적는 동안 죽어갈 죄수의 죄는 카프카의 인물들이 겪는 형벌이 이유 없는 박해이듯이 이유가 거의 없다. “불침번을 서야 할 야간 시간에 당번병으로서 잠을 잤다”는 게 “불복종과 상관모욕”의 증거이다. 유럽의 식민지인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인 듯 보이는 유형지에서 유럽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원주민-희생양-죄수들에 대한 처형은 지금껏 “재래식 처형방법”을 발명한 전임사령관의 충복인 장교가 집행해왔고, 신임사령관은 당연히 이 낡고 잔인한 기계를 없애려고 하고 있다. 백인 장교-사디스트-처형자는 말미에 갑자기 죄수를 풀어주고 마조히스트-피해자를 자처하며 침대 위로 올라가 긴 시간, 대략 12시간이나 지속되기 마련인 고통을 겪으며-즐기며(!) 죽으려하지만 너무 오래 글자를 써온 써레의 오작동으로 인해 장교는 즉사한다. 아이러니! 줄곧 냉정하고 중립적인 관찰자로 이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달한 탐험가, “유형지의 주민도 아니고 이 유형지가 소속된 국가의 국민도 아니었던” 탐험가가 유형지를 떠나며 단편은 끝이 난다

(나는 식민자도 피식민자도 아닌 탐험가의 ‘자리’, 이분법적 대립의 현실 바깥의 어떤 자리, 카프카가 위치한 자리를 응시한다. 공모도 저항도 아닌,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자리, 이 글이 다룰 이민하 작가의 자리 같아 보이기도 하는 자리를. )

나는 2019년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작가 오픈 스튜디오 프로그램에서 이민하 작가(이하 작가로 통칭)의 대표 사물-오브제라 할 무두질한 가죽을 처음 본다.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거나 벽에 걸린 짐승 가죽은 일순간 살코기나 내장에 의지하지 않고도 스튜디오를 도살장이나 푸주간으로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런 ‘환각’은 내게는 좋은 경험이었다. 시각적 강렬함과 감각적 전치를 겪으며 나는 좁은 미술계에서 또 보게 되겠군, 생각하며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2023년 개인전 《폭격의 자장가》 리뷰를 부탁하는 수림문화재단의 메일을 받는다.

죽어가는 동물의 육체성이 제거된 가죽-사물을 바탕으로 근대 민족-국가 및 제국주의에 의해 자행된 폭력을 소환하고, 미적으로 전유하는 작가의 작업은 일견 희생자 공동체를 위한 제의를 주관하는 제사장-주술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작가의 제의의 형식이 기괴하고 모호하기에 연상 작용은 어느 순간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가죽 공예의 소재인 무두질한 가죽을 이어 붙여 전시 공간의 벽에 걸맞는 세계 지도 형태로 만들어 걸거나 전시 테이블 위에 펼친 후 작가는 그 위에 그녀가 ‘플로터’라고 부르는 특수하게 제작된 장치를 설치하고, 가죽에 글을 새기는 작업을 한다. 짐승의 피부에 소유주의 이름-문장을 새기는 인두-불도장이 플로터 끝에 부착되어 있다. 레지던시를 오가며 작업하는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이 지역에 대한 리서치에 기반해 지역의 역사-이야기를 복원하는 형식은 작가에게도 영향을 미친 게 사실이다. “대전 지역에서 1950년대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들의 좌표 제시”를 의도로 삼고 “빨갱이”와 “부역자”라는 낙인을 계속 가죽 위에 찍고 새기는 〈이분법과 맹목성, 2021〉이나 아우슈비츠, 광주, 난징과 같은 대학살의 현장을 세계 지도에 표식하면서 그 장소 위에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나 “나무아비타불” 같은 기도문을 쓰는 〈그을린 세계, 2018〉, 혹은 세 장의 소가죽을 대상으로 폭력을 자행하는 세 대의 기계-퍼포머가 등장하는 <Ravages, 2023>와 같은 작업은 가죽과 기계의 ‘관계’라는 동일 조건 속에서 다른 상황, 쾌락을 모색한다. 내게는 낙인찍기, 애도, 현실에 만연한 물리적 폭력의 알레고리적 반복으로 차별화되어 읽혔다. 폭력은 그 자체 나쁜 것이라는 도덕적 반응이나 피해-당사자 편에 있다고 가정된 작가들 일반에 대한 기대가 미끄러진다. 이민하 작가는 역사의 폭력에 분노하고, 미시사가 발굴한 고통을 위로하고, 가죽과 기계의 폭력적 관계를 ‘즐긴다’(jouir).

작가의 작업을 읽으려는 내가 참조한 전(前) 경험은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관계’ 혹은 불가능한 이미지인 “수술대 위의 우산과 재봉틀”이었다. (무두질한)짐승 가죽과 작가가 협업자의 도움을 빌려 발명한 고문-글쓰기 기계의 병치는 일견 일상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전혀 연결불가능한 사물-이미지-기표들의 관계를 조성한다. 수술대, 우산, 재봉틀은 무의식에서, 도착적인 성적 연상 속에서나 연결가능하다. 의식의 관성이나 폭력을 위반하는 무의식적 연상의 힘에 기댄 초현실주의적 이미지(상징계적 질서-논리를 찢는)를 통해 나는 작가의 가죽 대(對) 기계의 대치나 ‘관계’를 우선 이해했다. 아니 기억 속에 다행히 그 이미지가 있었다. 동물성이 거의 제거된 가죽과 인간성이 겨우 읽히는 기계는 서로를 상대할 수 있고 견딜 수 있다. 미적 장에서라면. 초자아의 강력한 작용 속에서도 고개를 쳐드는 ‘이드’의 힘 때문에 보기-감상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금기와 위반의 동시성을 알고 즐기는 이들은 몰래 즐길 것이다. 가축의 엉덩이에 ‘소유자’의 이름-엠블렘을 찍는 불도장이 폭력의 반복과 동시에 고통의 위로에 사용된다.

동시대 전시장은 정치적 올바름 함양과 미적 향유가 따로따로 혹은 동시에 일어나는 장소이다. 근래의 전시는 휴머니즘적 계몽과 포스트휴머니즘적 (탈)승화 사이에서 혹은 그 둘을 동시에 끌고 가며 의식의 검열과 욕망의 탈주를 관리한다. 이민하 작가의 전시는 내가 보기에는 그 둘이 중첩된, 공존하는 전시로 보인다. <유형지에서>의 가해자 장교가 최후의 처형자이자 피학살자로서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기계와 함께 사라지려한 장면은 유형지의 폭력을 무구한 원주민에 공감하며 읽고 있던 독자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카프카는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거스르며 불가능한 자리, 폭력이 쾌락과 겹쳐지는 글쓰기가 일어나는 자리를 꿰차고 쓰는 자의 예외성을 즐긴다. 글쓰기는 현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현실이 붕괴되는 미적인 것에 바쳐져야 한다.

나는 카프카의 <유형지에서>를 다시 읽었고 카프카의 도착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국내 카프카 연구자의 논문 두 편을 인용할 것이다. 우산과 재봉틀 다음으로 내가 주문한 ‘전(前)경험’이 <유형지에서>였기 때문이고, 국내 카프카 연구자의 수준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가령 고문기계가 “남성의 성적인 역할”을 대행하는 “찌르고 관통하는 기관”을 연상시킨다는 것, 그리고 직접적으로 몸에 글을 쓰는 쾌락(에로스)과 그 몸을 죽이는/거세시키는 행위(타나토스)가 중첩되어 있다는 연구자 변난수의 관점, 또 “폭력이란 가면 뒤에 숨겨진 성적 욕망의 형상화”, 혹은 “에로스와 타나토스, 지배와 피지배, 능동과 수동, 명예와 수치, 용기와 굴종,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양축”을 번갈아 사용하는 이 소설이 “예술적이고 미로 같은 전임 사령관의 도안은 메시지를 전하는 계몽주의 문학 선상의 흐름을 벗어나 문학의 자율성을 표방하는 오나먼트(ornament)로 특징지어지는 현대문학의 미적 경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드러낸다고 분석한 장혜순의 관점은 이분법적인 시선의 명료성을 교란하는 역설과 모순의 자리를 주장한다. 예술이 더 나은 현실을 위한 것이라면 폭력에 맞서 비폭력을, 피해자의 아픔과 고통의 우선성을 예술은 내걸어야 한다. 맞다. 그리고 현실의 도구나 기능이 아닌 예술의 (상대적)자율성이 예술의 현실적 기능이나 초(hyper)-현실적 역할이라면 폭력을 구조화하는 예술의 차이를 보유해야한다. 이미 예술은 줄곧 그런 폭력과 비폭력,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이 허물어지는, 능동과 수동이나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이 작동할 수 없는 예외적 자리를 붙들고 생존해왔기 때문이다. 혹은 비폭력과 정치적 올바름의 긴급함에 반응하는 예술의 사회성이나 책임을 예시하는 무수한 작업들이 있다. 그리고 카프카는 사디스트-가해자와 마조히스트-피해자의 관계가 일방향적일/단선적일 수 없는 어떤 불가능한 자리에서 “즐기기” 위해, 즉 현실과 법은 읽어낼/볼 수 없는 모호한 자리를 꿰찬 채로 “미적 경험”의 예외성, 혹은 특수성을 공표한다. 변난수나 장혜순의 카프카 읽기는 상상의 폭력, 작가가 발명한 폭력의 무대가 어떻게 현실 폭력을 인용하면서도 그것과는 다른 폭력의 장면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이해를 도모한다. 말하자면 나는 이민하 작가의 작업을 “감상”하면서 곧장 현실 폭력을 떠올리고 도덕적으로 반응하는 (기계적)반작용이 아닌, 폭력 안에서 폭력을 구조화하는 주관적인 형식을 읽었던 것이고 그것이 예술의 예외성, 특수성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살점이 제거된 짐승 가죽을 뜯고 찢는, 인간의 포스트휴먼적 대체물인 세 대의 기계로 구성된 설치 작품 <Ravages>가 전시예정이었던 장소에서 밀려난 것도, 사람들이 정확히 불편함의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불편을 토로한 것도 이해 못할 일이 아니다. 그 작품을 즐기는 미적 감상자와 그 작품을 불편해하는 도덕적-의식적 감상자는 모두 예술의 감상자들이다. 혹은 예술이 도덕-윤리의 수단이 아니라 도덕-윤리와 새로운 ‘관계’를 조성하는 방법이다.

나는 항간에서는 변태심리로 분류하고 예술가들에게서는 거의 상수로 작동하는 듯한 사도마조히즘적인 경향에 슬며시 이민하 작가를 끌어들인다. 작가와의 인터뷰 중에 나는 유소년기 무지막지한 독서광이었던 작가의 독서가 얼마나 들쭉날쭉했는지에 대해 듣는다. 언니오빠를 위한 큰아버지의 선물이었던 책장의 문학 전집을 작가는 <제인에어> 다음에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이나 폴린 레아주의 <o 이야기(story of 0)>를 읽는 식으로 ‘독학’했고, 이후 포르노, 스너프 필름, 고어, 할리퀸 등등 성-폭력-전쟁-죽음이 분리불가능하게 얽혀 있는 “바깥”에 대한 성향을 체화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가해자-장교와 같은 인물들이 ‘주연‘으로 움직이는, 피해자들의 이름-목소리는 적히지 않은 도착적 텍스트이다. 우리는 그런 전쟁의 승리자이자 역사의 처벌을 받은 이들의 이름들, ’행위들‘ 사이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 ’원주민들‘을 기억하려고 하거나 쓰여진 승리자의 이름들에 압도당할 것이다―우리의 내부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이긴 자가 옳은 자라는 병리적 앎을 각인하는 고문 기계이다. 나는 도덕보다 먼저 불온한 감각들, 욕망들을 체화한 이민하 작가에게서 물론 나를 보기도 한다.

내게 ’폭력 한 가운데 미적인 것‘이라는 모순적인 사태를 글자그대로 떠올리게 한 작가의 작품은 <상흔(Stigma), 2019>이다. 역시 가죽 공예에서 차용한 물성형 기법이 현실에 대한 상상적 개입의 중요한 형식으로 활용되고 있는 <상흔>은 먼나라 독일의 나치 치하에서 자행된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거기에 착안해 만든 작품이다. 작가 자신의 몸과 마네킹을 이용해서 사진촬영, 3D데이터화, 캐스팅 등등의 상당히 복잡한 공정을 거친 이 고문당하고 쓰러지고 사라지고 죽어가는 젠더리스한 형상은 나치 정권이 제정한 유전증 근절법(eradication of law)에 대한 작가의 읽기에 기반한다. 정신병, 유전병, 반사회적 성향, 동성애자 등을 포함한 ‘열등분자들’을 안락사시키려는 법의 폭력에 대한 ‘문서’가 소재가 된 작업임에도 가죽을 뒤집어쓴, 바로 지금 피부에 ‘죄’가 새겨지고 있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상상은 이들 필멸의 가죽-신체의 모호한 제스쳐, 로버트 롱고의 모노크롬 회화 연작 <도시인(men in the cities)>의 유니폼을 입은 도시인들이 총에 맞은 듯 춤을 추는 듯 보이는 어떤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듯이 이분법적 대치가 허물어지는 어떤 순간이 일으키는 시적 아름다움을 현시한다. 규범과 정상에서 밀려난, 극한으로 내몰린, 취약한 생존 자체를 속수무책으로 드러내는 존재가 아름답다. 가해자-되기의 욕망을 가르치는 현실-세계에서 예술은 실패나 추락의 제스처, 부정적인 것의 시(!)를 보유하고 현시한다. 시는 재현불가능한 해독불가능한 신체에서 막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는 이미지에 대한 것이다 <상흔>은 그런 이미지를 일종의 조각으로서, 그러나 입체인 척 조작된 가죽의 기괴함을 첨가해서 붙든다. 지금도 아니 더욱 강하게 작동하는, 편재하는 우생학적-우파적 관점은 타자와 죽음을 가시적 공동체에서 제거하려는 나치의 욕망-태도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작가는 자신에게 도착한, 자신이 수신한 공예적 사물들, 기법들을 이용해서 시적-미적이면서 동시에 폭력적-SM적인 무대를 만들었다.

2015년 이후의 페미니즘, 혹은 그 외 다양한 소수자 담론들이 정치적 올바름의 수사를 통해 과잉과 위반에 탐닉하는 예술의 자율성이나 특수성을 문제 삼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미 항상 불평등한 (권력-)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나와 너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평등과 상호성의 환상/이상을 실현할 것이고 대체로는 일방향성과 폭력의 징후를 담지한 채일 것이다. 데리다의 “폭력의 바깥은 없다”는 비관적인 단언을 나는 동시대 윤리가 그럼에도 시작해야할  기반으로 생각하기에, 이미 항상 불평등한 관계를 아주 잠시 ‘평등’의 사건으로 바꾸는 지점, 틈에 대해, 올바르게 읽을 수 없는 모호한 사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죽에 대한 기계의 개입이 폭력에 대한 공모이자 고통에 대한 위로라는 모순에 대해, 가죽과 기계의 관계가 춤과 살육으로 동시에 읽히는 교란에 대해, 스러지는 고통받는 신체의 시적 제스쳐라는 역설에 대해 이민하 작가 덕분에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사실 설득과 해석이 필요한 장면이라기보다는 반응과 응시를 요구하는 장면이다. 지적 냉소와 과도한 파토스 사이 어딘가를 보도록 연출된.  결국 예술은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재)표식하면서도 현실의 반영이나 도덕의 반복이 아닌 어떤 잔여, 부스러기 같은 것이니까.

그리고 작가의 몸이 직접 등장하는 퍼포먼스들이 두 번째로 시선에 들어온다. 작가가 전체 장면을 구조화하고 무대에 올리는 비가시적인 연출가가 아니라 당사자-퍼포머들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고-나눠주는 제물이자 제사장으로 등장하는.

가령 영상 <아남네시스(Anamnesis>, 2017>는 결혼이나 취업을 이유로 한국으로 이주해 외부자로 살고 있는 이주 여성들과의 협업이다. 이주 여성들은 이곳 여성 집단 내 소수자로서 차별과 혐오의 언어가 상시적으로 자신의 의식 내지 피부에 쓰여지고 있는 이들이다. 작가는 이번에는 가축에게 소유주의 엠블렘을 찍는 불도장을 당사자 여성들에게 쥐어주고, 이번에는 가죽의 아래 누운 자신이 덮은 가죽 위에 그들이 기억하는 부정적 언어를 새기도록 디렉션을 주었다. 가해자-사디스트의 전유물인 인두를 피해자-마조히스트가 쥐고 상징계적 언어의 폭력과 정서적 슬픔의 언어를 ‘재’-각인하는 과정은 결국 폭력을 글쓰기로, 여성들 각자의 모국어와 글쓰기 스타일이 나타나는 차이의 퍼포먼스로 바뀌게 된다. 우리는 언어의 내용이 아니라 언어의 차이, 폭력적 표면-가죽이 심미적 바탕-무늬로 변용되는 과정을 보게 된다. 이것은 언어 폭력이 한국어가 아니기에 읽을 수 없는 기호-이미지로 바뀌는 사건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용의 밑바닥, ‘아래’에 숨을 쉬는 작가의 몸이 있다. 혼자서는 상처이지만 모이면 노래가 되고 긍정이 되는 변용이 슬픔의 공동체의 주장이고 ‘가치’라면 여기서도 그렇다.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벌이는 제의가 아닌, 당사자 곁의 작가가 ‘꾸민’ 제의에 동원된 당사자들, 살이 타는 냄새를 내며 지지직 타들어가는 불도장-인두로 그들은 반복과 차이의 노동을 즐기고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사회의 문제는 당사자의 미적인 행위를 위한 소재로 전유되고 있다. 현실의 고통은 예술의 즐김을 위한 알리바이, 소재, 원료이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한 채 하고 있는, 수동적 능동성의 행위가 어떤 차이, 사건으로서의 대안으로 출현한다. 그리고 이런 협업자들이 이런 변용을 겪는 동안 작가는 바탕보다 더 밑에, 눈을 감고 들숨과 날숨을 느끼며, 오직 순간에 즉해서 있다. 가죽과 자신의 숨쉬기를 공유하면서, 가죽의 무게를 감각하면서, 타들어가는 피부의 냄새를 체현하면서 작가 역시 어떤 변용을 겪고 있었을 것이다. 이 제사장은 동시에 제물로서, <유형지에서>의 장교처럼 즐긴다.

“2019년 11월말 임신 8개월”의 임산부의 몸으로 참여한 퍼포먼스를 영상화한 작업 <통로(Passages), 2021>는 임신한 예술가가 글자그대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역시나 놀랍고 강렬하고 담대한 작업이다. 무대의 ‘내부’는 일본이나 한국의 산실(産室)에 대한 리서치에 근거해서 백색의 천에 둘러싸였고, 작가는 퍼포머들의 손에 이끌려 중앙의 제단 위로 올라가 눕는다. 임신을 둘러싼 수많은 금기를 거스르며 작가는 자신의 부풀어 오른 배를 상처 입은 4명의 당사자들이 만다라를 그릴 바탕으로 내어준다. 이번에 글쓰기는 작가의 있는 그대로의 몸, 배, 8개월된 생명체도 공유하는 바깥-피부이다. 퍼포머들은 붓을 들고 만다라를 바로 그곳에 그린다. 자신의 임신을 사회에서 유통하는 문화적 관습을 거스르며 작업의 소재이자 일부로 끌어들이다니, 사실 좀 놀라웠다. 더러움과 어려움, 불안 등등의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고 이곳으로 옮겨야하는 임산부의 사회-문화적 임무가 간단히 밀쳐지고, 여기서 작가의 임신한 몸은 부정적인 것을 변용시키는 제단, 제물, 알레고리로 전치되어 있다. 작가는 당사자로서 남성 문화 안에서 임산부가 어떻게 남성 주인의 소유물-자산으로 취급당하는지를 겪었다고 했다. 어떻게 병원이 임산부를 의사와 기관의 효율성을 위한 대상으로 관리하는지를 목격했다고 했다. 작가는 그런 경험을 고발과 고백의 소재로 사용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작업이 아니라 지금껏 자신이 실험해온 ‘가죽-피부’ 위에 폭력과 고통과 슬픔을 찍고 새기는 작업의 새로운 바탕으로 자신의 임신한 몸을 사용했다. 이번에도 작가는 눈을 감고 제단 위에 누웠고 무늬를 새겼고 당사자를 뺀 채 작동하는 임신-출산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지 않는 “신성한” 장소를 전유했다. 당사자-퍼포머들이 얇은 목판지 위에 적은/그린 문장들을 씻은 물을 유리그릇에 모은 뒤 망설임 없이 마시는 장면은 이민하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결단, 결기 같은 것을 시각적으로 보충하는 결정적인 장면으로 보였다. 이 더러운, 이 상처를 씻은, 이 치유와 재생을 기원하는 “성수(聖水)”(!)를 뱃 속의 아이, 무구한 미지의 생명도 나눠 마신 것이고, 그러므로 이런 제의는 최초이다. 임산부와 뱃속의 아이가 함께 협업자로 참여한 이 둘(double)이 마련한 제단의 퍼포먼스는 곧 아이가 거칠 “통로”에서 상연되었다. 그리고 출연자들이 모두 양막을 뒤집어쓰고 뱃속의 아이를 미메시스하는 마지막 장면 직전에 우리는 작가가 고고학적 임신출산 관련 이미지들에서 “발견한”, 근대적 병원의 등장 이후로는 사라진 출산의 전근대적 형식, 즉 서서 아이를 출산하는 형태로 자신의 2개월 후의 출산을 미메시스하는 작가를 보게 된다―작가는 이에 대해 “고대 이집트 벽화,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출산 벽돌’을 살펴보면 변을 보듯 쭈그려 앉은 자세를 하고 있어요”라고 설명했다. <통로>는 가죽과 기계의 관계를 복수화하는 이전 작업에 대한 좀 더 강력한 사후적 지지대일지 모른다. 직접적인 현실과 사적인 혹은 집단적인 경험을 뒤덮은 이데올로기-환영을 거침없이 찢고 횡단하는 작가의.

2023년 신작인 2채널 영상 <허물, 체액, 범람>은 이제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엄마인 작가가 낙태와 유산, 비혼모와 같은 여성들 일반이 겪는 사회적 문제, 일부 여성들에게 전가되는 비가시적인 폭력을 가시화하고 그들과 연대하고 그들을 위로하려는 작업이다. 4명의 여성 퍼포머들은 각자 자신의 경험을 카메라 앞에서 낭독하고 어떤 ‘엄정한’ 규칙에 맞춰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고, 이번에도 역시 만다라를 미세시스한 각설탕 만다라를 함께 만들고 뜨거운 물로 녹이는 공동 제의를 치른다. 2022년 작가가 새롭게 재미를 들인, 혹은 새롭게 차용 중인 공예 기법은 “효율성이 떨어지고 그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 있는 화학적 경화”로서의 옻칠 기법이다. 무두질한 가죽, 물성형 다음으로 작가가 골라낸 사라지고 있는 공예 전통이다. 들이는 시간과 돈이 좀 더 많이 필요한 공정을 배우고 구사하는 것을 두고 작가는 작가노트에 “홀로코스트와 같은 사건”의 원인을 “공무원 시스템과 효율성”에서 찾았던 역사학자 라울 힐베르크의 영향이라고 적었다. 전지구적 폭력과 일상적 시스템을 인과론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상상력의 역할, 혹은 소산이다. 역사학자에게도 필요한, 예술가에게는 당연한. 서서히 침범하는 옻독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옻칠을 새롭게 해석하고 재전유하는 것은 폭력의 바깥이 없는 세상에서 예술의 긍정, 자신을 죽이면서 살리는 역설적 긍정의 방식일 것이다. 친아들(!)을 3D 데이터로 모델링하고 ‘조각’으로 만들어내지만 역시 거듭해서 옻칠을 입히고 갈아내는 힘든 노동 속에서 출현한 두 번째(!) 아이(들)는 우리가 아는/기대하는 아이가 아니다. 임신한 당사자로서 임산부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불경한 행위를 작가로서 ‘자행-감행’했듯이 자신의 아이를 인용하면서도 사회가 금한 아이의 형상으로 변용함으로써 유일무이한 자신의 아이에게 역시 자신의 미적인 자유를 선사한다. 당사자란 당하는 자이면서 새로운 이미지-형상을 발명할 수 있는 아직-충분히-오지-않은 자이라는 것을 나는 작가에게서 배운다.

<허물, 체액, 범람>에서 작가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로를 들고 버려진 건물들 사이를 걸어다니는 제사장이다. 가죽-기계 작업에서는 안 보였고, 몇몇 퍼포먼스에서는 바닥에 누워있었던 작가는 이제 빈 건물 사이를 향로를 들고 걷는다. 상황과 조건, 형식에 따라 자신의 물리적 존재 방식을 수정하는 이 작가의 앞으로의 작업이 계속 변화할 것이라는 것, 그것이 작업에 영향을 주는 ‘현실’에 대한 반응이자 책임이라는 것도 지적하자. 카프카의 ‘탐험가’처럼 사건 밖의 예술가-증인으로서건, 소수자-여성-당사자들의 곁에 있으려는 여성-작가로서건, 사적인 경험을 통해 집단적 이데올로기를 수정하고 ‘다른’ 이미지-형상을 발굴하는 생활-예술가로서건, 현실 폭력에 대한 예술가의 대응은 비효율적인 장인 기법과의 재연결이라고 직관하는 연구자로서건 작가는 계속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우발적인 사건으로서의 예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