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하: 학살과 출산 사이
양지윤 (대안공간 루프 디렉터)
글로벌화된 현대미술계에서, 대안적 세계사 또는 지역사를 담아내는 예술가의 시선은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아왔다. ‘세계사’라고 불리는 거대 서사에서 벗어난 예술가 개인들의 역사 해석과 기록은 예술가가 취할 수 있는 자유의 상징이자 예술의 사회적 역할의 일환이다. 대규모로 생산되고 유통되는 문화 산업 사회에서, 사투리의 질감과 뉘앙스가 갖는 특유의 아름다움처럼 예술은 기능하곤 했다.
이민하의 <그을린 세계> (2018-2019)에는 대형 크기의 소가죽이 세계 지도로 잘려져 벽을 메우고 있다. 세계적인 대학살이 있었던 지역의 좌표 64곳를 찾아가 인두로 낙인을 하나씩 찍어 내린다. 아파르트헤이트가 있었던 남아프리카, 나치즘이 있었던 독일 등 인종 차별과 종교 분쟁, 인간의 잔혹함의 역사가 있었던 곳에 짧은 문구가 가죽을 태우며 새겨진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키리에 엘레이손 기도문이 곳곳에서 타들어간다.
작가의 이전 작업에도 인두질한 가죽은 주요한 소재로 등장했다. 인두질한 가죽은 노예에게 낙인을 찍던 과거의 관습과 맞닿아 있다. 작가는 그 관습 자체가 ‘배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가죽에 대한 관심의 시작은 2008년 5월의 광우병 촛불집회였다. 작가는, 광우병의 원인이 가축 부산물들을 사료에 섞어서 먹이면서 발생한 유전자 변형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시장의 효율성만을 지향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들어낸 자연의 변이였던 것이다. 관객은 가죽이 타들어가는 냄새를 맡으며, 시스템에 의해 죽어갔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을 떠올린다.
이는 ‘여성적 예술’의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작가만의 대응이 된다. 백인과 유색인, 인간과 비인간, 여성과 남성 같은 이분법적 구분이,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구체화한 현실임을 드러낸다. 차별에서 출발한 이데올로기는 결국 모두를 파국으로 치닫았다. 이민하는 분석적 시선으로 시스템을 조망하며, 거북한 역사적 진실들을 꿰어 맞춘다.
신작 <Passages>는 이민하 작가가 임신 8개월이던 당시 촬영한 퍼포먼스 영상이다. 4명의 퍼포머는 가부장제 시스템 속 제 가족과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한다. 성소수자임을 숨겨야 엄마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레즈비언, 한국인 아내의 임신을 원하지 않았던 우크라이나 출신의 젊은 남성. 자신의 이야기를 먹으로 써 내려가고, 작가의 배에 패턴을 그린다. 그리고 작가는 글을 씻어 내린 물을 마신다. 고대의 출산 자세를 한 작가의 얼굴에 우유가 부어진다. 그리고 5명은 돼지 껍데기로 만든 얇은 가죽 속으로 웅크리고 들어가듯 기어들어가, 새로운 연대, 또다른 가족이 만들어진다.
1983년 바버라 크루거는 나뭇잎으로 눈을 가린 젊은 여성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흑백 사진 위에 <우리는 당신의 문화에 대해 자연의 역할을 하지 않겠다 We won’t play nature to your culture>라고 적는다. 작가는 남성 대 여성의 대립, 자연 대 문화의 대립과 같은 문화적 형태들을 구조화하는 이항 대립을 전면화했다. 이는 근대 세계의 형성과 관계 맺고 있는 서유럽 세계관과 근대 과학의 형성 과정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2021년 이민하의 임신한 예술가의 몸을 주제로 하는 작업 <Passages>는 이러한 이항 대립 다음의 질문을 한다. 사실 출산은 페미니즘 연구에서 불편한 주제였다. 1970년대 이래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여성을 생물학적 성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새로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 무수히 많은 연구와 사회적 투쟁을 했다. 이때 출산은 여성의 생물학적 재생산을 근원적으로 상징하는 주제이기에,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 <Passages>는 출산을 둘러싼 인류학적 의식들을 연구하면서 제작되었다. 생물학적인 것으로만 여겨졌던 임신과 출산, 육아의 과정이, 가부장제 속 다양한 사회적 의식으로 여성을 가치 매김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미투운동으로 새로운 지평을 만난 한국의 페미니즘 예술은, 남성과 여성의 대립에 집중하던 과거를 넘어서 인간해방이라는 보편적 지평으로 담론이 확장되어가는 중이다. 페미니즘 예술이 자연 속의 인간이라는 관점까지 확대되어가는 흐름 안에서, 이민하의 작업은 새로운 질문들을 던진다. 한국 여성 예술가가 국제적인 학살 지역에 관한 예술 작업을 만들 때, 그의 관점은 어떤 특수성을 가질 수 있는가. 게이와 이주노동자와 함께 자신의 출산을 기록한 예술가의 퍼포먼스는 가부장제 시스템에 어떠한 대응을 만드는 예술 행위인가. 현재 진행형인 이 질문은, 현대 미술사의 순간들과 함께 또 하나의 특정한 기록으로 남는다.
(2021년 6월에 진행한 그룹전 ‘삼중점’ 도록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