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리버리 – 안에서 바깥으로, 아래에서 위로, 삶에서 다시 삶으로
글 조주리
‘출산(delivery)’은 작가 이민하가 지난 몇 해 동안 집중적으로 다루어 온 주제 중 하나다. ‘다루어 왔다’라는 말은 그간의 작업 밀도를 떠올린다면, 다소 미온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이민하가 정말 하려고 하는 일은 출산을 ‘구현’하는 일처럼 보인다. 출산을 매개로 ‘나의 일시적 죽음’과 ‘너의 영원한 삶’(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겠다)을 맞바꾸는 이항 구조를 드러내고, 그러한 구조주의적 해석을 넘어서기 위해 생명 탄생과 관련된 다양한 주체의 서사를 수집하고, 온 존재를 위한 의식을 치르고자 하는 제의 행위로 다가온다. 앞서 이민하는 <통로 (Passages)>(2019 – 2021)라는 표제로 여러 퍼포머들과 함께 임신과 가족에 관한 작업을 진행한 바 있는데, 새 전시 <삶의 뒤집힌 안쪽(The Inside of Life turned upside down)>(2023.10.06-10.15, 아트플러그 연수)은 동일한 지점에서 출발했지만 출산의 다른 지점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에 얽힌 서사와 정동을 다루고 있다. 조각 오브제와 설치, 퍼포먼스, 영상으로 분산되고 통합된 장면은 예의 ‘붉은’ 심상을 연출하며, 세속과 분리된 공간임을 명확히 한다.
출산의 스펙트럼을 극단으로 넓히다 보면, 그 안에는 자발적/비자발적 유산 경험과 다양한 부적(negative) 상태가 연결되고 포함된다. 이른바 정상가족 개념에 의거한 정상임신과 출산, 양육으로 이어지는 고리에서 비껴나간 사례들을 껴안으면서, 이민하는 다시 한번 생명을 매개하는 존재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다수의 작업에서 리서처이자 연출가, 그리고 퍼포머로 임했던 이민하는 이번 전시에서 ‘제사장’되기를 자처한다. 미술의 언어를 빌려 출산과 그 과정에서의 탈각을 다양한 상황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위해 방대한 양의 문헌 탐색과 사람들과의 인터뷰에 시간을 쏟고, 작업으로 다가가기 위한 크고 작은 실천을 매번 의식 치르듯 대하는 이민하의 스탠스는 프레임의 바깥에서 서사를 설계하고, 화면의 뒤쪽에서 상황을 견인하는 작가들과는 다른 지점에 와있다. 타인의 고통에 예민하게 감응하는 힐러(healer)이자, 그 스스로도 치유받기를 원하는 한 사람으로서 작업의 선봉에 선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결의를 요하는 것일까. 제의를 치러내기 위한 과정에 담긴 그 모든 신산함은 하나의 퍼포먼스에, 진혼(鎭魂)의 리듬에 수렴된다.
바로 그런 점에서, 이민하의 작업 태도와 주제적 천착은 때로 의문점과 갸웃거림을 유발한다. 어느 곳에서건 제사장의 입지가 좁아져만 가는 각자도생의 삶 안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버석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회적으로 규정된 모성에 대한 의구심이 맹렬하게 치오르는 곳에서, 아이에 대한 무차별적 헌신과 혐오가 기이하게 맞닿아 있는 한국 사회에서 특히 그렇다. 출산은 이민하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이 온몸으로 치러내는 삶과 죽음의 전장이지만, 그러한 경험을 겪은 바 없는 대다수의 타인들에게 영구히 이해받지 못할 공백의 지대이자 남의 사정이기도 하다. 그 기로에서, 이민하가 펼쳐내는 몸짓의 진의를 이번 전시에서 진중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전시가 구현되기 전부터 이민하는 ‘출산과 학살 사이’, 그리고 ‘제사장으로서의 예술가’로 명명한 사전 연구 단계에서 종교학과 문화인류학, 에코 페미니즘, 역사학을 아우르는 폭넓은 문헌 연구와 학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뿌리깊은 여성의 신비화와 그와 나란히 작동해온 여성 혐오의 역사를 교차하여 살핀 바 있다. 이와 더불어, 자연의 연속체로 상정된 여성 존재를 둘러싼 다양한 의례 양상과 각각의 문화적 함의를 조사하였다. 역사적 탐문과 여성주의적 시선이 응당 필요했던 까닭은 주제가 갖는 당대성, 즉 시대정신에 관한 끊임없는 재확인의 과정이자 논리의 직조를 통해 자기 방식의 의례를 모의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출산을 택한 자와 그로부터 소외된 자, 낳은 자와 태어난 자, 유산과 임신 중절의 당사자, 가해자와 희생자, 기억하는 이와 망각을 택한 자, 주변인, 주변인의 주변인… 여성성과 여성의 출산에 대한 과도한 숭앙도 무분별한 혐오도 동일하게 거세된 진공의 무대에서라면, 무엇이 중심이고 다른 무엇이 주변의 서사일지 가늠하기 힘들 것도 같다.
지난 작업과정을 통해 현대사회의 병리적 현상과 그 기저에 있는 정신성의 구조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데 관심을 가져왔던 이민하에게 있어 출산과 그 배면에 작동하는 타나토스(Thanatos, 죽음충동)의 양립 메커니즘은 전반적인 쟁점의 연속체인 동시에, 새로운 국면에서 작가가 실존적으로 경험한 생의 복잡성을 드러낸다. 나아가 예술적 재현이 갖는 윤리적 딜레마를 반추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작가적 수행성의 가능성을 탐문하도록 한다. 작업을 추동하는 동력은 그 자신의 임신과 분만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랜, 더 복잡한 기원을 갖는 것일지 모른다. 혹은 본능적인 동일시의 대상에서 객체로 분리된 아이의 존재에 머물던 시선이 조금 더 넓은 차원의 타자들의 삶으로 확장되고, 타자화된 자기 삶의 구심점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난 것일 수도.
전시장 내부는 이미 분명한 제의적 코드를 담지하고 있다. 단단하던 각설탕 더미의 일부가 뜨거운 열기에 녹아내리고 허물어진 판(plate), 아기 모양으로 제작된 악기가 올려진 두 번째 판, 그리고 옻칠을 한 귀와 코 조각이 담긴 마지막 판이 있다. 그 주변으로 아이의 전신 조각, 신생아가 웅크리고 기지개하는 동작을 3D 모델링하여 만든 애니메이션 작업, 퍼포먼스에서 착용했던 옷가지가 에워싸고 있다. 붉은 색으로 마감된 세 개의 원형 만다라는 보기에 따라 생명의 좌대이자, 망자의 무덤이자, 추도를 올리기 위한 비석이다.
아이 모양의 북(실제로 일반적인 북의 형태라기 보다 아이가 엎드린 형상에 가깝다)은 귀엽기 보다는 가혹한 상상을 떠올리게 한다. 어린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에 관한 옛 이야기, 어디선가 사람 가죽으로 북을 만들었다던 설화를 소환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잔뜩 웅크린 저 모습은 말그대로 복중 태아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다. 좁고 물컹한 공간 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웅크리며 뒤트는 동작은 성장 내내 지속되는 안정적 자세이자, 모체로부터의 양분을 한껏 받아들이는 모습일 수 있다.
누워있는 아기 조각의 몸체가 반들반들 윤이나는 까닭은 3D 프린팅으로 사출해 낸 조각 위에 옻칠의 재료인 생칠로 덧바르며 여름 내 표면을 사포로 갈고 닦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오브제 중 하나는 가죽으로 물성형을 하여 북 형태로 단단히 굳힌 것이다. 말캉하던 것을 단단하게 굳히고, 둔탁하던 것을 매끄럽게 연마하는 가공 행위는 원시적이고 고단하다. 마치 뱃속의 여린 생명을 매일 조금씩 키워내는 것처럼 말이다. 좌대 위 떨어져 나간 귀와 코는 전쟁포로의 귀 무덤을 즉각적으로 상기시킨다. 달리 보면, 생명체가 허물어지는 과정이거나 덜 여문 몸의 파편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에게는 섬찟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조형적 실험과 물성의 재배치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암시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조금 더 구체적인 단서는 영상 작업에 담긴 서사를 통해, 인물의 행위를 통해 유추 가능할 것 같다.
2 채널로 구성된 영상은 여러 참여자들과 함께 구성한 퍼포먼스의 기록물이자, 실제 전시 공간에서의 제의를 완성하는 중심이다. 작가가 초대한 이들은 저마다의 아픔과 사연이 있는 네 명의 인물이다. 비혼모, 낙태와 유산, 출산과정에서 배려받지 못한 경험. 국적과 인종에 상관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있을 법한 일들이지만 한자리에 이들이 모이기까지 어떤 소통과 설득, 배려와 협동이 작동되었을 지 짐작하기 어렵다. 작업에서 리얼리즘을 강조하는 다큐적인 시선으로부터의 탈피, 사연의 핍진성을 축소하는 편집, 여성 참여자 간의 신체적 접촉과 감정적 라포(rapport)를 건조하게 따라가는 시선을 읽게 된다. 무엇보다 작가 자신이 무리의 일원이자 무대 위의 제사장이 되어 제의를 진행하는 방식은 이민하 작업이 갖는 독특한 위상이자, 쉽게 의도를 단정하기 어려운 국면을 제공한다. 퍼포머들이 읊조리는 주인 없는 이야기는 타인의 음성을 대리하여 발화되고, 이들 사이에 약속된 몸짓 언어 안에서 코와 귀, 아이의 몸, 서로의 팔을 조심스레 어루만진다. 동작의 의미를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쉽지 않다.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죽은 아이의 몸을 쓰다듬는 애처로운 행위일지, 기어이 좁은 통로를 뚫고 험난한 세상으로 출격한 갓난 아이의 존재를 축원하는 손길일지 말이다. 다만, 한 가지만은 분명해 보인다. 울지 않아야 대상을 위로 할 수 있고, 거세게 껴안지 않아야 감정을 공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제의의 형식이 아름다워야 하는 보편적 당위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번 전시의 일부이자 전시 바깥에서 나란히 제작된 신작 Ravages 는 또 다른 기계적 몸짓으로 대체된 일종의 카운터파트(counterpart)이자, 또 다른 갈래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스핀-오프(Spin Off)처럼 다가온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천지창조’에서 표현된 거대한 신의 손을 바라보며 시작된 이번 작업은 인류사에 내재된 극한의 폭력성을 오늘날의 기계적 ‘손’에 의태하여 가시화한다. 그러나 공압실린더로 움직이는 기계팔에 걸린 가죽 패치는 여느 때보다 흐물거리는 비체(卑體, abject)의 모습이다. 동물 가죽을 집어 올렸다 내리치는 기계팔의 움직임과 그 속에서 유린당하는 살점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억세고 연약한지, 창작의 의도와 결과적 수행을 명명하게 해부하기란 쉽지 않다. 의료용 처치와 행정적 살처분, 악랄한 고문과 사도마조히즘의 유희, 출산과 학살 사이. 이내, ‘사이’라는 말이 갖는 무책임한 느슨함에서 달아나고자 극단적 상상으로 치닫는다. 붉은 색 원형 좌대 위에 올라간 것은 찢어발겨진 살점들, 그리고 그것들을 갈퀴로 움켜쥐고 있는 기계팔 석 점이다. 서로 서로 맞물린 틈바구니에서 장엄한 두려움보다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단한 일들의 슬픔, 무기력, 피로가 몰려온다. 작품 앞에서 관객들이 투영하는 감정은 작가의 의도와도, 평론가의 인상과도 다른 또 다른 종류일지라도 상관없을 것 같다. 해질 녘, 공기 펌프를 끄지 않는 이상 밤새 사투를 벌이고 있을 좌대 위의 짝패들과 기이한 풍경을 뒤로하며 생각해 본다.
사회적 신분을 뛰어넘어 지구상 모든 이가 죽음을 향해 매 순간 가까워지는 이 공평한 세계에서, 제의를 올릴 사람은 누구이며, 위로와 추념의 대상은 누구인 것일까. 매 순간을 강건하게 살아가는 이들, 혼신의 힘으로 하루를 지탱하는 이들, 그 기회마저 실격당한 존재, 낳음을 당했다고 억울해하는 이들, 그 기회마저 실격당한 존재. 동일한 생명 탄생의 메커니즘으로 태어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죽어가는 우리 모두다. 전시를 보며, 태어난 순간 우리 앞에 당도해버린 ‘삶’이라는 딜리버리를 한껏 추앙하다, 별안간 내리쳐본다. 그리고 또 다시 축원해 본다. 안이나 바깥이나, 위나 아내라 모든 것이 만다라처럼 보이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