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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0 전시리뷰: 순리를 지키는 공증 (이지민)

순리를 지키는 공증

이지민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1958년부터 1960년까지 3년간 중국인 3,000만 명이 아사한다. 북한 총인구수보다 많은 수치다. 이는 마오쩌둥이 쓰촨성 농촌을 시찰하던 중 곡식을 쪼아 먹는 참새를 보고 화를 내며 던진 한마디의 말 ‘저 새는 해로운 새다’의 파장이었다. 이후 구성된 ‘참새 섬멸 총지휘부’가 참새를 닥치는 대로 소탕하자 해충이 창궐하게 되어 생태계가 무너지게 되면서 농작물이 초토화되고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된 것이다. 독일 3 제국 최대 규모의 강제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에서는 유대인을 비롯한 동성애자, 장애인 등 나치즘에 반대하는 자들이 대량 학살된다.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자마다 논란이 지속 중이지만 수용소에서 학살당한 유대인 수만 350만여 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학살은 실로 다양한 방법으로 고안되며 창의성과 폭력성 그리고 야만성의 경계를 오갔다. 그중에서도 살인 주체인 군인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안으로 마련된 방책은 그들만의 목적으로 인본주의를 거스르며 정당성을 확보했다.

위 사건들은 이민하의 드로잉 시리즈 <수 없는 재난과 한 생명의 태어남>으로 실현된 이야기 중 일부다. 양 또는 염소 가죽을 인두로 지져 타들어 가는 흔적으로 그려낸 드로잉은 작가의 관심으로부터 출발한 다양한 화두를 시각화하며 1940년대 폴란드와 독일의 정치·사회적 사건으로부터 2011년 동일본 대지진까지 약 70년에 걸친 역사를 소환한다. 이 작업을 마주하기 전에는 높이가 4미터에 달하는 대형 설치 <선홍빛 장벽>을 거쳐 가게 된다. 전시장의 벽면을 유럽풍 무늬의 벽지로 뒤덮은 다음 세 명의 여성이 파고 긁어내며 특정 문양을 형성한 입체 작업이다. 그 문양은 불교에서 우주의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도형화한 원형의 불화인 만다라(Mandala)를 닮았다. <수 없는 재난과 한 생명의 태어남>과 <선홍빛 장벽>은 지지고 긁어내는 행위를 통해 발현된 결과물로 매우 정교한 정성과 다소 긴 작업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작가는 작업 과정을 오체투지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하며, 기존의 작업 행보도 ‘제의적 형식’이라는 프리즘으로 읽혀 왔다.

<선홍빛 장벽>전을 관람하고 나서 이번에는 작가의 행위, 주제, 메시지를 특정 방법론으로 명제화 하기보다, 작가가 선택한 물질과 도출된 시각 이미지가 서로 공존하는 영역에 집중해보기로 한다. 동물의 가죽에는 돌이킬 수 없는 그을림을 내고, 깨끗하게 벽을 포장한 벽지는 칼로 찢어 흠집을 내면서 작가는 상처를 박제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그를 위로하는 정신을 팽팽하게 공존시킨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자신의 실천을 뒀다. 늘 쉽게 잊혀 버렸거나 왜곡되고 감춰져 온 신호들을 드러내기에 힘 써온 작가는 결과 양산보다는 그 지표에 직접 부대끼는 몸부림을 선행해 왔다. 수시로 차오르는 문제의식을 외면할 수 없어 자신의 몸으로 예술이 실현할 수 있는 국면을 전개해온 것이다.

이민하의 작품에서 다뤄지는 모든 사건이 한 곳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아채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작가의 본능적 순리는 멀끔한 공공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작품의 배경이 되는 일련의 사건들로부터 알 수 있듯이 기형적인 퇴행의 신호들은 우리를 둘러싼 상식을 훼손하고 있다. 작가가 지키려는 순리에 가해지는 위협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리의 지평에서 작가는 작업의 결과가 또 다른 제도와 논리로 굳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경계해온 신호들과 표현의 극한은 획일화라는 범주로 묶이면서 같은 오류를 범하게 되기 때문에 더욱 실천의 과정이 중요해진다. 작가의 실천은 스스로를 관통하면서 작품 내에서 정직한 기준이 되어 일종의 공증으로 기능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점점 상처에 무감각해지고 있다. 예측 불가능한 자극의 지속 때문이다. 이민하의 상처내기/위로하기 중심의 영역에서 그의 공증 지표를 따라 각자의 행동력을 발휘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가로막는 덫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보자. 그러면 작가 그리고 우리가 지키려는 순리를 만나게 될 것이라 기대한다.

(2020년 10월 이민하 개인전 전시리뷰 – 동무비평 삼사 원고 발췌)

2012.2 아트인컬처 – 김화현 이민하展 리뷰 (박현정)

김화현 이민하展 리뷰
2011.11.18~2012.1.13 샘표 스페이스

보기만 해도 죄가 되는 일이 있다. 본다는 것은 때론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며, 관음증은 인류가 앓고 있는 흔한 병이다. 보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미소년을 그려온 김화현과 영원을 향한 인간의 의지를 종이와 가죽에 기도문으로 새겨 온 이민하는 2008년 일본의 작은 술집 나나에서 ‘성(聖)과 속(俗)’이라는 주제로 만났다. 일본 주택가라면 하나쯤 있기 마련이지만, 여성 종업원이 접대하는 스낵바는 정숙한 숙녀, 신사라면 기웃거리는 것조차 꺼려졌을 지도 모를 낮은 곳. 이 공간 속으로 초대하기 위해 두 작가가 선택한 방법은 성과 속의 혼재였다. 우선 술집 입구에 달린 작은 세면대에 꽃을 담고 성스러운 의식을 제공한다. 손을 씻고 거울을 보라는 문구를 벽에 써 두었지만, 실제로 손을 씻을 물도, 거울도 없다. 세속의 언어가 통용되지 않는 순간 두 작가의 주술이 힘을 발휘하면서 관객들은 입구에서 열린 다른 통로를 향해 발을 들여 놓는다.
1층 바, 여성 종업원은 간데 없고 미소년 넷이 액자 속에서 손님을 기다린다. 김화현이 이제껏 그려온 대담한 노출과는 달리 상반신만 드러낸 소년들은 얌전하다. 황금빛 광배와 매란국죽의 지물로 성스러움까지 더했음에도 여전히 잘 다듬어진 근육과 촉촉하게 부푼 입술은 여성 관객의 관음증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소년은 성스러움으로 치장하여 자신 뿐만 아니라 술집 내부에 대한 호기심과 관음증이라는 세속의 욕망을 긍정하도록 도우며, 그 죄책감을 사해준다.
김화현이 속의 공간을 성으로 중화시켰다면, 이민하는 여성 종업원이 쉬던 2층 방을 성으로 정화하기 시작한다. 가장 사적인 그 방은 어느 곳보다 관객의 관음증을 유발하지만, 층계를 올라 만나는 건 검고 거대한 기둥. 작은 방 곳곳에 솟아난 기둥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며 세속적인 공간을 영원을 향한 숭고한 공간으로 바꾼다. 그 위에 100개가 넘은 언어로 쓴 깨알 같은 기도문은 하늘을 향한 공덕이 되어 구제를 암시한다.
2011년 샘표공장으로 자리를 옮긴 나나에서 두 작가는 또 다른 변화를 시도한다. 술집의 2층만을 조립한 방을 세우고 속의 공간을 재현했지만, 성스러움을 입힌 남성들은 이제 술집 밖으로 나와 있다. 김화현은 속된 공간을 성화(聖化)시키고자 기둥이 있던 자리에 구멍 난 그물을 걸고, 이민하는 술집 밖에 기둥을 세웠다. 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나선의 기도문은 여전히 구제의 가능성을 시사하며 술집을 바라본다. 2008년 성과 속의 혼재를 보여 주던 작가들은 검은 기둥과 술집, 성과 속을 마주보게 함으로써 그 사이에 존재해 온 무수하고 애매한 경계에 대해 새롭게 질문을 던진다.

글 : 박현정 미술사
월간 아트 인 컬쳐, 2012년 2월호 p.173

2007.4 퍼블릭 아트 – 수평적 현실과 수직적 비상에의 꿈 (서정임)

수평적 현실과 수직적 비상에의 꿈
이민하 전 2007.3.7~3.13 갤러리 토포하우스

이민하의 작품을 보며 처음 떠오른 것은 이상의 ‘날개’라는 소설의 한 구절이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구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구나.” 날개가 돋기 위해 겨드랑이가 자주 가렵다던 한 패배주의자의 죽음에 이르기 직전의 순간. 그러나 그것이 죽음이 아닌 저자의 이름답게 ‘이상’을 향해서 다가가는 발걸음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날개는 신의 영역이 되기도 하고 ‘비상’을 꿈꾸며 이상을 찾아갈 수 있게끔 해주는 매개체라 여긴다. 작가의 작품에서 역시 거대하게 퍼져가는 날개는 소설에서의 주인공처럼 죽음과 이상 사이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가늘고 얽힌 필선, 손의 노동이 집약된 화면이 공간 속에서 부유하며 2차원의 평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3차원의 공간으로 튀어나와 몸에 들어붙어 비상할 수 있게 해줄 것 같다. 그리고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움직이며, 120도밖에 보지 못하는 시야를 넘어서는 존재는 위압감과 공포감까지 불러일으킨다. 작품을 다시 들여다보기에 앞서 검은 거대함은 우리의 눈을 속이고 경건하게, 숭고하게 만드는 장치로서 작용한 것이다. 또한 엉킨 검은 실타래는 빛을 흡수하는 블랙홀처럼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때문에 그의 내부를 들여다보기 어렵다.
그러나 꼼꼼히 짚어보면 날개 안에 펼쳐진 선의 겹침은 산맥과도 같고, 물의 형상으로도 보인다. 하여 <자연으로의 귀의에 의한 쾌>라는 작품에서 날개 속에 송대 화가 범관의 <계산 행려도>를 모사함으로써 이를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작가노트에 의하면 옛 선배들이 그림 속에서 ‘휴’를 얻었듯 자연을 가까이 두고자 하는 마음을 날개에 빗대어 표현하고 그 안에서 평안을 찾는다고 한다. 이러한 사고는 그가 설치회화라고 말하는 부분과 맞닿아 있다. 거대한 화면이 보여주는 공간의 적극적 개입은 자연 속에 관자의 정신이 흡수되었던 것이 아닌, 아예 화면 자체가 밖으로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거기서 우리는 저 멀리 숨어있는 감정의 꼬투리를 잡게 된다.

서정임 기자, 월간 퍼블릭 아트 2007년 4월호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