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아남네시스

Screening on the 19th Seoul International Newmedia Festival

Nemaf_2019

제19회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에 2017년작 “아남네시스”가 한국구애전 : 포스트 내러티브에 선정되어 상영됩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상영스케줄 : 2019년 8월 18일(일)   14:40   롯데시네마 홍대입구 1관
2019년 8월 19일(월)   12:20   롯데시네마 홍대입구 2관

2018. 11 불의 과학, 신체적 언어 그리고 “망각할 수 없는 것들” (김남수)

이민하 작가: 불의 과학, 신체적 언어 그리고 “망각할 수 없는 것들”

김남수(안무비평)

#1. “빛은 사물의 표면에서 놀고 웃지만, 열은 침투한다.” (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중에서)

#2. “만약 이 삶 혹은 이 순간이 본질상 망각되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이 술어는 오류가 아니라 어떤 요구, 인간들이 부응하지 못했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일 터(…) 이것은 이 요구에 부응했던 영역, 즉 ‘신의 기억’을 가리킨다.” (벤야민, 『번역자의 과제』 중에서)

이민하 작가의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저 아득한 태초의 시대로부터 고의적 시대착오를 범해 ‘오늘’이라는 미래로 귀양살이 나온 고대인의 예술 같다. 시간의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으로 잠수했다가 무엇인가를 건져 올린 듯한 그의 작업은 고대적이며 그의 작업이 마치 “하늘에 부조되는 장엄한 무늬”처럼 본래 장식이 아니라 “무늬는 신의 언어였다”라는 의미에서 신성한 언어를 현재화한다. 고대의 신성성을 이 초연결 메가머신 사회에서 호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종교의 주요 테마이자 심지어 장사수단이었던 신성성의 코드를 예술이 취했을 때 어떤 컨템포러리의 특질로 바라볼 수 있을까. 아감벤처럼 컨템포러리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민하 작가의 작업은 “고대와 현재 사이의 비밀조약” 같은 것의 살아있는 예가 아닌가. 그만큼 그의 작업은 시간적 매듭의 성향이 아주 강하며, 이 매듭이 재미있는 것은 하나의 풀 길 없는 금지의 매듭이 아니라 본래 하나의 통일된 스피리추얼로 되돌아가는 고르디아스의 매듭처럼 다가온다. 그 매듭의 엉뚱한 나타남이라고 할까.

양가죽 위에 무두질하고 그 매끄러운 표면 위에 인두질을 통해 불의 언어로 무엇인가를 적어 내려간다는 것은 굉장히 풍토적인 동시에 그 해당 풍토의 대지에서도 이제는 근대 이전의 전통으로 관리되는 고대적인 풍습이다. 동굴 속의 목자나 유목 시대의 노마드가 무엇인가 가시적인 것이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소멸하여가는 것, 그런 의미에서 아주 특별한 비저너리 – “‘비저너리’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에서 시작해 이내 일반이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곳으로 뛰어올라 버린다”(콜린 윌슨) – 라고 할 수 있다. 어둠의 공간에서 저편의 삶을 기록한다는 것, 그것도 불의 과학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비저너리로써 ‘숨겨진 차원’을 연다는 것이다. 이 ‘숨겨진 차원’의 여밈과 펼침이 가장 발달한 것은 사막이며, 이민하 작가의 작업에는 이 사막의 풍토성이 강하게 풍긴다.

단순한 인두 작업이 아니다. 화인으로 가죽 표면에 글자를 찍는 작업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영적인 지식, 일종의 그노시스를 나타나게 하려는 작가의 의지와 욕망 – 욕망 아닌 욕망 – 이 자기 투신의 형태로 개입하고 있다.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면서 자신의 실존적 상황 자체를 되먹임시키는 작업이다. 기술적으로 용인되고 향상되는 작업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경험적 주체가 무한루프로 되풀이 되풀이 부엌 아궁이 속에 넣어지는 작업이다. 이는 어린 양과 사람 목숨이 등가로 표기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사람 목숨이라는 등식으로 성립하는 인식론에서 비롯된다. ‘숨겨진 차원’이 나타난다는 것은 어린 양의 희생제 없이는 곤란하다.

무엇인가가 기술적으로 술술 잘 풀려나간다는 것은 근대적인 시스템 속에서 예술이 분화된 기술체계 내부로 포섭됐다는 의미밖에는 없다. 반면, 이민하 작가의 악전고투 같은 투신은 장엄한 무늬로서의 문자가 본래 신의 권능으로부터 인간의 영역으로 이전될 때 엄밀한 의미의 ‘관계 개념’으로서 한 개인의 삶을 희생하는 과정이다. 이 ‘관계 개념’은 제한된 어떤 조건이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무한과 직결되는 매개이다.

#3. “아랍인들을 만족시키려면 폐쇄된 공간은 (…) 탁 트인 전망이 있어야 한다.” (에드워드 윌슨, 『숨겨진 차원』 중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어느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이민하 작가의 머무름이자 거주함은 언어이다. 정확히는 문자로 달리는 애벌레 주체로서의 언어이다. 애벌레처럼 기어가는, 캘리그라피화되어 살아서 꿈틀대는, 그럼으로써 생명적인 으르릉거림 – 존 케이지의 <로라토리오(Roaratorio)>처럼 – 이 강렬한 언어이다. 아랍 문자, 한자, 가나 문자 등등 흐르는 문자들이 갖는 그 여정과 흔적이 그대로 생명성의 징후로 나타난다. 그때는 애벌레 문자가 나아가는 각도와 방향조차도 언어이다. 갈림길에서 이쪽이냐 저쪽이냐는 중대해진다. 그때 언어는 외친다고 할까. 이 길이다! 그 길 안에 이 삶의 영원한 무늬를 찍어 넣겠다며, 아니 넣겠다는 듯이. 어떤 문자는 발음할 수 없으며 본래 신이 쓰던 것이라고 한다.

그런 관점일 때, ‘집’이란 돌아가야 하는 곳이다. 이 세계에 나타날 때는 그 ‘나타남의 사건’이 축복받고 기름 부음 받지만, 우리는 본래의 그 무면목(無面目) – 창조된 원류 그대로 혼돈의 “이목구비 없는 얼굴” -을 잃어버리고 망각한다. ‘집’은 모든 존재자가 모여들어 그동안 그러모은 사물의 언어와 질감 대신에 존재라는 그 첫 번째의 의미를 회복하는 씨앗의 방이다. 이민하 작가의 인두 작업은 사람들의 내력과 사연이 간명하게 불의 권능으로 쓰여져서 소리와 냄새로 음미 되는 과정에서 ‘집’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거기에는 ‘집’의 전망이 있다.

이민하 작가는 왜 무두장이처럼 양가죽 위에 인두로 지지는 작업으로 자신의 영적인 지식, 그노시스를 표현하려고 할까, 라고 질문한다면, 위와 같은 대답도 가설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쓰는 인두라는 도구이자 머신이 하나의 불의 과학 – 현대과학은 이 “‘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아직도 묵묵부답이다 – 의 소산이란 사실을 살펴봐야 한다. 이 인스트루먼트가 고대적인 연원을 갖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민하 작가의 사용 방식은 양가죽 위에 겹쳐 쓰기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불로 그대로 텍스트를 초벌 찍기 하는 것이다. 불의 언어, 불의 과학으로 오류 없이 쓰이는 책인 것. 그러므로 모든 생명이 돌아갈 비전과 함께 ‘집’의 전망이 있고, 그런 ‘숨겨진 차원’을 가시화하는 ‘비저너리(visionary)’의 내력이 가능하다. 다만 그러므로 이민하 작가의 작업은 더 모험적이고 신화적인 수사의 세계에서 조망할 필요가 있다. 그 작업은 종교적 성향과도 잇대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요청은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이다.

이민하 작가의 인두는 빛의 작업이 아니라 열의 작업이다. 그 열은 “침투하는 열(熱)”이다. 그 열기는 사람의 피부에 치직거리는 음향과 살타는 누린내 그리고 고통의 상상력이 환기되는 고대와 중세로부터 전해진 집단 무의식의 기억이 있다. 이 기억의 연대기를 펼치는 것이 이리저리 굴곡진 양가죽 표면이다. 이는 피하지방 아래 무의식화된 원형질적 기억들이 오래된 여행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어떤 타블로 판 같은 것이다. 이민하 작가가 불의 열기로 작업하는 공간은 이 판이다. 판은 사람들의 삶의 얼룩과 신산 그리고 망각되어서는 안된다는 윤리적 요청들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의 기억’(벤야민)으로만 가능하다. 이민하 작가의 작업이 동행하는 종교성은 이러한 측면에서 추론된다. 모든 것은 펼쳐내고 그 펼쳐낸 삶의 가혹한 깊이, 사연 많고 하염 많은 삶의 기록, 감히 공감이라고 말하기 버거운 차원에서 그 모두를 감당해내는 것이 라이프니츠적인 의미에서 ‘신’이다. 그에 따르면, 고백하는 것은 ‘신’이며, 어떤 고백은 ‘신적’이다.

#4. “불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무(無)를 찾는 것, 이것은 인간의 위대함을 말해준다.”(엠페도클레스)

이민하 작가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위상학은 이런 것이다. 신 스스로 ‘오늘’이라는 정신의 한 인간이 거처하는 곳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이런 특별한 작업의 행간과 복선 그리고 알레고리가 필요한 것이라고. 겹과 켜, 직접성과 현전성, 후각적 정신과 고도의 그노시스 같은 것들. 지금에 와서는 미디어 아트의 맥락에서 떠내려가듯 점차 폐기되어버렸다고, 뉴 미디어가 올드 미디어를 구축하는 것처럼 괄호 쳐졌다고 믿는 시대에 이민하 작가는 돌연히, 돌올하게 그 미디움(medium)의 시원적인 기호를 다시 호출해버린다. 그것도 모든 삶은 불멸이며, 불멸의 삶은 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망각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불멸을 알게 해주는 기호라고 증언하는 것처럼. “기념비도 추억도 심지어 증인조차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망각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삶”(벤야민)이 있다. 이 탁월한 긍정성이 인두와 그 불의 과학이 남기는 낙인의 흔적으로서의 문자 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으며, 마치 피닉스처럼 부정성이 변환된 긍정성으로 출현한다.

“모래바람에 눈을 감았다 뜨니 인천이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행동은 이기적인 자기만족.”

“마음속에서는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결혼과 함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구받았다.”

“얇은 종이처럼 팔랑거리는 차별들이 내 삶에 팽배했다.”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인간처럼, 그럼으로써 피닉스와도 같이 되살아나는 삶, 거기에 영원성의 지표이자 무늬가 찍혀진다는 듯이 이 종교적 언약 비슷한 느낌이 이민하 작가의 작업에는 있다. 거기에는 망각할 수 없는 것의 본질이 어떤 강렬도의 척도로부터 작동한다는 무언의 암시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남네시스(Anamnesis)>(2017)에서 이민하 작가는 상징적으로 인두질이 일어나는 타블로 판처럼 누워 있으며, 다른 이방의 사람들이 가진 각자의 사연들이 제각각의 다른 문자 체계의 잠언적인 언어로 화인된다. 그때 이민하 작가의 신체는 문자와 언어는 다르지만, 다시 헤쳐모이는 ‘집’으로서 일종의 바벨탑과도 같다. 흩어졌던 언어들이 영적인 씨앗의 방으로 모음 되는 곳, 거기에는 이민하 작가의 신체가 제공된다. 이 신체는 어린 양의 신체인 동시에 불길로 휩싸인 신체이며 동시에 잿더미이다. 그다음 순간, 재 속에서 다시 살아 오르는 다른 생명체의 신체이다. 바슐라르는 이를 ‘불의 새’라고 봤으며, 이민하 작가는 ‘상기(想起)’라고 봤다. 무엇을 상기하는가. 자신이, 또한 그 누구나 알아차리면 ‘불의 새’라는 엄연한 사실, 그노시스를 상기하는 것이다. 불의 과학으로 쓰이는 신체적 언어는 이처럼 희생제를 통한 ‘상기’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어떤 작업에서 이민하 작가는 인두로 문자를 찍고 그 화인 작업을 현재화하는 동시에 그 문자를 읊기도 한다. 통조림 된 문자가 아니라 불로 살아있는 문자가 퍼포먼스가 되는 것이다. 이때는 거대한 동굴이나 궁륭공간이 높은 중세도서관 같은 공간성으로 공명하기 시작한다. 쓰면서 읽는 것, 청각적 이미지를 통한 시각적이며 개념적인 차원의 개방은 ‘상기’의 가장 기본적인 루프이다. 가령,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에서 건강이 좋지 못한 젊은 사제는 고뇌하면서 일기를 적는데, 일기는 빈 여백에 쓰이면서 동시에 보이스오버로 읽힌다. 그리고 번역되는 자막은 다시 이 일기 내용을 가시화한다. 자신의 성독(聲讀)으로 울려진 텍스트를 다시 자신의 귀로 듣는다는 것은 공명하는 공간 자체가 부활하는 삶, 망각될 수 없는 삶의 기초라는 것이다. 그 공간성을 이민하 작가는 자신의 퍼포먼스에서 드러낸다.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바다 위에서 폭풍우를 만나 난파 직전까지 몰리는 것이 일반적이며,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악마의 맷돌이 돌아가는 사회에서 가속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민하 작가는 그러한 사회에 대한 응전의 형식이 아니라 그러한 사회로 초기 세팅된 정신적 형식을 완전히 새로운 서판으로 바꿔치기하여 깊은 망각 속에 있는 것들을 기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니 ‘상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망각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덧없는 삶은 덧없지 않다는 것, 이때의 ‘덧’이라는 찰나지간, 익명성, 겨를 없음은 그대로 영원성의 표지이다. 그 자체로 ‘덧’의 시간성은 불의 언어로 고정되고 가시화된다. 아니 신체화되어 타인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이 된다. 그노시스의 알아차림을 통해 이 삶의 고해를 항해하자는 것이 자칫하면 종교적 관념의 틀 속에서 헐벗은 반복이 될 수도 있지만, 이민하 작가는 그 인두질의 신체적 감각, 희생제적 자기 투신, ‘상기’와 부활의 본질로서 삶을 다시 바라보기를 요청한다. 아니 충격파를 던진다.

다시 한 번 더 묻는다. 왜 이민하 작가는 무두장이처럼 양가죽 위에 인두로 지지는 작업으로 자신의 영적인 언어를 추구하게 되었을까. 여기서 인두는 그 금속의 첨점 끝에 마치 ‘성 엘모의 불’처럼 응결된 불의 권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끝이 없는 거대한 파타고니아 협곡 사이를 아무런 안전보장이나 믿음 없이 그대로 던져진 운명의 무늬처럼 항해해갔던 마젤란 함대가 어느 모퉁이에서 번갯불이 돛대 끝에 둥글게 맺히는 현상을 만난 것처럼 말이다. 그때 선원들은 성스러운 여성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했다고 하는데, 이민하 작가의 작업은 바로 그러한 충동을 자연스럽게 촉발한다. 신이시여! 우리를 굽어살피소서. 암(闇), “울울하고 암암할 신의 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문밖까지 울려 나온다.” 우리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 소리가 울려 나올 때까지 인두로 지져야 한다. 인두는 비밀스럽다. 인두의 그 끝에 도사린 어떤 신적인 권능이 ‘불의 과학’으로 잠재해 있으며, 그것의 응축된 힘이 어떤 표면과 만나 화인될 때는 삶을 망각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망각할 수 없는 삶”이란 감각적이다. 감각의 경로를 따른다.

불길의 부조, 그 나타남의 사건은 마치 저 아득한 태초의 감각으로 일어난다. 우리말 “나타나다”는 음미할수록 어떤 신성한 현현의 느낌을 안으로 감싸고 있는데, 이민하 작가에게는 “나타나다”라는 동사는 그대로 ‘불’과 ‘연기’ 그리고 ‘냄새’의 언어로 표출된다. 오감으로 뒤덮인 채, 우리는 삶의 뜨거움과 누린내와 각성제를 한꺼번에 들이킨다. 이민하 작가의 작업 속에서 이는 불가피하다.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비평모음집에서 발췌

2017. 9 성과 속을 매개하기, 희생양 되기 (고충환)

성과 속을 매개하기, 희생양 되기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이민하는 종이와 가죽에 텍스트를 쓰는 작업을 한다. 처음엔 기름을 먹인 종이에, 그리고 이후 점차 무두질된 양가죽, 소가죽, 돼지가죽, 그리고 사슴가죽에다 쓴다. 예나 지금이나 가죽을 무두질하는 것은 천한 일에 속한다. 작가가 가죽에다 텍스트를 쓰는 것은 이런 사회적 계급의식과, 사회적 약자로서의 자의식과 무관하지가 않다. 작가는 사회 문제며 사회 환경에 관심이 많다. 예컨대 전작(2017, 천 개의 문제풀이와 좌절)에서 작가는 가리봉동 쪽방촌의 한 방을 온통 텍스트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다. 기름을 먹인 종이로 도배를 한 후, 그 위에다 연필로 빼곡하게 텍스트를 기록했는데, 공무원시험, 토익시험, 부동산중개사자격증시험을 위한 기출문제들이다. 이런저런 시험에 내몰린 내일이 없는 청춘들의 암울한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2011년에는 가죽에 텍스트를 쓰고 그 과정을 전시하는 작업으로 동일본 대지진 참사의 희생자를 기리기도 했다(지난한 일).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 가죽에 텍스트를 새기는 행위는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하는 제의적 성격을 갖는다. 청춘과 희생자들 같은 사회적 약자의 상처를 보듬어 새살이 돋게 하는(재생) 것이다.

텍스트로는 세계의 모든 언어로 된 모든 종교의 기도문을 필사했다. 작가가 직접 필사하기도 하고, 참가자를 매개로 필사하기도 하고(관객참여), 때론 플로터를 통해서 필사를 하기도 한다. 왜 기도문인가. 작가의 작업에서 기도문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종이에, 가죽에 기도문을 필사하는 작가의 행위며 작업은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가지고 있는가. 사람들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이타적인 대의나 존재론적인 경우와 같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를 위해서도 기도한다. 이처럼 기도는 양가적이다. 성에도 속하고 속에도 속한다. 성과 속을 매개시켜준다. 속에 속한 것을 정화시켜 성의 차원으로 승화시켜준다. 정화와 승화를 매개로 성속을 연결시킨다(성속의 변증법?). 연결시킨다기보다는 원래 연결된 상태, 원초적 상태, 처음상태를 상기(아남네시스)시킨다. 처음상태(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원형)를 복원하고 회복시킨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존재의 처음상태는 성과 속이, 삶과 죽음이 하나로 연결돼 있었다고(연속성) 본다. 그리고 여기에 자본주의와 경제제일주의원칙이 매개되면서 생산적인 것(세속적인 삶)과 비생산적인 것(죽음과 성에 속한 것)이 분리되었다고(불연속성) 진단한다. 그러므로 불연속성을 넘어 원래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이 존재의 과제로서 주어진다.

작가는 그렇게 성과 속의 상관성에, 성과 속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여기서 성에 줄이 닿아있는 종교는 속을 정화하는 것, 속으로 하여금 성의 차원으로 승화시켜주는 것과 관련이 깊다. 그 방법이 여럿 있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가 경(기도문)을 외우는 것(독경)이고, 받아쓰는 것(필사)이다. 그렇게 받아쓰다보면 내가 지워지고 쓰는 행위만 남는다. 내가 지워진다? 번뇌가 지워지고, 욕망이 지워지고, 상처가 지워진다. 그렇게 지워진 내가 비로소 투명해지고 오롯해진다. 역설이다. 지움으로써 오롯해지는, 아를 지워 진아(진정한 나, 처음상태 그대로의 나)를 얻는 역설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종이에, 가죽에 기도문을 필사하는 행위는, 그리고 참가자로 하여금 필사에 참여시키는 행위는 이처럼 나를 지우는, 번뇌가 사라지고 욕망을 잠재우고 상처를 치유하는, 그럼으로써 진정한 나를 얻는, 진정한 나와 대면하는, 자기반성적인 행위와 관련이 깊다. 수신과 수행의 상징적 의미와 관련이 깊다.

그렇다면 작가는 가죽에다 어떤 텍스트를 어떻게 쓰는가. 어떤 텍스트로 치자면 주로 기도문을, 그리고 참가자가 있는 경우에 저마다의 내면독백(고백? 상처?)을 쓴다. 어떻게 쓰는가를 보면 인두로 필사를 한다. 그렇게 가죽에다 인두로 필사를 하다보면 가죽 타는 냄새가 나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참가자 저마다의 속말을 글로 뱉어내는 행위와 과정을 통해서 내면에 응축된 상처가 타고(정화?), 연기와 함께 해소(승화?)되는 것이다. 신자들이 지성소를 찾아 저마다의 죄(상처)를 고백하고 죄 사함(상처가 해소되는)을 받는 종교 예식을, 그 예식의 상징적 의미를 생각하면 되겠다. 실제로 작가는 전작에서 한 마을의 가장 높고 편평한 곳(아마도 성스러운 땅이면서 거룩한 곳, 땅에 있으면서 정작 그 주권이 하늘에 속한 곳, 그러므로 교회)에 지성소를 차리고, 마을주민들로부터 기원문을 적은 엽서를 전달받는다. 여기서 기원문은 기도하기, 죄를 고백하기, 고민을 털어놓기, 그리고 어쩌면 무슨 수건돌리기처럼 상처를 전이시키기와 통한다. 그리고 기원문을 적은 엽서를 전달받는 작가의 행위는 고민을 들어주고 상처를 덮어쓰는, 그럼으로써 마을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상처가 치유되는 상징적이고 주술적인 의미와 관련이 깊다. 저마다 내면의 상처를 털어놓아 상처가 해소되는 과정으로 보면 되겠고, 여기서 작가는 그 계기며 매개역할을 한다. 매개자다. 무당이다(요셉 보이스는 예술가를 무당이라고 했다).

작가는 참가자 저마다의 내면독백(상처)을 텍스트로 쓰게 한다고 했다. 여기에 작가가 누워있다. 편안해 보이기도 하고, 무방비 상태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무두질된 사슴 가죽을 의복처럼 이불처럼 덮어쓰고 있다. 그리고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5명의 외국인 참가자들(우즈베키스탄 2명, 중국, 터키, 이탈리아)이 겪은 차별받은 이야기를 저마다 가죽표면에다 인두로 쓴다. 차별받은 이야기는 작가가 참가자들에게 주문한 것인데, 작가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를테면 이주노동자 문제)이 반영된 것이고, 단순한 차별을 넘어서 저마다 내면에 응축된 존재론적인 상처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참가자들이 가죽표면에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쓰면 가죽이 타고 냄새가 나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상처가 전이되면서 해소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가죽이 타고 냄새가 나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은 중요하다. 바로 상처가 참가자로부터 작가에게로 전이되는 과정이 하나하나 기록되고 등록되는 상징적 지점이고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서 전해지는 상징적 제스처들이며 종교적 의례들의 원형으로 보면 되겠다.

이를 통해 상처가 참가자로부터 작가에게로 전이된다고 했다. 비록 가죽을 덮어쓰고 있다고는 하나, 여기서 가죽은 사실은 작가의 몸을 대리한다. 그러므로 가죽에 이야기를 쓰는 것은 곧 작가의 몸에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징적인 의미로는 작가의 몸에 이야기가 아로새겨지고, 작가의 몸이 타고, 작가의 몸에서 냄새가 나고, 작가의 몸이 연기가 돼 피어오른다. 번제다. 우리 죄를 대신할 희생양을 지목하고, 그 희생양을 바쳐 신의 분노를 잠재우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르네 지라르는 이런 희생양 만들기를 종교적 제의의 차원을 넘어 제도적 장치(제도기계)라고 본다. 사람들의 폭력욕망(욕망기계)을 투사하고 전이시키고 해소시켜줄 희생양 지목하기, 희생양 만들기, 희생양 내어주기에 모든 건전하고 건강한 제도의 성패가 달려있다. 그렇게 종교는 사회의 균형추 역할을 한다. 그 과정에서 폭력과 관련되고, 그런 만큼 제도는 희생양이 흘린 피 위에 축조된다. 그렇게 아마도 추후 작가의 행보는 폭력이 있는 곳, 세계 도처의 분쟁지역을 찾아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희생양을 자처하고 무당을 자처하는 행보가 될 것이다. 무당은 성과 속을 매개하고, 삶과 죽음을 넘나든다. 가죽은 죽은 짐승들의 몸이고, 죽음의 표상(주검)이다. 그 주검을 덧입어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재생이다. 참가자의 입장에서 보면 희생양(무당)의 죽음을 매개로 폭력(폭력욕망)이 해소되고 상처가 치유되는 재생이다. 작가는 그런 죽음의 표상(상처가 아로새겨진 가죽 그러므로 어쩌면 살과 피가 타는 몸)을 옷처럼 덧입기도 하고 이불처럼 덮어쓰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 세계의 상처와 폭력과 분쟁이 투사되는 스크린을 대신한다.

아나포라(Anaphora), 그리스어로 기억을 의미한다. 아남네시스(Anamnesis), 상기를 뜻한다. 기억보다 더 깊은 기억, 원형적 기억, 존재의 처음상태에 대한 기억이다. 그리고 헤쉬키아(Hesychia), 내적평안을 의미한다.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들이며, 작업을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에 해당한다. 이로써 유추해볼 때 작가의 작업은 존재의 원형을 상기시키고, 존재의 처음상태를 회복하고 복원하는 것과 관련이 깊다. 진정한 자기와 대면하는 자기반성적인 과정을 전제로 하는 이 과정(어쩌면 죽음너머로 재생되는, 그러므로 거듭나기와 정화의식)이 있은 연후에라야 존재는 비로소 내적평안을 되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이다. 가죽에 이야기를 쓰는 작가의 행위는 책을 쓰는 행위에 비유할 수 있다. 성과 속, 상처와 치유, 폭력과 희생양(르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이라고 했다), 놀이와 종교의식이 날실과 씨실로 직조된 고백의 문화학으로 집필된 책일 수 있다.

(2017년 개인전 ‘아남네시스’ 도록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