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rss version="2.0"
	xmlns:content="http://purl.org/rss/1.0/modules/content/"
	xmlns:wfw="http://wellformedweb.org/CommentAPI/"
	xmlns:dc="http://purl.org/dc/elements/1.1/"
	xmlns:atom="http://www.w3.org/2005/Atom"
	xmlns:sy="http://purl.org/rss/1.0/modules/syndication/"
	xmlns:slash="http://purl.org/rss/1.0/modules/slash/"
	>

<channel>
	<title>Minha LEE &#187; leeminha</title>
	<atom:link href="http://leeminha.com/?author=1&#038;feed=rss2" rel="self" type="application/rss+xml" />
	<link>http://leeminha.com</link>
	<description></description>
	<lastBuildDate>Sat, 07 Mar 2026 13:57:16 +0000</lastBuildDate>
	<language>en-US</language>
		<sy:updatePeriod>hourly</sy:updatePeriod>
		<sy:updateFrequency>1</sy:updateFrequency>
	
	<item>
		<title>일본 개인전 [물렁한 뼈] 개최</title>
		<link>http://leeminha.com/?p=1527</link>
		<comments>http://leeminha.com/?p=1527#comments</comments>
		<pubDate>Fri, 06 Mar 2026 07:49:26 +0000</pubDate>
		<dc:creator><![CDATA[leeminha]]></dc:creator>
				<category><![CDATA[News]]></category>

		<guid isPermaLink="false">http://leeminha.com/?p=1527</guid>
		<description><![CDATA[아이치현립예술대학 예술자료관의 기획과 초청으로, 나고야시의 중심부에 자리한 사쿠라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합니다. 노무라 재단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오프닝 첫날은 Km: 씨의 라이브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고, 2월 14일에는 신슈대학 교수이신 카나이 타다시(조각평론가) 선생님과 아티스트 토크를 진행합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a href="http://leeminha.com/?attachment_id=1528" rel="attachment wp-att-1528"><img class="aligncenter size-large wp-image-1528" alt="나고야 개인전1" src="http://leeminha.com/wp/wp-content/uploads/2026/03/나고야-개인전1-639x1024.png" width="639" height="1024" /></a></p>
<p>아이치현립예술대학 예술자료관의 기획과 초청으로, 나고야시의 중심부에 자리한 사쿠라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합니다. 노무라 재단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오프닝 첫날은 Km: 씨의 라이브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고, 2월 14일에는 신슈대학 교수이신 카나이 타다시(조각평론가) 선생님과 아티스트 토크를 진행합니다.</p>
]]></content:encoded>
			<wfw:commentRss>http://leeminha.com/?feed=rss2&#038;p=1527</wfw:commentRss>
		<slash:comments>0</slash:comments>
		</item>
		<item>
		<title>[       ]를 새긴다는 것, 이민하 개인전</title>
		<link>http://leeminha.com/?p=1522</link>
		<comments>http://leeminha.com/?p=1522#comments</comments>
		<pubDate>Fri, 06 Mar 2026 07:45:29 +0000</pubDate>
		<dc:creator><![CDATA[leeminha]]></dc:creator>
				<category><![CDATA[News]]></category>

		<guid isPermaLink="false">http://leeminha.com/?p=1522</guid>
		<description><![CDATA[인천과학예술영재학교의 초청으로 2024년 8월 5일부터 23일까지 2층 보다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진행합니다. 영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아티스트 토크와 워크샵도 진행됩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a href="http://leeminha.com/?attachment_id=1524" rel="attachment wp-att-1524"><img class="aligncenter size-large wp-image-1524" alt="영재고_포스터" src="http://leeminha.com/wp/wp-content/uploads/2026/03/영재고_포스터-718x1024.png" width="640" height="912" /></a></p>
<p>인천과학예술영재학교의 초청으로 2024년 8월 5일부터 23일까지 2층 보다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진행합니다. 영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아티스트 토크와 워크샵도 진행됩니다.</p>
]]></content:encoded>
			<wfw:commentRss>http://leeminha.com/?feed=rss2&#038;p=1522</wfw:commentRss>
		<slash:comments>0</slash:comments>
		</item>
		<item>
		<title>2024. 8 희생제의와 봉헌물, 죽음과 삶을 가로지르는 의례의 시간 (최화선)</title>
		<link>http://leeminha.com/?p=1509</link>
		<comments>http://leeminha.com/?p=1509#comments</comments>
		<pubDate>Fri, 06 Mar 2026 02:32:54 +0000</pubDate>
		<dc:creator><![CDATA[leeminha]]></dc:creator>
				<category><![CDATA[Text-Kr]]></category>
		<category><![CDATA[엑스보토]]></category>
		<category><![CDATA[의생제의]]></category>
		<category><![CDATA[이민하]]></category>
		<category><![CDATA[최화선]]></category>
		<category><![CDATA[출산의례]]></category>

		<guid isPermaLink="false">http://leeminha.com/?p=1509</guid>
		<description><![CDATA[희생제의와 봉헌물, 죽음과 삶을 가로지르는 의례의 시간: 이민하, 《삶의 뒤집힌 안쪽》과 《폭격의 자장가》 최화선 (종교학자) 세상의 여러 곳에서 일어났던 비극과 아픔의 기억들, 그러한 기억들을 종교적 의례의 언어들을 참조하며 소환해왔던 이민하 작가가 임신과 출산에 주목하면서 이를 둘러싼 불안, 고통, 두려움에 주목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민하 작가의 2023년 두 개인전, 《삶의 뒤집힌 안쪽》 (2023. 10.6-10.15,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희생제의와 봉헌물, 죽음과 삶을 가로지르는 의례의 시간: 이민하, 《삶의 뒤집힌 안쪽》과 《폭격의 자장가》</p>
<p>최화선 (종교학자)</p>
<p>세상의 여러 곳에서 일어났던 비극과 아픔의 기억들, 그러한 기억들을 종교적 의례의 언어들을 참조하며 소환해왔던 이민하 작가가 임신과 출산에 주목하면서 이를 둘러싼 불안, 고통, 두려움에 주목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민하 작가의 2023년 두 개인전, 《삶의 뒤집힌 안쪽》 (2023. 10.6-10.15, 아트플러그 연수)과 《폭격의 자장가》 (2023. 11.21-2024. 1. 13 수림큐브)는 여성이 겪는 임신과 출산은 세상의 모든 폭력과 고통, 삶의 불안과 동요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환기시키며 시작된다. 2채널 영상 &lt;허물, 체액, 범람&gt; 속 여성들은 임신, 출산과 관련된 어려움과 아픔을 말하며, 설치작품 &lt;폭격의 자장가&gt;의 언뜻 포근해 보이는 게르와도 같은 따뜻한 공간- 당연하게도 자궁을 연상시키는 공간은 곧 공간 전체를 뒤흔드는 강렬한 포격음으로 동요한다. &lt;피부의 북&gt;은 언뜻 보기엔 웅크리고 있는 귀여운 아기 같지만,  가까이 가서 이것이 돼지생가죽을 덮은 북임을 알게 되는 순간 동물가죽, 살가죽과 관련된 여러 신화적 이미지들이 겹쳐지며 이 아기 형상이 숭배를 위한 것인지 희생제의를 위한 것인지 모호하게 만든다.</p>
<p>종교학자 낸시 제이(Nancy Jay)는 희생제의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들이 행하는 유사 출산 의례라 생각했다. 여성들처럼 실제로 아이와 육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남성들이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에서 아이(좀더 정확히는 아들)로 이어지는 사회적 종교적 계보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문화적 출산 의례가 희생제의라는 것이다. 출산과 희생제의 모두에서 피의 이미지가 지배적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lt;허물, 체액, 범람&gt; 속 붉은 카펫, 퍼져나가는 붉은 색 염료, 《삶의 뒤집힌 안쪽》의 오브제가 놓인 세 개의 붉은 원형 좌대는 피의 이미지를 통해 출산 의례가 지니는 희생제의와의 묘한 연관성을 떠올리게 만든다.</p>
<p>그러나 이민하의 전시장은 출산 이면의, 희생제의의 폭력성만을 상기시키지 않는다. 《삶의 뒤집힌 안쪽》 벽에 걸린 푸른 옷과 향료는 스스로 의례의 집전자가 되었던 작가가 영상 &lt;허물, 체액, 범람&gt;에서 입고 들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을 상징하는 붉은 색과 대비되는 성모의 푸른색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 푸른색은 이 전시가 피의 희생제의에만 주목하기 보다는, 희생제의를 가로질러 앞으로 걸어나가는 소망과 기원을 어딘가에 품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영상의 시작과 끝 작가는 향료를 들고 어딘가를 향해 걸어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계보를 이어가기 위해 흘리는 피와 폭력의 되물림이 아니라, 나와 다른 타자를, 또다른 생명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쓰다듬어주는 몸짓이다.</p>
<p>그러기에 이 곳은 죽음과 삶, 아픔과 치유,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의례의 장이다. 붉은 좌대 위에 누워있는 붉은 옻칠의 아기 둘레에는 귀와 코 모형이 가득 펼쳐져 있다. 이 귀와 코 모형이 임진왜란 당시 살해당한 조선인들의 귀와 코가 묻혀있는 일본의 귀무덤을 연상시키는 순간 이들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끈질기게 반복된 폭력과 잔인함의 일면을 상기시키고, 그러기에 그 한 가운데 누워있는 어린 아이는 희생제의에 바쳐진 제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귀와 코 모형은 동시에 고대 세계로부터 신에게 감사와 기원을 담아 제작하던 신체 부위 모형 봉헌물- 엑스-보토(ex-voto)를 연상시키기도 한다.</p>
<p>라틴어 “ex voto suscepto” (“바쳐진/약속된 서약에 따라서”)라는 문구로부터 기인한 엑스-보토는 가톨릭 교회의 봉헌물을 뜻하는 말로 주로 사용되지만, 그 양상이나 기원은 그리스도교 이전으로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고대 그리스 및 에트루리아 전통에서 두드러지는 엑스-보토 봉헌물의 한 양상은 신체 부위 모형이다. 다리, 손, 팔, 눈, 코, 심지어 자궁 등 인체 내부의 장기의 모형을 한 이 봉헌물들은 아마도 봉헌자의 환부를 상징하는 징후적 사물이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고대의 관습을 이교적이라 비난했지만, 결국 자신들의 봉헌물 엑스-보토 전통 속에 흡수시킨다. 15세기 16세기 피렌체 교회에서는 밀랍으로 만든 이러한 신체 부위 모형 봉헌물이 가득한 방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고, 오늘날에도 브라질 노소 세뇨르 두 본핌 교회의 ‘기적의 방’ 천장에는 감사와 기원의 뜻을 담은 팔 다리 모형 봉헌물이 가득하다.</p>
<p>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붉은 좌대 위에 널린 귀와 코 모형은 치유와 기적을 지시하는 징후적 봉헌물이며, 누워있는 아기 형상은 제물이 아닌, 축복과 기적의 대상이다. 이민하의 전시장 속 긴장감은 희생제의의 제물이 죽음을 가로질러 치유와 기적,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갈고 닦으며 만들어가는 작가의/여성들의 노고로 이뤄진다.</p>
<p>작가가 아기 모형 오브제를 제작하며 3D 프린팅 위에 여름 내 옻칠 작업을 한 과정은 작가의 노트에 잘 나타나있다. 특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해야만 하는 옻칠 작업장의 환경, “한 개의 레이어가 건조되는데 최소 2-3일이 필요로 하고, 그런 레이어를 20개 이상 쌓아서 갈아내어 밑색을 드러내는” 이렇게 품이 많이 들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게다가 온몸이 옻독이 오를 위험까지 감내해야 하는 작업 방식을 작가가 택한 것은 분명 의도적인 것일테다. 수많은 시간과 어려움, 자기 희생의 가능성까지 감내해가면서도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예술은 종교적 수행과도 닮았고, 또한 아기를 낳고 키워가는 과정과도 닮았다. 그러기에 작가의 지난한 노력이 담긴 옻칠한 아기 형상 오브제들이 묘하게도 불상의 느낌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기 형상 오브제들은 그 자체의 형상으로도 점차 커가는 아이의 모습으로 변하며 시간의 변화를 보여주지만, 옻칠 작업이라는 작가가 선택한 제작 방식 자체가 그러한 긴 시간과 그 속에 담긴 노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작업은 보이지 않는 시간을 재료와 제작과정을 통해 구체화하고자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리고 모든 종교적 의례가 보이지 않는 것들, 보이지 않는 시간, 긴 시간의 흐름을 어떠한 구체적 물질과 재료, 제작과정을 통해 가시화하고 드러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이 작업은 매우 종교적이고 또한 의례적이다.</p>
<p>비슷한 맥락에서, 오브제만 보았을 때는 동물 가죽과 관련된 희생제의를 연상시켰던 &lt;피부의 북&gt; 역시, 영상 작업 &lt;허물, 체액, 범람&gt; 속에서 직접 작가의 바느질을 통해 이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드러나면서 새로운 의미의 층위를 획득하게 된다.  임신과 관련된 서로의 아픔을 나누며 서로의 손목을 잡고 눌러주는 여성들 옆에서 작가는 한 땀 한 땀 동물 살가죽을 바느질하여 악기를 만든다. 동물의 살가죽으로 악기를 만드는 모습은 언뜻 마르시아스 신화와 같은 잔인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지만, 영상 속 여성들이 서로의 살을, 몸을 악기 삼아 연주하듯 눌러주는 모습과 병치될 때, 이러한 악기 만들기는 잔혹한 현실을 넘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삶을 이어가려는 노력으로 승화된다.</p>
<p>티벳 불교의 모래 만다라 의례는 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하고 비영속적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곳에서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함으로써 계속 삶을 긍정하고 살아나가게 하는 힘을 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열심히 쌓고 만든 것들을 결국 모두 없애버리는 이 의례에서 핵심은 단지 모든 것이 무상함을 말해주는 마지막 파괴에만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명확한 지도나 계획 없이도 그저 함께 무엇인가를 계속 만들고 작업하는 과정에 있다. 작가의 각설탕 만다라 작업에서도 설탕이 상징하는 달콤함과 유혹, 허망함을 그저 마지막에 뜨거운 물로 부어 없애버리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각설탕 위를 기어다니는 개미들에 초점을 맞춘 영상은, 개미들의 움직임이 상징하는, 무한처럼 느껴지는 우리의 고된 삶의 시간들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만다라를 만들고, 악기를 만들고, 귀와 코 모양의 신체 부위 봉헌물을 만들고, 그리고 봉헌물들에 손을 얹어 기원의 바치는 손짓들을 함께 생각해보게 한다, 바로 그러한 노력과 시간들, 몸짓들이야말로 살을 찢는 아픔과 울부짖음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계속 긍정하고 걸어나가는 순간들을 만들어나가는 힘이라는 보여준다.</p>
<p>신화를 바꾸기 어려울 때 사람들은 의례를 조금씩 바꾸어 나가면서 궁극적으로 새로운 신화를 써나가길 원한다. 탈가부장적 종교를 모색하는 여성신학자들이 의례적 실천에 먼저 주목한 것도 오랜 시간 동안 굳어져 온 가부장제의 신화/신학을 의례적 실천들을 통해 변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임신과 출산, 육아를 둘러싼 모성의 신화를 바꿔가는 과정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임신과 출산을 신비화하고 미화하는 신화의 ‘뒤집힌 안쪽’을 보여주는 이민하 작가의 전시는, ‘폭격의 자장가’가 울리는 불안과 동요, 잔인한 현실을 가로지르며,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갈고 닦으며 만들어가는 여성들의 노력만이, 그들의 의례와도 같은 매순간의 몸짓들만이 이 오래된 신화를 바꾸고 ‘새로운 신화’를 써나가는 과정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기에 작가는 “불신을 넘어서는 수행의 힘”을 믿는 자이며, 이러한 믿음은 전시장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또다른 의례적 행위를 통해 계속 퍼져나갈 것이다.</p>
<p>2024년 8월</p>
<p>&nbsp;</p>
<p>&nbsp;</p>
]]></content:encoded>
			<wfw:commentRss>http://leeminha.com/?feed=rss2&#038;p=1509</wfw:commentRss>
		<slash:comments>0</slash:comments>
		</item>
		<item>
		<title>[삶의 뒤집힌 안쪽], 이민하 개인전</title>
		<link>http://leeminha.com/?p=1501</link>
		<comments>http://leeminha.com/?p=1501#comments</comments>
		<pubDate>Fri, 13 Dec 2024 04:05:30 +0000</pubDate>
		<dc:creator><![CDATA[leeminha]]></dc:creator>
				<category><![CDATA[News]]></category>

		<guid isPermaLink="false">http://leeminha.com/?p=1501</guid>
		<description><![CDATA[2022~2023년 인천형 예술인 지원사업에 선정된 결과보고전을 개최합니다. 아트플러그 연수 야외에서는 202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과 기술융합 유형1에 선정된 키네틱 작품 [Ravages]도 함께 공개됩니다. 일시 : 2023년 10월 6일(금) ~ 15일(일) 관람시간 : 10:00 ~ 18:00 장소 : 아트플러그 연수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량로 101번길 33)]]></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a href="http://leeminha.com/?attachment_id=1502" rel="attachment wp-att-1502"><img class="aligncenter size-large wp-image-1502" alt="IMG_0132" src="http://leeminha.com/wp/wp-content/uploads/2024/12/IMG_0132-1017x1024.jpg" width="640" height="644" /></a><a href="http://leeminha.com/?attachment_id=1503" rel="attachment wp-att-1503"><img class="aligncenter size-large wp-image-1503" alt="IMG_0131" src="http://leeminha.com/wp/wp-content/uploads/2024/12/IMG_0131-1024x1022.jpg" width="640" height="638" /></a></p>
<p>2022~2023년 인천형 예술인 지원사업에 선정된 결과보고전을 개최합니다. 아트플러그 연수 야외에서는 202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과 기술융합 유형1에 선정된 키네틱 작품 [Ravages]도 함께 공개됩니다.</p>
<p>일시 : 2023년 10월 6일(금) ~ 15일(일)<br />
관람시간 : 10:00 ~ 18:00<br />
장소 : 아트플러그 연수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량로 101번길 33)</p>
]]></content:encoded>
			<wfw:commentRss>http://leeminha.com/?feed=rss2&#038;p=1501</wfw:commentRss>
		<slash:comments>0</slash:comments>
		</item>
		<item>
		<title>2024. 3 폭력 안에서 다르게 &#8211; 다른 쪽으로 (양효실)</title>
		<link>http://leeminha.com/?p=1496</link>
		<comments>http://leeminha.com/?p=1496#comments</comments>
		<pubDate>Mon, 03 Jun 2024 07:25:08 +0000</pubDate>
		<dc:creator><![CDATA[leeminha]]></dc:creator>
				<category><![CDATA[Text-Kr]]></category>
		<category><![CDATA[Contemporary Art]]></category>
		<category><![CDATA[설치]]></category>
		<category><![CDATA[수림큐브]]></category>
		<category><![CDATA[양효실]]></category>
		<category><![CDATA[영상]]></category>
		<category><![CDATA[이민하]]></category>
		<category><![CDATA[전시리뷰]]></category>
		<category><![CDATA[폭격의자장가]]></category>
		<category><![CDATA[허물체액범람]]></category>
		<category><![CDATA[현대미술]]></category>

		<guid isPermaLink="false">http://leeminha.com/?p=1496</guid>
		<description><![CDATA[폭력 안에서 다르게 &#8211; 다른 쪽으로 양효실 (미학자, 미술비평) Ⅰ 카프카의 단편 「유형지에서(1919)」는 그의 전작(全作) 중 “잔혹함과 끔찍함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한 폭력의 판타지가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나는”(장혜순, 34) 단편이다. 죄수의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갈 때까지 몸 위에 바늘로 글을 새기는 처형 방식이 단편의 전경을 차지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두 달 뒤에 집필한 작품으로 맥락화한다면 현실-정치-폭력의 알레고리로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폭력 안에서 다르게 &#8211; 다른 쪽으로</p>
<p style="text-align: right;">양효실 (미학자, 미술비평)</p>
<p><b>Ⅰ </b></p>
<p>카프카의 단편 「유형지에서(1919)」는 그의 전작(全作) 중 “잔혹함과 끔찍함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한 폭력의 판타지가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나는”(장혜순, 34) 단편이다. 죄수의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갈 때까지 몸 위에 바늘로 글을 새기는 처형 방식이 단편의 전경을 차지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두 달 뒤에 집필한 작품으로 맥락화한다면 현실-정치-폭력의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연인 펠리체 바우어와 약혼하고 파혼하는 과정의 심리적 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읽는다면 카프카 개인의 사적-정신적 붕괴의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고문기계인 침대에 누워 고문 바늘인 써레가 “네 상관을 공경하라”를 적는 동안 죽어갈 죄수의 죄는 카프카의 인물들이 겪는 형벌이 이유 없는 박해이듯이 이유가 거의 없다. “불침번을 서야 할 야간 시간에 당번병으로서 잠을 잤다”는 게 “불복종과 상관모욕”의 증거이다. 유럽의 식민지인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인 듯 보이는 유형지에서 유럽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원주민-희생양-죄수들에 대한 처형은 지금껏 “재래식 처형방법”을 발명한 전임사령관의 충복인 장교가 집행해왔고, 신임사령관은 당연히 이 낡고 잔인한 기계를 없애려고 하고 있다. 백인 장교-사디스트-처형자는 말미에 갑자기 죄수를 풀어주고 마조히스트-피해자를 자처하며 침대 위로 올라가 긴 시간, 대략 12시간이나 지속되기 마련인 고통을 겪으며-즐기며(!) 죽으려하지만 너무 오래 글자를 써온 써레의 오작동으로 인해 장교는 즉사한다. 아이러니! 줄곧 냉정하고 중립적인 관찰자로 이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달한 탐험가, “유형지의 주민<b>도 아니고</b> 이 유형지가 소속된 국가의 국민<b>도 아니었던</b>” 탐험가가 유형지를 떠나며 단편은 끝이 난다</p>
<p>(나는 식민자도 피식민자도 아닌 탐험가의 ‘자리’, 이분법적 대립의 현실 바깥의 어떤 자리, 카프카가 위치한 자리를 응시한다. 공모도 저항도 아닌,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자리, 이 글이 다룰 이민하 작가의 자리 같아 보이기도 하는 자리를. )</p>
<p>나는 2019년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작가 오픈 스튜디오 프로그램에서 이민하 작가(이하 작가로 통칭)의 대표 사물-오브제라 할 무두질한 가죽을 처음 본다.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거나 벽에 걸린 짐승 가죽은 일순간 살코기나 내장에 의지하지 않고도 스튜디오를 도살장이나 푸주간으로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런 ‘환각’은 내게는 좋은 경험이었다. 시각적 강렬함과 감각적 전치를 겪으며 나는 좁은 미술계에서 또 보게 되겠군, 생각하며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2023년 개인전 《폭격의 자장가》 리뷰를 부탁하는 수림문화재단의 메일을 받는다.</p>
<p>죽어가는 동물의 육체성이 제거된 가죽-사물을 바탕으로 근대 민족-국가 및 제국주의에 의해 자행된 폭력을 소환하고, 미적으로 전유하는 작가의 작업은 일견 희생자 공동체를 위한 제의를 주관하는 제사장-주술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작가의 제의의 형식이 기괴하고 모호하기에 연상 작용은 어느 순간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가죽 공예의 소재인 무두질한 가죽을 이어 붙여 전시 공간의 벽에 걸맞는 세계 지도 형태로 만들어 걸거나 전시 테이블 위에 펼친 후 작가는 그 위에 그녀가 ‘플로터’라고 부르는 특수하게 제작된 장치를 설치하고, 가죽에 글을 새기는 작업을 한다. 짐승의 피부에 소유주의 이름-문장을 새기는 인두-불도장이 플로터 끝에 부착되어 있다. 레지던시를 오가며 작업하는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이 지역에 대한 리서치에 기반해 지역의 역사-이야기를 복원하는 형식은 작가에게도 영향을 미친 게 사실이다. “대전 지역에서 1950년대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들의 좌표 제시”를 의도로 삼고 “빨갱이”와 “부역자”라는 낙인을 계속 가죽 위에 찍고 새기는 〈이분법과 맹목성, 2021〉이나 아우슈비츠, 광주, 난징과 같은 대학살의 현장을 세계 지도에 표식하면서 그 장소 위에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나 “나무아비타불” 같은 기도문을 쓰는 〈그을린 세계, 2018〉, 혹은 세 장의 소가죽을 대상으로 폭력을 자행하는 세 대의 기계-퍼포머가 등장하는 &lt;Ravages, 2023&gt;와 같은 작업은 가죽과 기계의 ‘관계’라는 동일 조건 속에서 다른 상황, 쾌락을 모색한다. 내게는 낙인찍기, 애도, 현실에 만연한 물리적 폭력의 알레고리적 반복으로 차별화되어 읽혔다. 폭력은 그 자체 나쁜 것이라는 도덕적 반응이나 피해-당사자 편에 있다고 가정된 작가들 일반에 대한 기대가 미끄러진다. 이민하 작가는 역사의 폭력에 분노하고, 미시사가 발굴한 고통을 위로하고, 가죽과 기계의 폭력적 관계를 ‘즐긴다’(jouir).</p>
<p>작가의 작업을 읽으려는 내가 참조한 전(前) 경험은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관계’ 혹은 불가능한 이미지인 “수술대 위의 우산과 재봉틀”이었다. (무두질한)짐승 가죽과 작가가 협업자의 도움을 빌려 발명한 고문-글쓰기 기계의 병치는 일견 일상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전혀 연결불가능한 사물-이미지-기표들의 관계를 조성한다. 수술대, 우산, 재봉틀은 무의식에서, 도착적인 성적 연상 속에서나 연결가능하다. 의식의 관성이나 폭력을 위반하는 무의식적 연상의 힘에 기댄 초현실주의적 이미지(상징계적 질서-논리를 찢는)를 통해 나는 작가의 가죽 대(對) 기계의 대치나 ‘관계’를 우선 이해했다. 아니 기억 속에 다행히 그 이미지가 있었다. 동물성이 거의 제거된 가죽과 인간성이 겨우 읽히는 기계는 서로를 상대할 수 있고 견딜 수 있다. 미적 장에서라면. 초자아의 강력한 작용 속에서도 고개를 쳐드는 ‘이드’의 힘 때문에 보기-감상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금기와 위반의 동시성을 알고 즐기는 이들은 몰래 즐길 것이다. 가축의 엉덩이에 ‘소유자’의 이름-엠블렘을 찍는 불도장이 폭력의 반복과 동시에 고통의 위로에 사용된다.</p>
<p>동시대 전시장은 정치적 올바름 함양과 미적 향유가 따로따로 혹은 동시에 일어나는 장소이다. 근래의 전시는 휴머니즘적 계몽과 포스트휴머니즘적 (탈)승화 사이에서 혹은 그 둘을 동시에 끌고 가며 의식의 검열과 욕망의 탈주를 관리한다. 이민하 작가의 전시는 내가 보기에는 그 둘이 중첩된, 공존하는 전시로 보인다. &lt;유형지에서&gt;의 가해자 장교가 최후의 처형자이자 피학살자로서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기계와 함께 사라지려한 장면은 유형지의 폭력을 무구한 원주민에 공감하며 읽고 있던 독자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카프카는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거스르며 불가능한 자리, 폭력이 쾌락과 겹쳐지는 글쓰기가 일어나는 자리를 꿰차고 쓰는 자의 예외성을 즐긴다. 글쓰기는 현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현실이 붕괴되는 미적인 것에 바쳐져야 한다.</p>
<p>나는 카프카의 &lt;유형지에서&gt;를 다시 읽었고 카프카의 도착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국내 카프카 연구자의 논문 두 편을 인용할 것이다. 우산과 재봉틀 다음으로 내가 주문한 ‘전(前)경험’이 &lt;유형지에서&gt;였기 때문이고, 국내 카프카 연구자의 수준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가령 고문기계가 “남성의 성적인 역할”을 대행하는 “찌르고 관통하는 기관”을 연상시킨다는 것, 그리고 직접적으로 몸에 글을 쓰는 쾌락(에로스)과 그 몸을 죽이는/거세시키는 행위(타나토스)가 중첩되어 있다는 연구자 변난수의 관점, 또 “폭력이란 가면 뒤에 숨겨진 성적 욕망의 형상화”, 혹은 “에로스와 타나토스, 지배와 피지배, 능동과 수동, 명예와 수치, 용기와 굴종,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양축”을 번갈아 사용하는 이 소설이 “예술적이고 미로 같은 전임 사령관의 도안은 메시지를 전하는 계몽주의 문학 선상의 흐름을 벗어나 문학의 자율성을 표방하는 오나먼트(ornament)로 특징지어지는 현대문학의 미적 경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드러낸다고 분석한 장혜순의 관점은 이분법적인 시선의 명료성을 교란하는 역설과 모순의 자리를 주장한다. 예술이 더 나은 현실을 위한 것이라면 폭력에 맞서 비폭력을, 피해자의 아픔과 고통의 우선성을 예술은 내걸어야 한다. 맞다. 그리고 현실의 도구나 기능이 아닌 예술의 (상대적)자율성이 예술의 현실적 기능이나 초(hyper)-현실적 역할이라면 폭력을 구조화하는 예술의 차이를 보유해야한다. 이미 예술은 줄곧 그런 폭력과 비폭력,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이 허물어지는, 능동과 수동이나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이 작동할 수 없는 예외적 자리를 붙들고 생존해왔기 때문이다. 혹은 비폭력과 정치적 올바름의 긴급함에 반응하는 예술의 사회성이나 책임을 예시하는 무수한 작업들이 있다. 그리고 카프카는 사디스트-가해자와 마조히스트-피해자의 관계가 일방향적일/단선적일 수 없는 어떤 불가능한 자리에서 “즐기기” 위해, 즉 현실과 법은 읽어낼/볼 수 없는 모호한 자리를 꿰찬 채로 “미적 경험”의 예외성, 혹은 특수성을 공표한다. 변난수나 장혜순의 카프카 읽기는 상상의 폭력, 작가가 발명한 폭력의 무대가 어떻게 현실 폭력을 인용하면서도 그것과는 다른 폭력의 장면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이해를 도모한다. 말하자면 나는 이민하 작가의 작업을 “감상”하면서 곧장 현실 폭력을 떠올리고 도덕적으로 반응하는 (기계적)반작용이 아닌, 폭력 안에서 폭력을 구조화하는 주관적인 형식을 읽었던 것이고 그것이 예술의 예외성, 특수성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살점이 제거된 짐승 가죽을 뜯고 찢는, 인간의 포스트휴먼적 대체물인 세 대의 기계로 구성된 설치 작품 &lt;Ravages&gt;가 전시예정이었던 장소에서 밀려난 것도, 사람들이 정확히 불편함의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불편을 토로한 것도 이해 못할 일이 아니다. 그 작품을 즐기는 미적 감상자와 그 작품을 불편해하는 도덕적-의식적 감상자는 모두 예술의 감상자들이다. 혹은 예술이 도덕-윤리의 수단이 아니라 도덕-윤리와 새로운 ‘관계’를 조성하는 방법이다.</p>
<p>나는 항간에서는 변태심리로 분류하고 예술가들에게서는 거의 상수로 작동하는 듯한 사도마조히즘적인 경향에 슬며시 이민하 작가를 끌어들인다. 작가와의 인터뷰 중에 나는 유소년기 무지막지한 독서광이었던 작가의 독서가 얼마나 들쭉날쭉했는지에 대해 듣는다. 언니오빠를 위한 큰아버지의 선물이었던 책장의 문학 전집을 작가는 &lt;제인에어&gt; 다음에 헨리 밀러의 &lt;북회귀선&gt;이나 폴린 레아주의 &lt;o 이야기(story of 0)&gt;를 읽는 식으로 ‘독학’했고, 이후 포르노, 스너프 필름, 고어, 할리퀸 등등 성-폭력-전쟁-죽음이 분리불가능하게 얽혀 있는 “바깥”에 대한 성향을 체화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가해자-장교와 같은 인물들이 ‘주연‘으로 움직이는, 피해자들의 이름-목소리는 적히지 않은 도착적 텍스트이다. 우리는 그런 전쟁의 승리자이자 역사의 처벌을 받은 이들의 이름들, ’행위들‘ 사이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 ’원주민들‘을 기억하려고 하거나 쓰여진 승리자의 이름들에 압도당할 것이다―우리의 내부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이긴 자가 옳은 자라는 병리적 앎을 각인하는 고문 기계이다. 나는 도덕보다 먼저 불온한 감각들, 욕망들을 체화한 이민하 작가에게서 물론 나를 보기도 한다.</p>
<p>내게 ’폭력 한 가운데 미적인 것‘이라는 모순적인 사태를 글자그대로 떠올리게 한 작가의 작품은 &lt;상흔(Stigma), 2019&gt;이다. 역시 가죽 공예에서 차용한 물성형 기법이 현실에 대한 상상적 개입의 중요한 형식으로 활용되고 있는 &lt;상흔&gt;은 먼나라 독일의 나치 치하에서 자행된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거기에 착안해 만든 작품이다. 작가 자신의 몸과 마네킹을 이용해서 사진촬영, 3D데이터화, 캐스팅 등등의 상당히 복잡한 공정을 거친 이 고문당하고 쓰러지고 사라지고 죽어가는 젠더리스한 형상은 나치 정권이 제정한 유전증 근절법(eradication of law)에 대한 작가의 읽기에 기반한다. 정신병, 유전병, 반사회적 성향, 동성애자 등을 포함한 ‘열등분자들’을 안락사시키려는 법의 폭력에 대한 ‘문서’가 소재가 된 작업임에도 가죽을 뒤집어쓴, 바로 지금 피부에 ‘죄’가 새겨지고 있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상상은 이들 필멸의 가죽-신체의 모호한 제스쳐, 로버트 롱고의 모노크롬 회화 연작 &lt;도시인(men in the cities)&gt;의 유니폼을 입은 도시인들이 총에 맞은 듯 춤을 추는 듯 보이는 어떤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듯이 이분법적 대치가 허물어지는 어떤 순간이 일으키는 시적 아름다움을 현시한다. 규범과 정상에서 밀려난, 극한으로 내몰린, 취약한 생존 자체를 속수무책으로 드러내는 존재가 아름답다. 가해자-되기의 욕망을 가르치는 현실-세계에서 예술은 실패나 추락의 제스처, 부정적인 것의 시(!)를 보유하고 현시한다. 시는 재현불가능한 해독불가능한 신체에서 막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는 이미지에 대한 것이다 &lt;상흔&gt;은 그런 이미지를 일종의 조각으로서, 그러나 입체인 척 조작된 가죽의 기괴함을 첨가해서 붙든다. 지금도 아니 더욱 강하게 작동하는, 편재하는 우생학적-우파적 관점은 타자와 죽음을 가시적 공동체에서 제거하려는 나치의 욕망-태도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작가는 자신에게 도착한, 자신이 수신한 공예적 사물들, 기법들을 이용해서 시적-미적이면서 동시에 폭력적-SM적인 무대를 만들었다.</p>
<p>2015년 이후의 페미니즘, 혹은 그 외 다양한 소수자 담론들이 정치적 올바름의 수사를 통해 과잉과 위반에 탐닉하는 예술의 자율성이나 특수성을 문제 삼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미 항상 불평등한 (권력-)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나와 너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평등과 상호성의 환상/이상을 실현할 것이고 대체로는 일방향성과 폭력의 징후를 담지한 채일 것이다. 데리다의 “폭력의 바깥은 없다”는 비관적인 단언을 나는 동시대 윤리가 그럼에도 시작해야할  기반으로 생각하기에, 이미 항상 불평등한 관계를 아주 잠시 ‘평등’의 사건으로 바꾸는 지점, 틈에 대해, 올바르게 읽을 수 없는 모호한 사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죽에 대한 기계의 개입이 폭력에 대한 공모이자 고통에 대한 위로라는 모순에 대해, 가죽과 기계의 관계가 춤과 살육으로 동시에 읽히는 교란에 대해, 스러지는 고통받는 신체의 시적 제스쳐라는 역설에 대해 이민하 작가 덕분에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사실 설득과 해석이 필요한 장면이라기보다는 반응과 응시를 요구하는 장면이다. 지적 냉소와 과도한 파토스 사이 어딘가를 보도록 연출된.  결국 예술은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재)표식하면서도 현실의 반영이나 도덕의 반복이 아닌 어떤 잔여, 부스러기 같은 것이니까.</p>
<p>Ⅱ</p>
<p>그리고 작가의 몸이 직접 등장하는 퍼포먼스들이 두 번째로 시선에 들어온다. 작가가 전체 장면을 구조화하고 무대에 올리는 비가시적인 연출가가 아니라 당사자-퍼포머들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고-나눠주는 제물이자 제사장으로 등장하는.</p>
<p>가령 영상 &lt;아남네시스(Anamnesis&gt;, 2017&gt;는 결혼이나 취업을 이유로 한국으로 이주해 외부자로 살고 있는 이주 여성들과의 협업이다. 이주 여성들은 이곳 여성 집단 내 소수자로서 차별과 혐오의 언어가 상시적으로 자신의 의식 내지 피부에 쓰여지고 있는 이들이다. 작가는 이번에는 가축에게 소유주의 엠블렘을 찍는 불도장을 당사자 여성들에게 쥐어주고, 이번에는 가죽의 아래 누운 자신이 덮은 가죽 위에 그들이 기억하는 부정적 언어를 새기도록 디렉션을 주었다. 가해자-사디스트의 전유물인 인두를 피해자-마조히스트가 쥐고 상징계적 언어의 폭력과 정서적 슬픔의 언어를 ‘재’-각인하는 과정은 결국 폭력을 글쓰기로, 여성들 각자의 모국어와 글쓰기 스타일이 나타나는 차이의 퍼포먼스로 바뀌게 된다. 우리는 언어의 내용이 아니라 언어의 차이, 폭력적 표면-가죽이 심미적 바탕-무늬로 변용되는 과정을 보게 된다. 이것은 언어 폭력이 한국어가 아니기에 읽을 수 없는 기호-이미지로 바뀌는 사건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용의 밑바닥, ‘아래’에 숨을 쉬는 작가의 몸이 있다. 혼자서는 상처이지만 모이면 노래가 되고 긍정이 되는 변용이 슬픔의 공동체의 주장이고 ‘가치’라면 여기서도 그렇다.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벌이는 제의가 아닌, 당사자 곁의 작가가 ‘꾸민’ 제의에 동원된 당사자들, 살이 타는 냄새를 내며 지지직 타들어가는 불도장-인두로 그들은 반복과 차이의 노동을 즐기고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사회의 문제는 당사자의 미적인 행위를 위한 소재로 전유되고 있다. 현실의 고통은 예술의 즐김을 위한 알리바이, 소재, 원료이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한 채 하고 있는, 수동적 능동성의 행위가 어떤 차이, 사건으로서의 대안으로 출현한다. 그리고 이런 협업자들이 이런 변용을 겪는 동안 작가는 바탕보다 더 밑에, 눈을 감고 들숨과 날숨을 느끼며, 오직 순간에 즉해서 있다. 가죽과 자신의 숨쉬기를 공유하면서, 가죽의 무게를 감각하면서, 타들어가는 피부의 냄새를 체현하면서 작가 역시 어떤 변용을 겪고 있었을 것이다. 이 제사장은 동시에 제물로서, &lt;유형지에서&gt;의 장교처럼 즐긴다.</p>
<p>“2019년 11월말 임신 8개월”의 임산부의 몸으로 참여한 퍼포먼스를 영상화한 작업 &lt;통로(Passages), 2021&gt;는 임신한 예술가가 글자그대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역시나 놀랍고 강렬하고 담대한 작업이다. 무대의 ‘내부’는 일본이나 한국의 산실(産室)에 대한 리서치에 근거해서 백색의 천에 둘러싸였고, 작가는 퍼포머들의 손에 이끌려 중앙의 제단 위로 올라가 눕는다. 임신을 둘러싼 수많은 금기를 거스르며 작가는 자신의 부풀어 오른 배를 상처 입은 4명의 당사자들이 만다라를 그릴 바탕으로 내어준다. 이번에 글쓰기는 작가의 있는 그대로의 몸, 배, 8개월된 생명체도 공유하는 바깥-피부이다. 퍼포머들은 붓을 들고 만다라를 바로 그곳에 그린다. 자신의 임신을 사회에서 유통하는 문화적 관습을 거스르며 작업의 소재이자 일부로 끌어들이다니, 사실 좀 놀라웠다. 더러움과 어려움, 불안 등등의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고 이곳으로 옮겨야하는 임산부의 사회-문화적 임무가 간단히 밀쳐지고, 여기서 작가의 임신한 몸은 부정적인 것을 변용시키는 제단, 제물, 알레고리로 전치되어 있다. 작가는 당사자로서 남성 문화 안에서 임산부가 어떻게 남성 주인의 소유물-자산으로 취급당하는지를 겪었다고 했다. 어떻게 병원이 임산부를 의사와 기관의 효율성을 위한 대상으로 관리하는지를 목격했다고 했다. 작가는 그런 경험을 고발과 고백의 소재로 사용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작업이 아니라 지금껏 자신이 실험해온 ‘가죽-피부’ 위에 폭력과 고통과 슬픔을 찍고 새기는 작업의 새로운 바탕으로 자신의 임신한 몸을 사용했다. 이번에도 작가는 눈을 감고 제단 위에 누웠고 무늬를 새겼고 당사자를 뺀 채 작동하는 임신-출산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지 않는 “신성한” 장소를 전유했다. 당사자-퍼포머들이 얇은 목판지 위에 적은/그린 문장들을 씻은 물을 유리그릇에 모은 뒤 망설임 없이 마시는 장면은 이민하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결단, 결기 같은 것을 시각적으로 보충하는 결정적인 장면으로 보였다. 이 더러운, 이 상처를 씻은, 이 치유와 재생을 기원하는 “성수(聖水)”(!)를 뱃 속의 아이, 무구한 미지의 생명도 나눠 마신 것이고, 그러므로 이런 제의는 최초이다. 임산부와 뱃속의 아이가 함께 협업자로 참여한 이 둘(double)이 마련한 제단의 퍼포먼스는 곧 아이가 거칠 “통로”에서 상연되었다. 그리고 출연자들이 모두 양막을 뒤집어쓰고 뱃속의 아이를 미메시스하는 마지막 장면 직전에 우리는 작가가 고고학적 임신출산 관련 이미지들에서 “발견한”, 근대적 병원의 등장 이후로는 사라진 출산의 전근대적 형식, 즉 서서 아이를 출산하는 형태로 자신의 2개월 후의 출산을 미메시스하는 작가를 보게 된다―작가는 이에 대해 “고대 이집트 벽화,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출산 벽돌’을 살펴보면 변을 보듯 쭈그려 앉은 자세를 하고 있어요”라고 설명했다. &lt;통로&gt;는 가죽과 기계의 관계를 복수화하는 이전 작업에 대한 좀 더 강력한 사후적 지지대일지 모른다. 직접적인 현실과 사적인 혹은 집단적인 경험을 뒤덮은 이데올로기-환영을 거침없이 찢고 횡단하는 작가의.</p>
<p>2023년 신작인 2채널 영상 &lt;허물, 체액, 범람&gt;은 이제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엄마인 작가가 낙태와 유산, 비혼모와 같은 여성들 일반이 겪는 사회적 문제, 일부 여성들에게 전가되는 비가시적인 폭력을 가시화하고 그들과 연대하고 그들을 위로하려는 작업이다. 4명의 여성 퍼포머들은 각자 자신의 경험을 카메라 앞에서 낭독하고 어떤 ‘엄정한’ 규칙에 맞춰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고, 이번에도 역시 만다라를 미세시스한 각설탕 만다라를 함께 만들고 뜨거운 물로 녹이는 공동 제의를 치른다. 2022년 작가가 새롭게 재미를 들인, 혹은 새롭게 차용 중인 공예 기법은 “효율성이 떨어지고 그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 있는 화학적 경화”로서의 옻칠 기법이다. 무두질한 가죽, 물성형 다음으로 작가가 골라낸 사라지고 있는 공예 전통이다. 들이는 시간과 돈이 좀 더 많이 필요한 공정을 배우고 구사하는 것을 두고 작가는 작가노트에 “홀로코스트와 같은 사건”의 원인을 “공무원 시스템과 효율성”에서 찾았던 역사학자 라울 힐베르크의 영향이라고 적었다. 전지구적 폭력과 일상적 시스템을 인과론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상상력의 역할, 혹은 소산이다. 역사학자에게도 필요한, 예술가에게는 당연한. 서서히 침범하는 옻독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옻칠을 새롭게 해석하고 재전유하는 것은 폭력의 바깥이 없는 세상에서 예술의 긍정, 자신을 죽이면서 살리는 역설적 긍정의 방식일 것이다. 친아들(!)을 3D 데이터로 모델링하고 ‘조각’으로 만들어내지만 역시 거듭해서 옻칠을 입히고 갈아내는 힘든 노동 속에서 출현한 두 번째(!) 아이(들)는 우리가 아는/기대하는 아이가 아니다. 임신한 당사자로서 임산부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불경한 행위를 작가로서 ‘자행-감행’했듯이 자신의 아이를 인용하면서도 사회가 금한 아이의 형상으로 변용함으로써 유일무이한 자신의 아이에게 역시 자신의 미적인 자유를 선사한다. 당사자란 당하는 자이면서 새로운 이미지-형상을 발명할 수 있는 아직-충분히-오지-않은 자이라는 것을 나는 작가에게서 배운다.</p>
<p>&lt;허물, 체액, 범람&gt;에서 작가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로를 들고 버려진 건물들 사이를 걸어다니는 제사장이다. 가죽-기계 작업에서는 안 보였고, 몇몇 퍼포먼스에서는 바닥에 누워있었던 작가는 이제 빈 건물 사이를 향로를 들고 걷는다. 상황과 조건, 형식에 따라 자신의 물리적 존재 방식을 수정하는 이 작가의 앞으로의 작업이 계속 변화할 것이라는 것, 그것이 작업에 영향을 주는 ‘현실’에 대한 반응이자 책임이라는 것도 지적하자. 카프카의 ‘탐험가’처럼 사건 밖의 예술가-증인으로서건, 소수자-여성-당사자들의 곁에 있으려는 여성-작가로서건, 사적인 경험을 통해 집단적 이데올로기를 수정하고 ‘다른’ 이미지-형상을 발굴하는 생활-예술가로서건, 현실 폭력에 대한 예술가의 대응은 비효율적인 장인 기법과의 재연결이라고 직관하는 연구자로서건 작가는 계속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우발적인 사건으로서의 예술을 기다리며.</p>
]]></content:encoded>
			<wfw:commentRss>http://leeminha.com/?feed=rss2&#038;p=1496</wfw:commentRss>
		<slash:comments>0</slash:comments>
		</item>
		<item>
		<title>2023. 10 딜리버리 &#8211; 안에서 바깥으로, 아래에서 위로, 삶에서 다시 삶으로 (조주리)</title>
		<link>http://leeminha.com/?p=1490</link>
		<comments>http://leeminha.com/?p=1490#comments</comments>
		<pubDate>Wed, 14 Feb 2024 02:46:17 +0000</pubDate>
		<dc:creator><![CDATA[leeminha]]></dc:creator>
				<category><![CDATA[Text-Kr]]></category>
		<category><![CDATA[삶의뒤집힌안쪽]]></category>
		<category><![CDATA[아트플러그연수]]></category>
		<category><![CDATA[이민하작가]]></category>
		<category><![CDATA[조주리]]></category>

		<guid isPermaLink="false">http://leeminha.com/?p=1490</guid>
		<description><![CDATA[딜리버리 &#8211; 안에서 바깥으로, 아래에서 위로, 삶에서 다시 삶으로 글 조주리   ‘출산(delivery)’은 작가 이민하가 지난 몇 해 동안 집중적으로 다루어 온 주제 중 하나다. ‘다루어 왔다’라는 말은 그간의 작업 밀도를 떠올린다면, 다소 미온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이민하가 정말 하려고 하는 일은 출산을 ‘구현’하는 일처럼 보인다.  출산을 매개로 ‘나의 일시적 죽음’과 ‘너의 영원한 삶’(혹은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b>딜리버리 &#8211; 안에서 바깥으로, 아래에서 위로, 삶에서 다시 삶으로</b></p>
<p align="right"><b>글 조주리</b></p>
<p><b> </b></p>
<p>‘출산(delivery)’은 작가 이민하가 지난 몇 해 동안 집중적으로 다루어 온 주제 중 하나다. ‘다루어 왔다’라는 말은 그간의 작업 밀도를 떠올린다면, 다소 미온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이민하가 정말 하려고 하는 일은 출산을 ‘구현’하는 일처럼 보인다.  출산을 매개로 ‘나의 일시적 죽음’과 ‘너의 영원한 삶’(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겠다)을 맞바꾸는 이항 구조를 드러내고, 그러한 구조주의적 해석을 넘어서기 위해 생명 탄생과 관련된 다양한 주체의 서사를 수집하고, 온 존재를 위한 의식을 치르고자 하는 제의 행위로 다가온다. 앞서 이민하는  &lt;통로 (Passages)&gt;(2019 – 2021)라는 표제로 여러 퍼포머들과 함께 임신과 가족에 관한 작업을 진행한 바 있는데, 새 전시 &lt;삶의 뒤집힌 안쪽(The Inside of Life turned upside down)&gt;(2023.10.06-10.15, 아트플러그 연수)은 동일한 지점에서 출발했지만 출산의 다른 지점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에 얽힌 서사와 정동을 다루고 있다. 조각 오브제와 설치, 퍼포먼스, 영상으로 분산되고 통합된 장면은 예의 ‘붉은&#8217; 심상을 연출하며, 세속과 분리된 공간임을 명확히 한다.</p>
<p>출산의 스펙트럼을 극단으로 넓히다 보면, 그 안에는 자발적/비자발적 유산 경험과 다양한 부적(negative) 상태가 연결되고 포함된다. 이른바 정상가족 개념에 의거한 정상임신과 출산, 양육으로 이어지는 고리에서 비껴나간 사례들을 껴안으면서, 이민하는 다시 한번 생명을 매개하는 존재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다수의 작업에서 리서처이자 연출가, 그리고 퍼포머로 임했던 이민하는 이번 전시에서 ‘제사장&#8217;되기를 자처한다. 미술의 언어를 빌려 출산과 그 과정에서의 탈각을 다양한 상황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위해 방대한 양의 문헌 탐색과 사람들과의 인터뷰에 시간을 쏟고, 작업으로 다가가기 위한 크고 작은 실천을 매번 의식 치르듯 대하는 이민하의 스탠스는 프레임의 바깥에서 서사를 설계하고, 화면의 뒤쪽에서 상황을 견인하는 작가들과는 다른 지점에 와있다. 타인의 고통에 예민하게 감응하는 힐러(healer)이자, 그 스스로도 치유받기를 원하는 한 사람으로서 작업의 선봉에 선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결의를 요하는 것일까. 제의를 치러내기 위한 과정에 담긴 그 모든 신산함은 하나의 퍼포먼스에, 진혼(鎭魂)의 리듬에 수렴된다.</p>
<p>바로 그런 점에서, 이민하의 작업 태도와 주제적 천착은 때로 의문점과 갸웃거림을 유발한다. 어느 곳에서건 제사장의 입지가 좁아져만 가는 각자도생의 삶 안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버석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회적으로 규정된 모성에 대한 의구심이 맹렬하게 치오르는 곳에서, 아이에 대한 무차별적 헌신과 혐오가 기이하게 맞닿아 있는 한국 사회에서 특히 그렇다. 출산은 이민하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이 온몸으로 치러내는 삶과 죽음의 전장이지만, 그러한 경험을 겪은 바 없는 대다수의 타인들에게 영구히 이해받지 못할 공백의 지대이자 남의 사정이기도 하다. 그 기로에서, 이민하가 펼쳐내는 몸짓의 진의를 이번 전시에서 진중하게 살펴보고자 한다.</p>
<p>전시가 구현되기 전부터  이민하는 ‘출산과 학살 사이’, 그리고 ‘제사장으로서의 예술가’로 명명한 사전 연구 단계에서 종교학과 문화인류학, 에코 페미니즘, 역사학을 아우르는 폭넓은 문헌 연구와 학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뿌리깊은 여성의 신비화와 그와  나란히 작동해온 여성 혐오의 역사를 교차하여 살핀 바 있다. 이와 더불어, 자연의 연속체로 상정된 여성 존재를 둘러싼 다양한 의례 양상과 각각의 문화적 함의를 조사하였다. 역사적 탐문과 여성주의적 시선이 응당 필요했던 까닭은 주제가 갖는 당대성, 즉 시대정신에 관한 끊임없는 재확인의 과정이자 논리의 직조를 통해 자기 방식의 의례를 모의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출산을 택한 자와 그로부터 소외된 자, 낳은 자와 태어난 자, 유산과 임신 중절의 당사자,  가해자와 희생자, 기억하는 이와 망각을 택한 자, 주변인, 주변인의 주변인… 여성성과 여성의 출산에 대한 과도한 숭앙도 무분별한 혐오도 동일하게 거세된 진공의 무대에서라면, 무엇이 중심이고 다른 무엇이 주변의 서사일지 가늠하기 힘들 것도 같다.</p>
<p>지난 작업과정을 통해 현대사회의 병리적 현상과 그 기저에 있는 정신성의 구조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데 관심을 가져왔던 이민하에게 있어 출산과 그 배면에 작동하는 타나토스(Thanatos, 죽음충동)의 양립 메커니즘은 전반적인 쟁점의 연속체인 동시에, 새로운 국면에서 작가가 실존적으로 경험한 생의 복잡성을 드러낸다. 나아가 예술적 재현이 갖는 윤리적 딜레마를 반추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작가적 수행성의 가능성을 탐문하도록 한다.  작업을 추동하는 동력은 그 자신의 임신과 분만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랜, 더 복잡한 기원을 갖는 것일지 모른다. 혹은 본능적인 동일시의 대상에서 객체로 분리된 아이의 존재에 머물던 시선이 조금 더 넓은 차원의 타자들의 삶으로 확장되고,  타자화된 자기 삶의 구심점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난 것일 수도.</p>
<p>전시장 내부는 이미 분명한 제의적 코드를 담지하고 있다. 단단하던 각설탕 더미의 일부가 뜨거운 열기에 녹아내리고 허물어진 판(plate), 아기 모양으로 제작된 악기가 올려진 두 번째 판, 그리고 옻칠을 한 귀와 코 조각이 담긴 마지막 판이 있다.  그 주변으로 아이의 전신 조각, 신생아가 웅크리고 기지개하는 동작을 3D 모델링하여 만든 애니메이션 작업,  퍼포먼스에서 착용했던 옷가지가 에워싸고 있다.  붉은 색으로 마감된 세 개의 원형 만다라는 보기에 따라 생명의 좌대이자, 망자의 무덤이자, 추도를 올리기 위한 비석이다.</p>
<p>아이 모양의 북(실제로 일반적인 북의 형태라기 보다 아이가 엎드린 형상에 가깝다)은 귀엽기 보다는 가혹한 상상을 떠올리게 한다. 어린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에 관한 옛 이야기,  어디선가 사람 가죽으로 북을 만들었다던 설화를 소환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잔뜩 웅크린 저 모습은 말그대로 복중 태아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다. 좁고 물컹한 공간 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웅크리며 뒤트는 동작은 성장 내내 지속되는 안정적 자세이자, 모체로부터의 양분을 한껏 받아들이는 모습일 수 있다.</p>
<p>누워있는 아기 조각의 몸체가 반들반들 윤이나는 까닭은 3D 프린팅으로 사출해 낸 조각 위에 옻칠의 재료인 생칠로 덧바르며 여름 내 표면을 사포로 갈고 닦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오브제 중 하나는 가죽으로 물성형을 하여 북 형태로 단단히 굳힌 것이다. 말캉하던 것을 단단하게 굳히고, 둔탁하던 것을 매끄럽게 연마하는 가공 행위는 원시적이고 고단하다. 마치 뱃속의 여린 생명을 매일 조금씩 키워내는 것처럼 말이다. 좌대 위 떨어져 나간 귀와 코는 전쟁포로의 귀 무덤을 즉각적으로 상기시킨다. 달리 보면, 생명체가 허물어지는 과정이거나 덜 여문 몸의 파편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에게는 섬찟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조형적 실험과 물성의 재배치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암시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조금 더 구체적인 단서는 영상 작업에 담긴 서사를 통해, 인물의 행위를 통해 유추 가능할 것 같다.</p>
<p>2 채널로 구성된 영상은 여러 참여자들과 함께 구성한 퍼포먼스의 기록물이자, 실제 전시 공간에서의 제의를 완성하는 중심이다.  작가가 초대한 이들은 저마다의 아픔과 사연이 있는 네 명의 인물이다. 비혼모, 낙태와 유산, 출산과정에서 배려받지 못한 경험. 국적과 인종에 상관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있을 법한 일들이지만 한자리에 이들이 모이기까지 어떤 소통과 설득, 배려와 협동이 작동되었을 지 짐작하기 어렵다. 작업에서 리얼리즘을 강조하는 다큐적인 시선으로부터의 탈피, 사연의 핍진성을 축소하는 편집, 여성 참여자 간의 신체적 접촉과 감정적 라포(rapport)를 건조하게 따라가는 시선을 읽게 된다. 무엇보다 작가 자신이 무리의 일원이자 무대 위의 제사장이 되어 제의를 진행하는 방식은 이민하 작업이 갖는 독특한 위상이자, 쉽게 의도를 단정하기 어려운 국면을 제공한다. 퍼포머들이 읊조리는 주인 없는 이야기는 타인의 음성을 대리하여 발화되고, 이들 사이에 약속된 몸짓 언어 안에서 코와 귀, 아이의 몸, 서로의 팔을 조심스레 어루만진다. 동작의 의미를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쉽지 않다.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죽은 아이의 몸을 쓰다듬는 애처로운 행위일지, 기어이 좁은 통로를 뚫고 험난한 세상으로 출격한 갓난 아이의 존재를 축원하는 손길일지 말이다. 다만, 한 가지만은 분명해 보인다. 울지 않아야 대상을 위로 할 수 있고, 거세게 껴안지 않아야 감정을 공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제의의 형식이 아름다워야 하는 보편적 당위일 것이다.</p>
<p>&nbsp;</p>
<p>이 지점에서 이번 전시의 일부이자 전시 바깥에서 나란히 제작된 신작 Ravages 는  또 다른 기계적 몸짓으로 대체된 일종의 카운터파트(counterpart)이자, 또 다른 갈래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스핀-오프(Spin Off)처럼 다가온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천지창조’에서 표현된 거대한 신의 손을 바라보며 시작된 이번 작업은 인류사에 내재된 극한의 폭력성을 오늘날의 기계적 ‘손’에 의태하여 가시화한다.  그러나  공압실린더로 움직이는 기계팔에 걸린  가죽 패치는 여느 때보다 흐물거리는 비체(卑體, abject)의 모습이다. 동물 가죽을 집어 올렸다 내리치는 기계팔의 움직임과 그 속에서 유린당하는 살점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억세고 연약한지, 창작의 의도와 결과적 수행을 명명하게 해부하기란 쉽지 않다. 의료용 처치와 행정적 살처분, 악랄한 고문과 사도마조히즘의 유희, 출산과 학살 사이. 이내,  ‘사이’라는 말이 갖는 무책임한  느슨함에서 달아나고자 극단적 상상으로 치닫는다. 붉은 색 원형 좌대 위에 올라간 것은 찢어발겨진 살점들, 그리고 그것들을 갈퀴로 움켜쥐고 있는 기계팔 석 점이다. 서로 서로 맞물린 틈바구니에서 장엄한 두려움보다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단한 일들의 슬픔, 무기력, 피로가 몰려온다. 작품 앞에서 관객들이 투영하는 감정은 작가의 의도와도, 평론가의 인상과도 다른 또 다른 종류일지라도 상관없을 것 같다. 해질 녘, 공기 펌프를 끄지 않는 이상 밤새 사투를 벌이고 있을 좌대 위의 짝패들과 기이한 풍경을 뒤로하며 생각해 본다.</p>
<p>&nbsp;</p>
<p>사회적 신분을 뛰어넘어 지구상 모든 이가 죽음을 향해 매 순간 가까워지는 이 공평한 세계에서, 제의를 올릴 사람은 누구이며, 위로와 추념의 대상은 누구인 것일까. 매 순간을 강건하게 살아가는 이들, 혼신의 힘으로 하루를 지탱하는 이들, 그 기회마저 실격당한 존재, 낳음을 당했다고 억울해하는 이들, 그 기회마저 실격당한 존재. 동일한 생명 탄생의 메커니즘으로 태어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죽어가는 우리 모두다. 전시를 보며, 태어난 순간 우리 앞에 당도해버린 ‘삶’이라는 딜리버리를 한껏 추앙하다, 별안간 내리쳐본다. 그리고 또 다시 축원해 본다.  안이나 바깥이나, 위나 아내라 모든 것이 만다라처럼 보이는 순간이다.</p>
]]></content:encoded>
			<wfw:commentRss>http://leeminha.com/?feed=rss2&#038;p=1490</wfw:commentRss>
		<slash:comments>0</slash:comments>
		</item>
		<item>
		<title>검은 씨앗 /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title>
		<link>http://leeminha.com/?p=1470</link>
		<comments>http://leeminha.com/?p=1470#comments</comments>
		<pubDate>Tue, 19 Apr 2022 02:35:08 +0000</pubDate>
		<dc:creator><![CDATA[leeminha]]></dc:creator>
				<category><![CDATA[News]]></category>

		<guid isPermaLink="false">http://leeminha.com/?p=1470</guid>
		<description><![CDATA[8회 개인전 &#60;검은 씨앗&#62;을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진행합니다. 기간 : 2021년 7월 29일(목) ~ 8월 11일(수) 장소 :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지하1층 전시실 / 중층 세미나실 (대전광역시 중구 보문로 199길 37-1)]]></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8회 개인전 &lt;검은 씨앗&gt;을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진행합니다.</p>
<p>기간 : 2021년 7월 29일(목) ~ 8월 11일(수)</p>
<p>장소 :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지하1층 전시실 / 중층 세미나실 (대전광역시 중구 보문로 199길 37-1)</p>

<a href='http://leeminha.com/?attachment_id=1471'><img width="150" height="150" src="http://leeminha.com/wp/wp-content/uploads/2022/04/이민하작가님-엽서-2-01-150x150.png" class="attachment-thumbnail" alt="이민하작가님-엽서-2-01" /></a>
<a href='http://leeminha.com/?attachment_id=1472'><img width="150" height="150" src="http://leeminha.com/wp/wp-content/uploads/2022/04/이민하작가님-엽서-2-02-150x150.png" class="attachment-thumbnail" alt="이민하작가님-엽서-2-02" /></a>

]]></content:encoded>
			<wfw:commentRss>http://leeminha.com/?feed=rss2&#038;p=1470</wfw:commentRss>
		<slash:comments>0</slash:comments>
		</item>
		<item>
		<title>2021. 7 Monumental Narrative Recalling the Memory of the Public (Ma Dong-Eun)</title>
		<link>http://leeminha.com/?p=1465</link>
		<comments>http://leeminha.com/?p=1465#comments</comments>
		<pubDate>Thu, 31 Mar 2022 08:52:08 +0000</pubDate>
		<dc:creator><![CDATA[leeminha]]></dc:creator>
				<category><![CDATA[Text-En]]></category>
		<category><![CDATA[Artcritic]]></category>
		<category><![CDATA[Artist_Minha]]></category>
		<category><![CDATA[Contemporary Art]]></category>
		<category><![CDATA[Daejeon]]></category>
		<category><![CDATA[Etüde]]></category>
		<category><![CDATA[Holocaust]]></category>
		<category><![CDATA[leeminha]]></category>
		<category><![CDATA[Ma Dong eun]]></category>
		<category><![CDATA[Minha Lee]]></category>
		<category><![CDATA[Monument]]></category>
		<category><![CDATA[Sound Art]]></category>
		<category><![CDATA[TEMI]]></category>

		<guid isPermaLink="false">http://leeminha.com/?p=1465</guid>
		<description><![CDATA[Monumental Narrative Recalling the Memory of the Public Ma Dong-Eun, Curator / Head of Exhibition Team, Daegu Art Museum &#160; Lee Minha’s solo exhibition titled &#60;Black Seeds&#62;, which was held at the Artist Residency TEMI in the summer of 2021, included ＜Etüde(2021)＞, her first methodological attempt at a sound installation work besides her works employing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b>Monumental Narrative Recalling the Memory of the Public</b></p>
<p>Ma Dong-Eun, Curator / Head of Exhibition Team, Daegu Art Museum</p>
<p>&nbsp;</p>
<p>Lee Minha’s solo exhibition titled &lt;Black Seeds&gt;, which was held at the Artist Residency TEMI in the summer of 2021, included ＜Etüde(2021)＞, her first methodological attempt at a sound installation work besides her works employing leather soldering that she has steadily expanded. The work, which has viewers concentrate all their senses to the artist’s voice from the speaker in a pitch-dark room, is related to a kind of Holocaust that started in Nangwol-dong, Dong-gu in Daejeon and led to the Bernburg Euthanasia Center and Auschwitz Concentration Camp.</p>
<p>The work, which begins with Lee’s soft monologue and reaches its highlight with the noises of air raid encircling the entire space, builds its narrative based on the artist’s extremely subjective interpretation. However, if we carefully listen to the content of the work, we can see that it’s not her personal story but it reveals a monumental déjà vu with a public nature. Her attempt is to reassemble the historic memory that we should all remember.</p>
<p>‘Memory’ and ‘monument’ are the keywords that the author has chosen to describe the artist’s first sound installation work. Recalling the other sides of various layers of the work, I would like to consider how such concepts as memory, memorial, monument and monumentality based on historic facts related to the Holocaust are working in her creation.</p>
<p>Like its ancient Latin word origin, monument connoted basic roles of ‘reminding’ or ‘commemorating.’ However, in the modern era, its concept and usage have undergone a drastic change. The traditional concept of monument, which seeks common values or ideals, inevitably comes into conflict with the era due to the World Wars　II. It was because the aesthetic or socio-political changes in the 20<sup>th</sup> century had to be reflected on the inherent feature of monument that it is the intersection of political memories. As the fragmented and hybrid conditions last due to the changing times, the society is required to bestow common values to different experiences and private memories and to be integrated into a common space (physical or non-physical space). The work containing public issues, amid the absence of shared beliefs or interests, leads dispersed people to a common space-time, where the monument ‘creates’ a common space and propagates the illusion of common memory. It means that, from the moment Lee Minha started her work based on the theme of Holocaust, public narrative began to form regardless of her intention.</p>
<p>The artist continues her monumental monologue on the Bernburg Euthanasia Center and Auschwitz Concentration Camp in a calm and soft voice. Her monologue is a highly symbolic gesture that concentrates past situations on a present place. Short sentences using just several words and her voice carrying them enable the viewers to figure out what she is trying to say without difficulty. And this is also another power that the ‘monument’ or ‘something monumental’ has.</p>
<p>Then, why did the artist present her first sound installation work as something related to the Holocaust? What kind of memory did she try to make the viewers recall? When someone puts forward monumental stories like the Holocaust, in general he/she has a clear motive and a wider variety of memories than what we have expected are generated. Some monuments demand people not to forget and remember what they stand for, while some others are required to explain the past of a nation or an ethnic group. Still others are aimed at educating succeeding generations and deliver them common experiences and realizations. Although rarely, there are also a very small number of these created for the purpose of simply attracting tourists.</p>
<p>For example, the motive for commemorating the Holocaust in the U.S. is as complex as the multinational population that constitute the country, so it is noble, cynical, practical, and aesthetic at the same time. However, Lee’s monument — the author wants to call her ＜Etüde＞ as a kind of monument — is  quite clear and efficient. It’s because her monument is placed in a landscape that can easily be imagined, and it is an intangible monument that can transcend time-space and deeply penetrate any person having sensory nerves, unlike some monuments that resemble taxidermy objects.</p>
<p>In her monologue in ＜Etüde＞, the artist confesses that she first experienced a kind of fear — which she never felt before, not even when she passed by the soldiers carrying guns in every alley she visited in Damascus, Syria, ruined after years of civil war – in Golryeonggol, Daejeon. Did the history of her own people, her own nation let her feel a special presence? Anyone who has listened attentively to her voice in the pitch-dark room, where you cannot be sure whether there’s anybody next to you, may have momentarily understood her fear.</p>
<p>James E. Young, a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English and Judaic Studies in the University of Massachusetts Amherst in the U.S., who is actively working on the Holocaust, genocide and cultural memories, said that a monument, which is not obsessed with permanence that cannot be achieved, embraces social interests of the present and can be extended throughout time, is necessary. In particular, he stresses that it is important to bring light to various social contexts surrounding the motivation and process of building a monument as well as the reactions of visitors after it is completed, and to focus on its public and social functions. This is because a monument is positioned according to the passage of time in constantly changing human lives and community spirit. And people (viewers) are at the center of the actions. It means that for an artist’s work to be fully completed, the monumental work should be conveyed truthfully to the viewers.</p>
<p>Actually, there are various perspectives on monuments. If James E. Young’s theory was based on the imperativeness of monuments, Rosalind Krauss, an art historian, claimed that the modernist period produced monuments unable to refer to anything beyond themselves as pure markers or base. She considered that an abstract, self-referential monument could not commemorate events outside of itself, and it was just dislocated sign. Furthermore, some people argued that rather than preserving public memory, the monument displaced it altogether, supplanting a community’s memory-work with its own material form. Pierre Nora warned that the less memory is experienced from the inside, the more it exists through its exterior scaffolding and outward signs. Andreas Huyssen even suggested that in a contemporary age of mass memory production and consumption, there seems to be an inverse proportion between the memorialization of the past and its contemplation and study. These claims are based on the assumption that once we assign monumental form to memory, we have some degree divested ourselves of the obligation to remember.</p>
<p>It has been several decades since the art circles was permeated by the idea that abstract monuments are more effective in re-creating public issues and ideal values of the society. Lee Minha has gone further to break away from the appearance of the work as material and create this monumental work depending on intrinsic human sense of hearing and imagination and using shapeless and rapidly diffusible sound media.</p>
<p>The work is a study, as its title plainly says. The artist will present sound installation works in more developed ways in the future. I cautiously predict that, if the themes of her works continue to touch on the public memory based on historical facts, an anti-monumental work may be created by the artist after such works reach a certain level.</p>
<p>(from the leaflet &lt;Black Seed&gt; at Artist Residency TEMI, 2021. 7)</p>
]]></content:encoded>
			<wfw:commentRss>http://leeminha.com/?feed=rss2&#038;p=1465</wfw:commentRss>
		<slash:comments>0</slash:comments>
		</item>
		<item>
		<title>2021. 7 공공(public)의 기억을 소환하는 기념비적인 내러티브 (마동은)</title>
		<link>http://leeminha.com/?p=1457</link>
		<comments>http://leeminha.com/?p=1457#comments</comments>
		<pubDate>Thu, 31 Mar 2022 08:43:37 +0000</pubDate>
		<dc:creator><![CDATA[leeminha]]></dc:creator>
				<category><![CDATA[Text-Kr]]></category>
		<category><![CDATA[Artcritic]]></category>
		<category><![CDATA[Artist_Minha]]></category>
		<category><![CDATA[Ma Dong eun]]></category>
		<category><![CDATA[Minha Lee]]></category>
		<category><![CDATA[골령골]]></category>
		<category><![CDATA[기념비]]></category>
		<category><![CDATA[대전산내학살사건]]></category>
		<category><![CDATA[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category>
		<category><![CDATA[마동은]]></category>
		<category><![CDATA[미술비평]]></category>
		<category><![CDATA[사운드아트]]></category>
		<category><![CDATA[습작]]></category>
		<category><![CDATA[이민하]]></category>
		<category><![CDATA[현대미술]]></category>
		<category><![CDATA[홀로코스트]]></category>

		<guid isPermaLink="false">http://leeminha.com/?p=1457</guid>
		<description><![CDATA[공공(public)의 기억을 소환하는 기념비적인 내러티브 마동은, 대구미술관 전시기획팀장 2021년 여름,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개최된 이민하의 개인전 《검은 씨앗》에서는 그동안 작가가 꾸준히 확장시켜왔던 가죽에 인두질을 하는 작업 외에 방법론적으로 처음 시도한 사운드 설치 작품 &#60;습작&#62;(2021)이 공개되었다. 칠흑 같은 어두운 방 안에 오롯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작가의 목소리에 온 감각을 집중시키게 하는 이번 작품은, 대전시 동구 낭월동에서 시작되어 베른부르크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b>공공(public)의 기억을 소환하는 기념비적인 내러티브</b></p>
<p>마동은, 대구미술관 전시기획팀장</p>
<p>2021년 여름,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개최된 이민하의 개인전 《검은 씨앗》에서는 그동안 작가가 꾸준히 확장시켜왔던 가죽에 인두질을 하는 작업 외에 방법론적으로 처음 시도한 사운드 설치 작품 &lt;습작&gt;(2021)이 공개되었다. 칠흑 같은 어두운 방 안에 오롯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작가의 목소리에 온 감각을 집중시키게 하는 이번 작품은, 대전시 동구 낭월동에서 시작되어 베른부르크 안락사 센터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어진 일종의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작업이었다.</p>
<p>작가의 작은 독백으로 시작하여 실제 전시실내 설치된 사이렌을 통해 온 공간을 공습 소리로 에워싸며 절정에 이르게 하는 이 작업은 지극히 주관적인 작가의 해석을 기반으로 작품의 내러티브를 구축해 나간다. 그러나 실상 작품의 내용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작가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닌 공공의 성격을 띤 기념비적 기시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역사적 기억에 대해 재조립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p>
<p>‘기억’과 ‘기념비’, 이번에 처음 시도한 작가의 사운드 설치 작업에 대해 필자가 내세운 주제어이다. 필자는 이번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층위의 이면을 떠올리며,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기억(memory), 기념적인(memorial), 기념비(monument), 기념비성(monumentality) 등의 개념이 그의 작업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 되짚어 보고자 한다.</p>
<p>기념비는 고대 라틴어의 어원처럼 ‘기억나게 하는 것’ 혹은 ‘기념하는 것’이라는 원초적인 기능을 함의했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며 기념비는 그 개념과 실제에 있어 급격한 변환을 맞이한다. 공통의 가치나 이상을 추구하고자 했던 기념비의 전통적 개념이 양차 대전을 겪으면서 근대라는 시기와 불가피하게 충돌하게 된 것이다. 이는 정치적 기억의 교차점이라는 기념비의 태생적 특성에 20세기의 미적 혹은 사회정치적 변환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던 결과이다. 시대의 변화로 인해 파편화되고 혼성적인 상태가 지속될수록 이 사회는 이질적인 경험과 개인의 기억에 공통적 가치를 부여하며 공통된 공간(물리적 혹은 비물리적 공간)에 통합될 것을 요구받는다. 이로써 이미 공유된 신념이나 공통 관심사의 부재 속에 공공적 이슈를 담은 작품은, 흩어져 있는 대중을 공통된 시공간으로 안내하는데, 여기에서 기념비는 공통의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관객에게 공동의 기억이라는 일루전을 선전한다. 이민하 작가가 홀로코스트라는 주제를 기저에 놓고 작업을 시작했을 그 순간부터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미 공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p>
<p>작가는 잔잔하고 낮은 목소리로 베른부르크 안락사 센터와 아우슈비츠에 대한 기념비적 독백을 이어간다. 그의 독백은 과거의 상황을 현재적 장소에 집중시키는 고도의 상징적 행위이다. 한 두 개의 단어와 짧은 문장 그리고 그 내용을 전하는 목소리만으로 관객은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념비’ 혹은 ‘기념비적인 무언가’가 가지는 또 다른 힘이기도 하다.</p>
<p>그렇다면 작가는 왜 그의 첫 사운드 설치 작품을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작업으로 소개한 것일까?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기억을 소환시키고자 한 것일까?</p>
<p>일반적으로 홀로코스트와 같은 기념비적 내용을 앞세울 때에는 그것의 동기가 명확하고, 그 기념비가 생산해내는 여러 기억의 종류들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거나 다양하다. 어떤 기념비는 기념하는 대상에 대해 대중으로 하여금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요구를 하기도 하고, 반면 어떤 기념비는 한 국가, 한 민족의 과거를 스스로 설명하라는 요구를 받기도 한다. 또 다른 기념비는 다음 세대를 교육하고 그들에게 공동의 경험과 깨달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기도 하며, 극히 일부이지만 심지어 어떤 기념비는 단순히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의도에서 탄생하기도 한다.</p>
<p>한 예로, 미국에서는 홀로코스트를 기념하고자 하는 동기가 미국을 구성하고 있는 다국적의 인구만큼 복합적인 것이어서, 고상하면서도 냉소적이고 실용적이면서도 미학적이다. 그러나 이민하의 기념비 &#8211; 필자는 그의 작품 &lt;습작&gt;을 일종의 기념비라고 칭하고 싶다 – 는 매우 명료하고 효율적이다. 그의 기념비는 흔히 상상할 수 있는 풍경 속에 자리하며 흡사 박제물과 같은 기념비가 아닌, 시공간을 초월해 신경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지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무형의 기념비이기 때문이다.</p>
<p>작가는 &lt;습작&gt;의 독백에서, 오랜 시간 내전으로 황폐해진 시리아의 길거리에서도, 골목마다 기관총을 들고 서 있는 다마스쿠스의 군인들을 지나치면서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일종의 두려움을 대전 골령골에서 처음 경험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나의 민족, 나의 국가에 대한 역사라는 것이 그에게 더 남다른 현장감을 주었던 것일까? 자신의 옆에 누가 있는지조차 전혀 알 수 없는 어두운 방 안에서 작가의 목소리만을 귀 기울이며 집중한 사람이라면 이내 그가 느꼈던 두려움을 찰나의 순간 공감했을 것이다.</p>
<p>미국 매사추세츠 대학의 영문과 교수이면서 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 문화적 기억과 관련된 분야를 활발히 연구하고 있는 제임스 영(James E. Young)은 ‘불가능한 영속성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의 사회적 이해관계들을 포괄하면서 시간적으로도 확장 가능한 기념비가 필요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 특히 기념비의 제작 동기와 과정, 제작 이후 관람자의 반응 등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맥락을 밝히면서 기념비의 기능에 있어서 대중과 사회적 기능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기념비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의 삶과 공동체 정신 속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위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행위의 중심에는 대중(관객)이 있다. 작가의 작품이 온전히 완성되기 위해서는 이 기념비적 작품이 관객에게 진실되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p>
<p>사실 기념비에 대한 시각은 매우 다양하다. 앞서 언급한 제임스 영이 기념비의 당위성을 염두해 두고 이론을 펼쳤다면, 미술사학자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근대 시기에 만들어진 기념비들이 순수한 지표로서 자신을 초월하는 그 어떤 것도 언급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추상적이고 자기 창조적인 기념비는 외부에 존재하는 사건을 기념할 수 없으며 그것은 단지 전위된(dislocated) 기호라고 본 것이다. 또 더 나아가 기념비가 공동체의 기억 작용을 밀어내고, 공공의 기억을 자신의 물질적 형태로 고정시킴으로써 그것을 보전하는 대신 완전히 대체한다는 주장도 있다. 피에르 노라(Pierre Nora)는 기억이 내부로부터 적게 경험될수록 그것은 외부의 비계와 외적 기호를 통해 존재하게 된다’라고 경고했고, 안드레아스 후이센(Andreas Huyssen)은 심지어 현대의 대량 기억 생산과 과거의 기념비화, 그 관조 및 연구 사이에는 반비례 관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들은 기념비적 형식을 일단 대중의 기억에 부여하고 나면 대중은 어느 정도 그 기억에 대한 의무를 벗어버릴 수 있다는 전제를 가정하고 있다.</p>
<p>이미 수십 년 전부터 미술계는 추상적 형태의 기념비가 이 사회가 품고 있는 공공의 문제와 이상적인 가치를 재현하는데 더 효과적이라는 의견으로 잠식되어 가고 있다. 이민하 작가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물성으로서의 작품의 외형을 탈피하고, 인간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청각과 상상력에 의지하여 형체가 없으며 빠르게 확산시킬 수 있는 사운드 매체를 이용해 이 기념비적 작품을 제작했다.</p>
<p>이번 출품작은 제목 그대로 습작이다. 앞으로 작가는 더 발전된 방식으로 사운드 설치 작업을 선보일 것이다. 그 작업의 주제가 여전히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공공의 기억을 건드리는 방향으로 이어진다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후에는 작가 스스로에 의해 반(反)기념비적인 작품이 또 하나 탄생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p>
<p>(2021년 7월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진행한 개인전 &lt;검은 씨앗&gt; 도록에서 발췌)</p>
]]></content:encoded>
			<wfw:commentRss>http://leeminha.com/?feed=rss2&#038;p=1457</wfw:commentRss>
		<slash:comments>0</slash:comments>
		</item>
	</channel>
</rss>
